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76화
뜬금 없는 소리였다.
목표가 없다고 죽을 수도 있다니.
내가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랜디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내가 뭐 사이비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내 주변에 너 같은 슈퍼스타들이 많다 보니 해 본 말이었어.”
“저 같은 슈퍼스타요?”
“응. 자신이 슈퍼스타가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연예인들. 목표를 빠르게 이루면 이룰수록 공허함이 가득 차게 돼. 그 공허함을 어쩌지 못하다 결국 마약에 손을 대는 거고, 끝에는 항상 자살로 마무리를 하더군.”
랜디가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우리나라에도, 그리고 외국에도 성공한 스타들이 갑작스럽게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누군가는 그런 것을 보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저렇게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그래서 항상 타살설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된다.
“관중이 많은 무대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세상 제일 어두운 공허함을 맛보게 돼.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무대를 올라가는 가수가 있는 반면, 술과 마약으로 채우는 사람도 있지. 나 역시도 그랬고.”
“당신 같은 사람이요?”
“뭐, 나라고 해서 항상 인기가 많았던 건 아니었어.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공허함을 약과 술로 채우게 됐지.”
랜디에게 무명 생활이 있었던가.
나는 그의 성공만 알고 있을 뿐, 그 뒤에 있던 이면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도 인생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고, 세계에서 알아주는 스타가 되어 보자는 목표를 갖게 됐지.”
“그때부터 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가요?”
“뭐, 한번에 딱 끊을 수 있었던 건 아니야. 그래도 결국엔 다 끊게 됐지만.”
랜디가 말하는 공허함이 뭔지 나도 알고 있다.
특히 큰 무대를 다녀올수록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그때마다 난 음악 작업을 하면서 공허함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임시방편일지도 모른다.
“넌 나보다 더 이른 나이에 성공했잖아.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 공허함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 거야.”
“예. 종종 경험해요. 다행히 제가 겁쟁이라 약물에 손을 못 대고 있는 거죠.”
“하하. 너를 겁쟁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건 겁이 없는 게 아니라 절제력이 굉장한 거지. 아무튼, 그런 공허함은 네가 파고들 수 있는 장기적인 목표가 있다면 해결이 될 거야.”
장기적인 목표라.
그동안 내 장기적인 목표는 혜나 누나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네가 다른 사람들의 앨범은 잘 내고 있지만, 정작 네 그룹의 앨범을 내지 못하는 것도 다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음악적 영감은 언제나 충만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와 혜나 누나의 앨범을 내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차라리 이건 어떨까? 이왕 궤도에 올랐으니 한번 끝까지 가보는 게.”
“끝까지요?”
“난 역사상 팝의 끝을 봤던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마이클 잭슨을 뽑을 거야. 이제껏 누구도 그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룬 사람은 없어. 그가 어이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세상을 호령하고 있었겠지.”
랜드는 잠시 추억에 젖은 눈빛을 띠다 이내 말을 이었다.
“아직도 팝의 황제라는 마이클 잭슨의 칭호를 가져간 사람이 없어. 그러나 연욱 너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세계 최고의 뮤지션이 되어 보겠다는 목표. 그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간다면 넌 다른 가수들처럼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
우리 둘만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질투라도 난 것일까.
누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둘이 무슨 얘기해?”
그러자 랜디가 잔을 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음. 우리들의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프로젝트요?”
“응. 너희 차기 앨범 작업에 나도 참여하고 싶어서 연욱을 꼬셔 보고 있었어.”
“······네?”
금시초문이었다.
랜디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는 듯 내 팔을 툭 쳤다.
“하하. 아니야? 난 열심히 꼬셨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안 넘어오는 건가? 넌 내가 같이 작업하는 게 싫어?”
“아니······. 랜디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기가 막힌 노래 하나가 뽑힐 거 같지 않아? 난 벌써 기대되는데? 아! 미안. 난 저쪽으로 가봐야겠다. 만날 사람이 있거든.”
랜디가 가고 나서 혜나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몸을 여러 번 때렸다.
“야. 진짜야? 정말 랜디랑 콜라보하는 거야?”
그런 얘기는 1도 꺼내지 않았다.
랜디가 진심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농담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던 찰스 왕세자가 자리로 돌아왔다.
“두 분이 오늘 꼭 참석을 해줬으면 했는데, 이렇게 와주니 고맙군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큰 규모의 패션쇼는 처음 보네요.”
그러자 찰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평소에 패션쇼를 좋아하셨나요?”
“초청을 받아 몇 번 다녀 보긴 했습니다. 물론, 왕세자님처럼 옷을 보는 눈이 없어서 좋은 옷을 고른 적이 한번도 없지만요.”
“하하. 나도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그냥 늙은이가 어쭙잖은 취미를 가진 것뿐이죠. 혹시 괜찮다면 나와 같이 구경해 볼 생각 없습니까?”
찰스는 나와 누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세자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네. 좋습니다. 누나도 괜찮지?”
“응! 나도 좋아.”
마침 나도 여기 패션쇼가 어떤 식으로 준비되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왕세자는 아주 신이 난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안내했다.
생긴 것만 보면 집 쇼파에 앉아 손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쇼라서 그런지 활기가 넘쳤다.
그는 우리에게 드넓게 뻗은 스테이지를 보여 주고 이번 패션쇼에 참석한 사람들을 몇몇 소개 시켜주었다.
그리고 패션쇼 뒤에 마련된 파티장도 범상치 않은 규모를 자랑했다.
수백 개의 샴페인 잔이 쌓인 탑이 있는가 하면, 야외에서 직접 베이킹을 하고 있는 쉐프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빵 냄새는 침샘을 자극했다.
“자. 여기가 바로 모델들이 있는 대망의 대기실입니다.”
세상 가장 바쁘다는 대기실.
예전에 어떤 슈퍼 모델이 tv에 나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패션쇼가 시작되면 너무나 바빠서 모델들이 알몸으로 뛰어다니며 옷을 갈아입는다고 말이다.
“막 들어가도 괜찮나요?”
“하하. 괜찮습니다. 여기를 일반적인 패션쇼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른 패션쇼는 한정적인 모델들로 여러 벌의 옷을 보여 주려 하다 보니 꼴 사나운 대기실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데, 여긴 그렇지 않아요. 모두 품격 있는 무대를 완성하기 위해 절제된 걸음으로 옷을 입고 앞에 나서게 됩니다.”
일반 패션쇼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우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된 모델이 많다는 얘기가 사실인지, 대기실이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거기에는 많은 모델과 그들을 꾸미는 스타일리스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와. 비율 봐. 미쳤어. 저기 옷 좀 봐. 예쁘지 않아?”
사실 아무리 봐도 패션은 잘 모르겠다.
특히 패션쇼에 나오는 의상은 더더욱 잘 모르겠다.
누가 봐도 기괴한 옷들이 많은데도 여기 사람들은 그걸 예술이라는 태그로 승화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걸 수천만 원이나 주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놀라울 따름이다.
“왕세자님~”
“오~ 레이어스. 여기 있었군.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찾고 있었네.”
투블럭 컷에 무지개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레이어스라는 흑인은 길쭉하고 마른 몸을 하고 있었다. 또한 본인이 예술가라는 것을 과시하듯, 화려하면서 편한 복장이 특징이었다.
“서로 인사하시죠. 여긴 레이어스 반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저 알아요! 엄청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제가 레이어스 브랜드도 좋아해요!”
누나는 레이어스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오~ 레이디. 보는 눈이 있는걸? 우리 브랜드를 쓰는 사람 중 예쁘지 않은 사람이 없지.”
레이어스는 혜나 누나를 위아래로 빠르게 스캔하더니 이내 박수를 쳤다.
“왕세자님. 어디서 이런 아름다운 레이디를 데려온 겁니까? 얼굴, 몸매, 거기다 포스까지. 모든 게 완벽하잖아요.”
“하하.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 여긴 이번에 엘리자베스 여왕께서 특별히 초청한 분들이라네. 혹시 누군지 알고 있나?”
“그럼요. 특히 이 남자는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 음악 천재 아닌가요?”
레이어스는 뭔가 거부감 드는 눈빛으로 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내 손을 휙 채가며 말했다.
“반가워요. 그쪽은 정말 강탈해버리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네요.”
“가, 강탈이요?”
그러자 찰스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원래 이 사람이 그런 농담을 잘하곤 합니다.”
“맞아요. 제가 표현이 좀 과격했죠? 그런데 왕세자님. 이 두 사람을 데리고 어딜 또 가실 생각인가요?”
“음. 행사장을 쭉 구경시켜 주려 했지. 왜 그러나?”
“이 두 사람을 그냥 떠나보내기는 너무 아까워서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특별히 제작된 옷이 있는데, 누굴 입혀 줘야 하나 엄청 고민했어요.”
“그래서?”
“혹시 가능하다면 이 두 사람에게 한번 그 옷을 입혀 보고 싶은데.”
레이어스의 말에 찰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괜찮을지 모르겠군. 이분들은 내가 초청한 손님들이라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기가 좀 곤란해서 말이지.”
그러면서 은근한 눈빛을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찰스가 이렇게 일을 의도한 것처럼 느껴졌다.
난 딱히 옷을 입어 줄 생각이 없었다.
아까 잠깐 보니, 여기 옷들은 전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기괴한 것들이 많던데, 그런 걸 입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그런데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누나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꼭 입어 볼래요! 엄청 예쁜 옷 맞죠?”
“어머~ 물론이지. 자기도 보면 아주 깜짝 놀랄걸? 내가 이거 하나만큼은 확신해. 이번 해에 들어서 본 옷 중 최고로 예쁠 거야.”
“그럼 당연히 입어야죠.”
“좋아. 모두 날 따라와.”
누나가 갑자기 수락해버리는 바람에 거절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졸지에 나와 누나는 레이어스의 뒤를 따라가게 됐고, 찰스 왕세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혼자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러려고 한 건 아닌데, 혜나 씨는 참 모험심 강하군요. 뭐랄까. 누구와도 허물없이 지낼 것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랄까요?”
“그러게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자······.”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마터면 괜한 말을 할 뻔했다.
사실 지금도 의문이긴 하다.
저렇게 밝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는 누나가 저번 생에서는 어떻게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생각이 문득 들고 나니 조금 화났던 마음이 금방 누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