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아 되었다 174화
이그니치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기이함을 느꼈다.
초반에는 장연욱의 피아노가 조금씩 박자를 따라오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배려가 없이 초반부터 박자를 완벽하게 맞추는 피아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박자를 제대로 맞추고 오케스트라의 성향을 파악하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해도 합을 잘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인데, 지금 기묘하게 상황이 역전되었다.
처음에는 장연욱이 박자를 따라가려고 연주가 조급했었는데, 지금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욱의 박자에 따라가고자 애를 쓰는 게 간간이 보였다.
강렬한 스타카토 리듬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끝나면 그 뒤를 이어 피아노가 진입한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 또 다시 강한 리듬으로 곡이 이어지는데, 두 차례의 클라이맥스가 이 곡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그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어떻게 합을 맞추느냐에 따라 연주의 질이 달라진다.
따라란-!
완벽한 박자였다.
정확히는 오케스트라가 맞춘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전체적인 곡의 균형을 잡으며 박자를 충실하게 맞췄다고 봐야 했다.
수십 년 동안 여왕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으면서 이그니치는 단원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클래식의 대표적인 곡 중 하나로 뽑히는 ‘황제’도 수백 번 연주해봤다.
그러나 아무리 익숙한 곡이라고 해도 당연히 실수가 나오는 법이다.
백만 번을 연습해도 실수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렇기에 단원들이 조금의 실수를 하는 건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장연욱의 연주는 신기하게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1악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초반에 연주가 흔들리던 건 안중에도 없는지 어느새 신들린 듯 연주를 이어가던 장연욱을 이그니치가 힐끔 바라보았다.
황제 1악장 Allegro가 클래식의 정수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1악장 마지막 파트의 영향도 컸다.
보통 협주곡은 마지막에 연주자가 기교를 부리며 악보와는 상관없이 곡을 자유롭게 연주를 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한다.
하지만 베토벤은 그러한 연주자 독단의 기교를 막고자 악보에 별도로 첨부까지 해두었다.
연주자는 절대 본인의 기량을 선보이고자 즉흥적인 연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사실 베토벤이 황제를 작곡하기 전까지는 협주곡 마지막에 연주자 마음 가는 대로 기교를 섞어 마무리하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베토벤이 작곡한 황제가 악보를 무시하는 연주자의 독단을 막고자 장치를 넣으면서 수많은 작곡가에게 새로운 영감을 안겨 주었다.
물론, 지금도 황제를 연주하면서 습관처럼 마지막에 기교를 넣어 멋대로 마무리를 하는 연주자들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악보를 중시하던 베토벤이기에 이그니치 역시 그의 클래식 정신을 계승하고자 연주자의 독주를 항상 막아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장연욱은 이미 쇼팽 콩쿠르에서 기존의 클래식 틀을 깨버린 연주자다.
연주자가 아니라 악보를 중심으로 둬야 한다는 베토벤의 ‘황제’에서조차 그 이기적인 정신을 보여 주려고 할까?
이그니치는 장연욱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1악장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치달았다.
“······.”
그런데 이그니치가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피아노는 악보에 나온 그대로를 따라 절제된 음을 유지하며 마지막에 마무리를 지었다. 그야말로 베토벤이 악보에 의도한 그대로를 따랐다.
1악장이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어떠한 변형도 없는 순수한 클래식 그 자체로 말이다.
우습게도 겨우 2번째 연주 만에 1악장을 완곡해 버렸다.
“······10분간 휴식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그니치는 단원들의 표정을 살펴봤다.
몇몇은 충격에 빠진 듯 보였고, 몇몇은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첫 번째 연주 때는 그렇게 헤매던 연욱이 두 번째 연주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연욱의 콧대를 꺾어 버리기 위해 배려조차 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던 단원들이 두 번째에서는 오히려 연욱의 뒤를 따라가느라 바쁜 행색을 보이지 않았던가.
“미스터 장.”
이그니치는 물로 목을 축이고 있던 연욱을 따로 불렀다.
“예. 마에스트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 때문에 그러십니까?”
연욱은 이미 그의 속을 읽고 있었다.
이그니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난 미스터 장의 성격상 거기서 독주를 보여 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럴 리가요. 베토벤이 따로 악보에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두지 않았습니까. 카덴차는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카덴차.
연주자의 독주를 의미한다.
“하지만 미스터 장은 항상 그런 틀을 무시하지 않았나요?”
무시한다라.
연욱이 미소를 짓자 이그니치의 안색이 굳어졌다.
“왜 웃으시죠?”
“글쎄요. 사람들은 이상하게 제가 틀을 무시한다고 하더군요. 아니면 그 틀을 부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그게 틀린 말입니까? 콩쿠르에서 보여줬던 그 기교들. 악보를 무시하는 그 행동들. 그게 틀을 부순 행위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역시, 마에스트로는 여전히 절 괘씸한 반항자로 보고 계시는군요.”
“미안하지만 그게 사실 아닙니까?”
지휘봉을 들 땐 누구보다 차가웠던 사람이 지금은 얼굴이 붉게 올라올 정도였다.
연욱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전 그저 작곡자의 의도에 따랐을 뿐입니다.”
“뭐, 뭐라고요?”
“쇼팽 콩쿠르를 준비할 때 저는 그가 지은 곡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특정 곡들에서 그의 의도가 느껴지더군요. 어디서 무얼 해야 할지, 또 무엇을 바꾸면 좋을지 등등. 그래서 그 느낌을 살려 작곡자의 의도를 최대한 대중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궤변이군요.”
“예. 하지만 제 귀에 그렇게 들리는 걸 어떡합니까. 쇼팽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은 일반인의 무언가를 뛰어넘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인들의 속내를 남들 모르게 곡에 남기곤 하죠. 제가 그중 일부분을 들은 게 아닐까 가끔 생각합니다.”
듣기에는 궤변 같았다.
본인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위대한 작곡가들이 친구나 혹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악보를 작곡할 당시 본인의 마음을 그 곡에 적어 놓았다는 표현을 하곤 한다.
어쩌면 베토벤처럼 단순히 글로만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그런 악보를 만든 것이 아닐까?
아주 가끔 이그니치도 클래식 곡을 듣고 있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 젊은이에게 그러한 의도를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장연욱이 보여 준 행보를 보면 희대의 천재 음악가라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지 않은가. 특히 오늘 연습만 봐도 그의 기량이 얼마나 괴물 같은지도 알 수 있었다.
“제 말을 믿어 달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마음대로 곡을 농락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군요. 전 그저 제게 들린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게 잘못된 거라고 정죄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
이그니치는 순간 본인이 앞뒤도 모르고 흥분부터 한 것이 부끄러웠다.
“일단 잘 알겠습니다. 오늘 연습을 잘 마무리하도록 합시다.”
“예. 바라는 바입니다.”
지휘봉을 다시 든 이그니치는 피아노 앞에 앉은 연욱과 단원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작곡가의 의도라.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작곡가의 의도를 처음으로 장연욱이 세상에 꺼내 준 것은 아닐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그니치는 연주를 재개했다.
* * *
“엘리자베스 홀에 있다고?”
“네. 오늘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다고 합니다.”
“음. 그래?”
찰스 왕세자는 비서의 보고를 듣고는 턱을 쓸어내렸다.
“근데 거기 분위기는 좀 어때? 여왕의 오케스트라는 좀 폐쇄적이잖아.”
“쇼팽 콩쿠르 때 장연욱이 클래식을 훼손했다고 보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런 사람을 초청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쯧. 안 봐도 훤해. 여왕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놈들이 얼마나 텃세를 부릴지 상상이 가. 이러다 장연욱이 그냥 다 그만두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야?”
그거야 말로 나라 망신이었다.
물론, 여왕의 성향상 그런 일이 벌어지게 가만히 놔둘 리 없겠지만 말이다.
찰스 왕세자는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엘리자베스 홀에 도착했다.
“연주를 때려쳐도 상관없어. 솔직히 그 정도 비주얼에 음악을 한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거든.”
찰스는 보석처럼 잘 다듬어진 연욱을 이대로 놓치기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수 무거운 발걸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음?”
그런데 입구에서 서성이는 한 여자가 찰스 왕세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냥 일반적인 티셔츠에 짧은 미니스커트와 스니커즈 운동화.
별 볼 일 없는 패션이었으나, 뒤로 묶은 긴 머리와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목선과 전체적인 몸의 길이는 황금 비율을 자랑했다.
특이한 건 동양인이라는 점이었다.
“저 여성분은 누구지?”
비서가 잠깐 안경을 올리고 보더니 이내 답을 내놓았다.
“장연욱과 함께 그룹 활동을 한다는 누이입니다. 이틀 전에 영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장연욱의 누나라고? 잠깐만. 저번에 알현실에서 못 봤는데?”
“간격을 두고 영국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장연욱과 같이 펜트하우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허- 둘 다 정말 축복받은 몸을 가졌군. 이대로 그냥 놓치면 안 되겠어.”
찰스 왕세자는 조심스레 혜나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크흠.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예? 저요?”
“예.”
혜나는 찰스 왕세자를 스윽 훑어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비서가 말했다.
“이분은 찰스 왕세자이십니다.”
“왕세자요? 헉. 엄청 높으신 분이네.”
왕실 가족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혜나는 어떤 자세를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냥 편하게 있으셔도 됩니다.”
“근데 저한테는 무슨 일로······.”
“아. 사실은 오늘 그쪽 동생분에게 용건이 있었는데, 레이디에게도 용무가 생겨서 말입니다. 일단 같이 들어갈까요? 왜 여기서 서성이고 계십니까?”
“아. 제가 잠자고 있는 동안 장연욱이 말도 안 하고 연습을 나갔더라고요. 그래서 막 들어가도 되나 싶어서요.”
“지금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걱정이군요.”
“뭐가요?”
“여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워낙 깐깐해서 동생분이 어떤 핍박을 받고 있을지······.”
“핍박이요? 아니. 이 사람들이 진짜.”
그 예뻤던 혜나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당장이라도 깽판을 칠 것만 같은 자세로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응?”
그런데 찰스 왕세자가 말했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미스터 장! 저랑도 한번 찍어주세요!”
“잠깐. 고든. 내가 먼저야!”
“다들 신사답게 줄 좀 서지?”
단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연욱에게 달려들어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호기롭게 안으로 들어왔던 찰스와 혜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