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173화 (173/200)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73화

엘리자베스 여왕 때 만들어져서 그녀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스 홀은 여러 저명한 지휘자들과 연주자들이 거쳐 지나간 곳이다.

특이하게 이 홀 위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는데, 워낙 높이가 엄청나서 그 거대함에 비해 조금 작아 보였다.

보통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면 마이크를 앞에 두어 음향 효과를 주지만, 여기는 특별히 소리가 잘 퍼져 나가게 설계가 되어 있어 별도로 음향 장비를 준비하지 않을 정도다.

당연히 음악을 듣는 청중이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모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연습을 매번 하게 되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여왕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번 자리를 잡게 되면 은퇴할 나이가 될 때까지 여길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도 조금 물갈이가 된 거야. 최근에 단원들 몇몇이 바뀌었다고 들었어. 그런데 여전히 뭐 보다시피······.”

제니는 조용히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껏 같이 연주해 본 오케스트라 중 평균 나이대가 가장 높았다.

“자, 시작해 볼까요? 미스터 장도 어느 정도 연습을 해왔겠죠?”

“예.”

어떤 곡을 연주하게 될지는 영국에 오기 전부터 공지를 통해 들었다.

베토벤의 마지막 협주곡이라 불리는 ‘황제’

그동안 베토벤은 여러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본인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다. 하지만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작곡하고 나서는 피아노 연주를 다른 이에게 맡겼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프랑스군이 빈을 점령하고 사방에서 들리는 포탄 소리 때문에 베토벤의 귀가 급격하게 안 좋아져 말미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라는 제목도 베토벤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에 출판사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럼 1악장 allegro부터 연주해 보겠습니다.”

* *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말 그대로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다.

즉, 바이올린은 피아노를 보조해 줄 뿐,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 협주곡 황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적절하게 섞일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지휘자의 역량이었고, 연습 초창기에는 으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피아니스트에게 맞춰 주면서 서서히 기량을 상승시킨다.

바이올린이라고 다를 건 없다.

연습 초창기에는 서로 모르는 부분이 많고, 익숙하지가 않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배려가 절대적이다.

항상 제니는 그런 배려를 받으며 성공적인 연습을 해왔다.

그런데 여긴 뭔가 이상했다.

따라란-!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황제는 난이도가 높은 곡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협주곡들은 어느 정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며 열기를 일으켜 피아노가 수월하게 따라올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이 곡은 힘찬 화음과 함께 피아노가 곧바로 진입하여 20분 동안 거의 쉬는 시간 없이 연주해야 한다.

교향곡의 표본이자 그 시작점이라 불리는 ‘황제’는 베토벤이 처음으로 만든 역동적인 곡이다.

이후 수많은 작곡가가 이 곡으로 영감을 받아 지금의 교향곡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곡의 특이점은 피아노 못지않게 관현악이 주목받는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제니와 장연욱의 조합은 무엇보다 좋았다.

둘 다 정상급의 연주 실력을 가졌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연습을 하는 거지?’

오늘이 첫 만남이다.

첫 만남이면 대충 어떤 식으로 곡이 진행되는지 맛보기로 보여주고 피아니스트가 자연스럽게 연습에 녹아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대단한 연주가라고 해도 첫 만남부터 능숙하게 호흡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분위기가 매우 이상했다.

배려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피아노가 엉킬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도 지휘자는 지휘를 계속해서 이어갔고, 단원들 역시 피아노에 맞춰 줄 생각이 전혀 없는지 소리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본인의 연주 소리를 한껏 높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더는 못 들어주겠네.’

참다못한 제니가 바이올린 연주를 멈추려는 순간.

한창 오케스트라의 박자를 따라가는 것도 정신이 없을 연욱이 갑자기 제니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제니의 몸이 들썩였다.

연욱의 눈빛이 꼭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절대 연주를 멈추지 말라고 말이다.

제니는 당장이라도 휠을 던져 소란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갔다.

물론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잠깐 삭힐 뿐.

“음-”

이윽고 지휘자가 봉을 내려놓으면서 잠깐 연주가 중단됐다.

“3번 파트 소리가 조금 마음에 안 드는군. 박자가 약간 얽혔어. 특히 바순 쪽에서 말이야. 그리고 피아노도 잘 따라와 줬으면 좋겠군요.”

이그니치의 말을 듣고 제니는 눈에 불을 켰다.

“잠깐만요. 마에스트로.”

“네. 미스 웨이든.”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죠?”

“뭐가 말입니까.”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세요?”

제니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려는 걸 연욱이 제지했다.

“제니. 그만 해요.”

“아니. 넌 화도 안 나? 지금 이 사람들이 너를······!”

“괜찮아요.”

연욱이 저렇게 말하니 제니도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모두 냉랭한 시선을 연욱에게 보낼 뿐, 누구 하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런데 연욱은 저런 시선을 보내는 놈들에게 뭐라 한마디 하지도 않고 있는 게 매우 답답해 보였다.

만약 자신이 저런 대우를 받았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기 연습실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럼 다시 연습을······.”

이그니치가 지휘봉을 들어 연주를 재개하려는 찰나.

“마에스트로.”

줄곧 가만히 있던 연욱의 입이 열렸다.

“제가 박자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 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죠?”

“음. 단원들의 악기 소리가 별로였다고 할까요. 그 불쾌한 기분이 연주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가급적이면 말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연습을 대충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자 단원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들은 마치 건방지게 누구에게 훈수질이냐는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이그니치는 이러한 연욱의 지적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협주곡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솔로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의 화음이죠. 어느 부분에서 악기 소리가 별로였습니까?”

“전체적으로 첼로와 바이올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단원들이 제대로 조율을 맞추지 않은 것 같더군요. 조금씩 소리가 어긋나 있었어요.”

“음이 잘 조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까?”

“예. 괜찮다면 제가 누구인지 가리켜도 될까요?”

이그니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침없이 단원들 쪽으로 걸어갔다.

“일단 이쪽 분.”

“무, 무슨 소릴! 내 악기는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어!”

노년의 남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그니치는 검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해당 연주자만 연주를 시켜보았다.

“음. 확실히 조금 조율이 어긋나있군.”

이그니치도 인정을 하자 해당 연주자는 얼굴을 붉혔다.

그 뒤로 연욱은 한 명씩 지적하며 악기 조율을 끝냈다.

“아마 제니 때문에 기존 연습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갔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방금 전 연습에서도 바이올린 쪽이 좀 과하게 연주가 되더군요. 하지만 그런 건 괜찮습니다. 연주 레벨이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여러분도 제니처럼 연주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전 연습에 진지합니다. 조율만큼은 신경을 더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연욱이 날리는 일침을 듣고 제니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그래. 천하의 장연욱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리 없지.

거기다 은근히 연주 실력을 비꼬는 것도 제니에게는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여왕의 오케스트라라고 해도 이미 이곳은 변화가 멈춘 곳이다.

여왕의 타이틀을 건다고 해서 다른 유명한 오케스트라보다 더 연주를 잘한다고 볼 수 없다.

연욱은 그걸 꼬집어서 말한 것이다.

“크흠-.”

여기저기서 불편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변화무쌍한 연주를 좋아하는 연욱에게 진정한 클래식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다 되레 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참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젊은이야.’

이그니치는 저 자존심 넘치는 연욱의 행동이 분명 괘씸하게 보여야 하는데,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실력은 없고 자존심만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지만, 실력에 비례하는 자신감은 그 사람의 말에 힘을 주고 더 돋보이게 만든다.

그게 딱 장연욱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보죠. 오늘 1악장을 빠르게 연습해 봅시다.”

이그니치 본인도 그렇고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연욱에 대해 썩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 연습을 통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왕의 오케스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세대 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매년 퀄리티가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원래 연주라는 것이 세월을 지나다 보면 완숙해져야 하는 법인데, 그냥 고인물이 되어 버린 단원들의 실력은 어느 순간부터 한쪽 면에 멈춰 서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타파해 나가야 하는지 오래 전부터 고민했던 이그니치는 오늘 연습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어쩌면 이 오케스트라도 조금은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운 말이다.

* * *

“흐음-.”

찰스 왕세자는 잔에 있는 와인을 음미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상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본 것 중 가히 최고의 핏이었어.”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치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옆으로는 수많은 양복 컬렉션이 즐비해 있었는데, 신사의 상징인 양복을 모으는 건 그의 찰스 왕세자의 취미이자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양복 핏이 잘 맞는 사람을 유독 좋아하는 것도 그의 특징이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수트 핏이 간드러지게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찰스 왕세자는 그런 사람을 두고 신이 내린 인간이라 불렀다.

그런데 최근 신이 내린 인간을 알현실에서 보게 됐다.

그것도 무려 동양인.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피아니스트였다.

자신이 직접 스타일을 맞춘 것인지, 아니면 스타일리스트가 따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연욱은 절제된 감각으로 양복 핏을 맞추고 나타났다.

또한 걸음걸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아우라는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초청한 사람이라 색안경을 쓰고 바라봤었는데, 그것마저 깨부술 만큼 대단한 아우라였다.

그뿐인가.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미모마저 귀족스러움의 극치를 자랑했다.

“하- 그런 사람이 피아니스트 같은 거나 하고 있다니.”

찰스는 안타까운 마음에 작은 탄식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빛을 반짝이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를 불렀다.

“당장 차 대기시켜! 바로 나갈 거야.”

이제 나이가 들어 걷는 것도 느릿한 사람이 오늘따라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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