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72화
내가 머물게 된 곳은 버킹엄 궁에 있는 귀빈 전용실이었다.
버킹엄 궁이 넓은 건 알고 있었지만, 도심 한 가운데에 이 정도로 화려한 펜트하우스가 숨겨져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개인 엘리베이터가 룸에 존재하고, 최첨단 보안 시스템과 수많은 경호원이 방을 지키고 있었다.
대형 거실에는 클래식함이 느껴지는 음향 시설과 널찍한 크기의 TV, 금빛으로 치장된 호화스러운 벽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또한 방과 거실에 이어지는 널찍한 대리석 복도에는 각종 예술 작품과 고가의 골동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거 구경한다고 까닥 잘못했다가는 영국에 큰 채무를 지겠는데요?”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라는 마음에 던진 농담이었다. 그러자 방 안내를 해주던 직원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진품입니다. 최소 수십 억에서 수백 억을 호가하는 것들입니다.”
“······.”
“부디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귀빈실에 왜 이딴 걸 놓는 거야.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하지만 보통 외교 정상들끼리 만나면 이런 저런 기싸움을 벌인다고 들었다.
이것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여기는 샤워실입니다. 샤워실 안에는 사우나실이 따로 준비되어 있고, 원하시는 브랜드의 샴푸나 화장품이 있다면 여기 버튼을 누르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내가 여러 펜트하우스를 다녀봤지만, 사우나실이 있는 펜트하우스는 처음 봤다.
샤워실에 사우나실이 있다니.
거기다 욕조 앞에는 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직원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복도를 지나 일반 아파트 크기 만한 부엌을 소개해 주었다.
“하고 싶으신 요리가 있다면 필요한 재료들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직접 해드실 수 있습니다. 물론, 직접 요리를 해드시기 보다는 저희 직원들에게 드시고 싶으신 걸 말씀하시면 곧장 준비해드릴 겁니다.”
“아, 네. 그럴게요. 그리고 제 가족 한 명이 여기로 온다고 했는데, 혹시 픽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이미 경호원들을 따로 보내 둔 상태입니다.”
국내 스케쥴 때문에 누나는 날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혼자 있게 되려나 싶었는데, 스케쥴이 끝나면 곧바로 날아온다고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한 달 이상이나 혼자 타지에 놔두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뭐, 이 정도로 호화스러운 펜트하우스에서 한 달 동안 지나면 딱히 누군가 필요할 거 같진 않았다.
“그럼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 직원들은 24시간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직원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가자마자 나는 길게 뻗은 소파에 몸을 던졌다.
고급스러운 가죽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하- 이게 돈의 힘인가.”
아직 난 멀었구나.
엄청나게 벌어서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 지상 낙원이라 할 만했다.
“장연욱!!”
그렇게 낙원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자연스레 눈이 스르르 잠기려 할 때였다.
제니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질러댔다.
여긴 초인종 같은 것도 없나?
아니. 경호원들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다는데 제니는 어떻게 여길 프리패스한 것일까.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직원들이 안 막아요?”
“응? 너랑 아주 각별하고 가까운 사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거 같던데? 오히려 웃으면서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도 해주더라.”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들어온 제니를 다시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와~ 여기도 좋다.”
“제니도 이런 펜트 하우스에 있어요?”
“응. 근데 여기가 더 좋은 거 같아. 크기도 더 넓고.”
제니는 여기 저기를 구경하다 샤워실에서 멈칫거렸다.
“오. 사우나까지?”
그러더니 야릇한 눈빛으로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따 샤워하고 같이 사우나 들어갈래?”
제니는 긴 금발 머리를 옆으로 풀어헤치며 본인의 매력을 뿜어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남성이라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외모였다.
그러나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요.”
“엑? 지, 진짜?”
“네. 전 혼자 들어가는 게 더 좋아요.”
차마 이따 도착하는 누나 때문에 안 된다고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래. 나도 이 정도로 안 넘어올 거라 생각했어.”
별로 실망한 기색도 아니었다.
제니는 유리잔 두 개와 샴페인 하나를 가져왔다.
“그럼 한 잔 할까?”
“저 아직 성인 안 됐는데요.”
“에이. 뭐 어때. 지금부터 조금씩 술 마시는 것도 배워야지. 연욱이 너 정도면 앞으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게 될 텐데. 그때 술 못하면 엄청 무시 받는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유교남인 모양이다.
제니가 건네는 술을 끝까지 받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콜라 하나를 꺼내 잔에 따랐다.
이제 겨우 두 잔 정도 마셨을 뿐인데, 제니는 벌써부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연욱아.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리고 항상 톤이 높이 올라가 있던 목소리도 왠지 낮아진 느낌이다.
“그러니까 이번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말이야. 영국 여왕한테 초대를 받았다는 건 영국 귀족들은 물론, 유럽에 있는 귀족들도 널 인정할 거야. 뭐, 이미 넌 대중에게 사랑받는 스타지만, 귀족들과 어울리는 것도 나쁜 건 아니지.”
“그런가요?”
“응. 귀족들이 후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우리한테 지원해 주는 자금이 엄청나. 유럽 귀족들은 돈이 엄청 많거든. 대부분 사업체 큰 거를 몇 개씩 갖고 있어서.”
나도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유럽 귀족들에게 스폰을 받게 되면 정말 사치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뭐, 알잖아요. 제가 콩쿠르도 하고 지휘도 했던 경험이 있긴 하지만, 딱히 이쪽에는 관심이 많지 않아요. 앞으로도 쭉 대중 가요를 작곡해서 활동할 예정이고요.”
“음~ 그렇구나. 그럼 옛날처럼 나도 앨범에 참여시켜 주는 거야?”
“제니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그 환상적인 바이올린 소리를 앨범에 담을 수 있다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호호. 진짜 넌 여자 마음을 참 잘 흔들어 놓는다니깐.”
제니는 샴페인을 한 잔 더 마신 뒤에 핸드폰을 꺼냈다.
“이거 내가 이번에 유럽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들이야. 한번 볼래? 영상도 있어.”
“아, 네.”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제니가 보여 주는 사진들을 구경했다.
근데 해변가나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은 제니의 모습이 전체 사진 중 절반 이상은 되는 듯보였다.
“이거 어때? 이 빨강색 비키니가 훨씬 더 예뻐 보이지 않아?”
“그, 그렇네요.”
“이거 검정색도 괜찮아 보이지? 내가 빨강이랑 검정색을 유독 좋아해. 그래서 오늘도 빨강색으로 입었어.”
“······별로 알려주지 않아도 될 TMI 같은데요.”
그때 제니가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핸드폰이 내 옆으로 떨어졌다.
“어머.”
제니는 그것을 주우려고 내 쪽으로 기울이다 아예 위로 몸을 눕혔다.
“저기 제니?”
“음~ 역시 위에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 원래 위에서 아래 있는 사람을 보면 보통 얼굴이 못생겨 보이거든.”
“이제 그만 내려와요.”
“진짜? 진짜 내려가?”
그렇게 제니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찰나.
“연욱아! 누나 왔다!”
최첨단 보안과 수십 명의 경호원이 지키고 있는 펜트하우스 문이 또 한 번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누나는 소파에 누워 있는 나와 제니,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을 발견하고는 들고 있던 가방을 툭 떨어뜨렸다.
누나의 짐을 대신 들어주던 직원들도 입을 가로막은 채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필이면 타이밍이 이상하게 맞아떨어진 듯했다.
“저기 누나. 이건 오해가······.”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제니가 먼저 소리쳤다.
“미안해. 혜나. 사실 나와 연욱이는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아니.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더 오해하겠네.”
“많이 오해하라고 해.”
누나는 넋을 잃고 나와 제니를 번갈아 쳐다보다 조용히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누나. 기다려 봐! 오해라니깐?”
내가 밖으로 나가는 누나를 얼른 쫓아가자 뒤에서 제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해 잘 풀어봐~. 물론 완전히 오해는 아니지만.”
팔짱을 끼고 있는 제니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미스터 장. 오늘 아주 피곤해 보이는군요. 괜찮습니까?”
마에스트로 이그니치는 내 얼굴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내가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
하기사. 어제 제니 때문에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된 누나를 풀어 주느라 밤을 다 샜다.
내가 왜 그걸 오해라고 열심히 설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누나는 어제 날 벌레 보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제니는 종종 찾아와 누나의 염장을 지르고 가는 등, 참 긴 하루를 보냈다.
그 여파가 오늘까지 온 듯하다.
“연습 스케쥴이 너무 빠듯했나 보군요. 시차 적응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연습은 다음으로 미룰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연습을 뒤로 미룰 순 없죠. 아무 피해 안 가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그니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같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있는 강당으로 갔다.
그곳에 모인 단원들은 날 보고 대충 고갯짓만 했다.
“오늘부터 연습을 같이하게 될 단원들입니다. 여기는 콘서트 마스터인 제라드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예.”
콘서트 마스터도 대답이 무미건조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를 썩 반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여러분 안녕~ 오랜만이에요.”
이윽고 제니도 연습을 위해 강당을 찾아왔다.
그러자 그들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와요, 제니.”
“기다렸어요.”
“어쩜 저번보다 더 예뻐진 거 같아.”
완전히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제니와는 예전에 공연을 같이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나를 차별하는 것일까.
내가 동양인이라서? 아니면 나이가 어려서?
“미스터 장.”
“네?”
“잠깐 이쪽으로.”
이그니치도 확실한 온도 차이를 느끼고 있었는지 잠깐 뒤로 데려갔다.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걸요?”
“여기 단원들은 미스터 장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런가요?”
“예. 난 미스터 장을 콩쿠르 우승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적 부분에서는 견해가 많이 갈릴 수밖에 없지요. 미스터 장이 기존의 클래식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해석대로 곡을 바꾼다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제서야 왜 저 단원들이 차가운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저들은 여왕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다.
당연히 자부심이 강할 테고 오리지널 클래식을 중요시할 게 뻔했다.
즉, 저 사람들은 정통을 따른다는 것이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저들은 미스터 장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 겁니다. 저런 사람들과 연습을 하는 것이 꽤 괴로울 수도 있어요. 포기하고 싶다면 지금 말씀하십시오. 제가 여왕께는 잘 말씀을 드릴 테니까요.”
협박을 하는 건가, 아니면 조언을 주는 건가.
이그니치의 자세가 애매했다.
하지만 포기한다라.
이그니치 말대로 저런 사람들이랑 연습을 하면 그 시간 내내 숨이 막힐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면서 난 한번 시작한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포기한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는 걸 저번 생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에스트로. 제가 얼마나 지독한 놈인지 한번 지켜보시죠.”
나는 한쪽 눈을 찡긋이며 먼저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그니치는 그런 나를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