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70화
“이게 꿈이냐 생시냐. 영국 여왕이 초대를 하다니. 더군다나 EU 회의에 맞춰서 부르는 걸 보면 그날 유럽 대통령들이 죄다 모일 거다.”
영국 여왕의 초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다.
“거기서 곡 선정은 자유롭다고 했는데, 가급적이면 협주곡을 하면 좋을 거 같다고 하더라.”
“혹시 지휘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이그니치. 너 콩쿠르 심사 봤던 사람.”
아, 이게 또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건가.
“혹시 마음에 안 드냐?”
“이그니치 그 사람이 제 우승을 반대했거든요. 워낙 보수적인 사람이라 콩쿠르 때 제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겁니다.”
“그럼 지휘자를 바꿔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이랑 같이 일하면 피곤할 텐데.”
이그니치 지휘자와의 협주곡이라.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일정은 언제부터라고요?”
“일단 영국에서 전세기를 하나 보내준다고 했어. 3일 뒤에 출발이야. 연습 기간은 2주일이고.”
2주일.
각 나라의 수장들에게 선보이는 공연치고 짧은 연습 시간이다.
“어떻게 할래?”
“당연히 가아죠. 버킹엄 궁전에서 공연했던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라는데.”
“흐흐. 맞아. 이거 또 언론에 퍼지면 한바탕 난리 나겠네.”
“그럼 얘기 잘 해주세요. 전 그만 일어날게요.”
“응? 어디 가게.”
“이왕 이렇게 온 거, PD들 만나서 점검이나 하려고요.”
“아아. 그래.”
콩쿠르를 하는 동안 기획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체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회사 내부를 살피는 일이다.
PD들이 어떻게 작업을 하고 있고, 또 어떤 가수를 키워내고 있는지 말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우승 축하드립니다!”
상층으로 올라가니, 연습생들이 나를 보자마자 허리를 꺾고 인사부터 올렸다.
단순히 연습생들뿐만이 아니었다.
새로 들어온 PD들도 내게 인사를 하기 바빴다.
“아, 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하실 필요 없어요.”
“아닙니다!”
마약 사건으로 인해 회사가 큰 타격을 입었지만, 다시 일어나게 되면서 예전보다 연습생들과 PD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기존에 있던 PD 중 절반이 물갈이되었고 더 많은 인력이 보충되었다.
나는 작업실을 돌아다니며 현재 PD들이 어떤 노래를 만들고 있는지 점검했다.
“저번에 주신 샘플곡으로 아이돌 노래를 제작하는 중입니다.”
“총 몇 곡이나 작곡하셨는데요?”
“일단 5곡을 완성했습니다.”
PD 다섯 명이 쭈뼛쭈뼛 내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편하게 해도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이들에게는 내가 너무 까마득한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그들이 만든 곡들을 하나씩 다 들어 보았다.
“음. 이 5곡을 만드는데 얼마나 걸리셨다고요?”
“3주 정도 걸렸습니다.”
3주 동안 5곡을 만드는데 내 귀에는 영 좋게 들리지 않았다.
현재 우리 기획사 PD들은 남자 아이돌 그룹을 위한 곡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걸그룹 레이스를 성공적으로 데뷔를 시켰으니, 남자 아이돌 그룹 데뷔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부담감 때문인지 노래가 이상하게 꼬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잘 알겠습니다.”
나는 그 팀을 떠나 이번에는 다른 팀의 작업실에 들어가 노래를 들어보았다.
여기도 5곡을 준비했는데, 처음 들었던 것보다는 조금 나았다.
“음, 30분 후에 PD들 전부 회의실로 모여 달라고 해주시겠어요?”
“아, 네.”
내 말을 들은 PD들의 안색이 굳어 버렸다.
오늘 쓴소리를 제대로 듣겠구나-라고 직감한 것이었다.
나는 30분 동안 각 팀이 작곡한 노래들을 들어보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몇 가지 선정해 보았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수정도 해놓았다.
이윽고 30분이 지나 회사에 있던 PD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총 25명의 PD.
강 대표는 아주 작정을 했는지 여기서 10명을 추가로 고용해 끊임없이 신인 가수들을 내놓으려 하고 있었다.
“연욱아. 너 돌아오고 나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네. 우승 축하해.”
이은지 디렉터도 자리에 참석했다.
여기서 최고참이고 가장 실력도 좋은 사람이었다.
“디렉터님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셨어요?”
“아니. 보이 그룹 작곡 일은 여기 PD들한테 맡기고 있었지. 나는 신인 그룹 말고 기존에 있는 가수들 신곡 작업하고 있었어.”
“그럼 여기 PD님들이 만든 곡은 들어보지 못하셨겠네요.”
“응. 제대로 신경을 못 썼어. 왜? 문제 되는 거라도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PD들이 만든 곡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리스트를 뽑아 나눠 주었다.
“총 5개의 팀, 거기에 완성된 곡이 서른 개입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좋은 걸 뽑으라고 하면 3개 밖에 없더군요.”
PD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 눈을 피했다.
“우리 기획사는 성과주의입니다. 제대로 된 곡을 내놓지 않으면 오래 자리를 지키실 수 없어요. 거기다 우린 다른 기획사들처럼 PD의 고혈을 빨아먹는 곳이 아닙니다. 좋은 곡을 내놓으면 그에 따른 인센티브는 확실하게 보장이 돼요.”
대형 기획사의 문제점은 신인 PD들을 데려다 놓고 노래만 만들게 한 다음 단물이 빠지면 내다 버린다는 점이다.
원래 PD의 강점은 노래를 작곡할 수 있고, 작곡한 노래로 저작권료를 받아 돈을 번다는 것에 있다.
즉, 곡 하나만 제대로 터트려도 많은 돈을 벌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형 기획사에서는 신인이라는 이유로 곡의 지분율을 거의 나눠주지 않고 작곡만 시켜댄다.
우린 그런 회사들과는 달리 지분율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고 있다.
그러나 성과가 시원찮으면 얄짤 없이 쳐내 버린다.
확실하게 보장이 되는 만큼, 패널티도 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기존에 있던 PD들 절반이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 주지 않아 회사를 나갔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결말을 맞이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쓴소리는 여기까지다.
“자, 그래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3일 뒤에 영국으로 가야 합니다.”
“응? 영국? 거긴 왜?”
이은지 디렉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소문이 여기까지 안 퍼진 모양이다.
“영국 여왕이 초대를 해서요.”
“뭐? 잠깐만. 영국 여왕이 널 초대했다고?”
“네. 버킹엄 궁에 와서 피아노 좀 쳐달래요.”
이은지 디렉터는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말했다.
“야. 그런 걸 그렇게 덤덤하게 말하면 어떡해? 누가 보면 밥 먹듯이 그런 곳에 가는 줄 알겠네. 진짜 대박이다. 상상도 못 했네.”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가면 한 달 정도는 묶여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아까 PD님들 모이는 동안 곡 작업을 조금 해봤어요.”
마음에 드는 곡 3개.
전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수정하면 괜찮아질 곡 7개를 내놓았다.
“제가 조금씩 다듬어 봤습니다. 물론, 음원 파일을 건든 게 아니라 여기 노트에 따로 적어뒀어요. 어디 부분을 다듬어야 하는지, 또 어떤 부분을 추가해야 하는지 등등요.”
PD들은 내가 준 노트를 살펴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방금 전에 하셨다고요? 30분 전에 부르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이은지 디렉터가 풉 웃으며 말했다.
“연욱이한테 그 정도는 껌이야. 30분 동안 그 많은 곡을 빠르게 다 들어보고 몇 가지 수정할 부분을 체크하는 거. 너희들은 하루 종일 걸리는 일이겠지만, 연욱이는 30분이면 충분해.”
PD들은 빼곡히 적혀 있는 노트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허탈한 탄성을 내질렀다.
“선배 PD님들이 장연욱 디렉터님의 일 처리 속도를 보면 어이가 없다고 종종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30분 만에 이렇게······.”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간단하게 정리한 것뿐입니다. 제가 콩쿠르 때문에 시기가 좀 늦춰지긴 했는데, 영국으로 넘어가서는 화상 통화를 하면서 작업 진행도를 계속 체크할 예정입니다.”
여러 일정이 겹치면서 예상보다 보이 그룹 데뷔가 늦어졌다.
이미 멤버들은 준비가 다 된 상태고, 이제 노래만 나오면 된다.
“제가 드린 피드백대로 한번 곡을 수정해 보세요. 영국으로 가기 전에 들어보고 다시 피드백 줄 것이 있으면 그때 드릴게요.”
“아, 넵!”
PD들은 내 노트를 가지고 후다닥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연욱아. 그런데 너랑 혜나 앨범은 어떻게 하려고?”
“그것도 준비해야죠. 영국 가서도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요.”
“그게 쉬울까? 거긴 작업실도 없잖아.”
“한번 노력해 봐야죠.”
원래는 진득하게 나와 누나의 차기 앨범을 준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영국 여왕의 초대가 겹치면서 사실상 앨범 작업은 영국으로 넘어가서 조금씩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영국 여왕 정도 되면 그 나라에 있는 음악 작업실 한 개쯤은 통으로 빌려줄 수 있지 않을까?
* * *
영국 런던은 우중충한 날씨가 대표적이다.
비가 자주 오고 날씨는 매번 어둑어둑해서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다. 과연 그 말대로 런던의 날씨는 구름이 가뜩 낀 흐린 날씨였다.
“앞으로 24시간 동안 저희 경호원들이 모실 겁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가보고 싶으신 곳이 있다면 그것 역시 저희한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영국에서 지원해 준 전세기를 타고 정말 편안하게 런던 시티 공항에 도착을 했다.
내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탔을 때부터 함께 한 경호원들 숫자가 공항에서는 그 배로 늘어났다.
“여왕께서 국빈으로 모신 만큼, 경호 인력을 아끼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래도 이건 경호원들 숫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수십 명의 어깨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으니,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긴. 여왕이 초대를 한 사람이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그것만큼 국가적 웃음거리도 아마 없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VIP들만 이용할 수 있는 출입국을 지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많은 경호원을 보면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대한 속도를 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요! 난 연욱이랑 아는 사이라니깐요!”
“부인. 다가오시면 안 됩니다.”
“부, 부인? 지금 부인이라고 했어요? 내가 어딜 봐서 부인이라는 거야. 그리고 당신, 나 몰라요?”
“부인.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물러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제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저 뒤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듯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아 진짜 여기까지 내가 어떻게 왔는데. 연욱! 나 좀 봐봐!!”
“제니?”
“그래! 나야 나!!”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제니 웨이든이 웬일인지 공연용 드레스를 입은 채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