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68화
가슴 떨리고 꿈꿔 왔던 순간.
손지연에게는 쇼팽 콩쿠르의 결승 무대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든 건, 혼자서 콩쿠르에 참여한 것이 아닌 장연욱과 함께 했다는 것이 더 의미가 컸다.
‘진짜 완벽한 무대였어.’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무대는 아마 없을 것 같았다.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와 환호성.
심사위원들도 흡족한 얼굴이었다.
앞의 무대가 어땠는지 손지연은 유심히 지켜봐서 알고 있다.
모두 다 훌륭한 연주자지만, 오늘 그녀의 무대만큼 강한 임팩트를 보여 주진 못했다.
즉, 오늘 우승자는 잘하면······.
‘아니야. 아직 연욱이 무대가 남았잖아.’
본선 1차부터 역대급 무대를 보여주며 이번 쇼팽 콩쿠르의 대흥행을 이끈 주인공이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장연욱의 연주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또 어떤 충격을 안겨 줄까-기대하면서 말이다.
손지연도 내심 기대가 컸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무대에 나와 연주를 한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 우승을 놓고 경쟁하는 대회다.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경쟁자로서 연욱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대가 끝난 뒤 지연은 눈에 힘을 강하게 주며 연욱이 무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멋있다······.’
경쟁자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결심한 것도 잠시.
위아래 뭐 하나 흠잡을 곳 없이 타이트한 연욱의 양복 차림을 보고 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정신을 놓아버렸다.
여기 와서 실컷 보는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언제 봐도 늘 새로웠다.
청중에게 보이는 저 미소, 저 몸짓.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아니야. 정신 차리자.’
지연은 두 뺨을 제 손으로 때리며 연욱이 흘리는 마성의 매력에서 빠져나오고자 애썼다.
그렇게 시작된 연주.
“응?”
초반 부분부터 뭔가 이상했다.
착각인가 싶었으나, 점점 연주가 길어질수록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확신했다.
“이, 이래도 되는 건가?”
이번 결승 무대에서는 또 어떤 걸 보여주려나 기대했는데, 설마 협주곡 2번의 악보를 건들 줄이야.
청중석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게 보였고, 심사위원들도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왜······.”
좋게 들리는 것일까?
신기한 일이었다.
협주곡 2번을 자기 마음대로 바꾼 건데도 원곡보다 훨씬 더 좋게 들렸고, 이게 진정한 협주곡 2번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
지연은 완전히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연욱을 보며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이 바로 장연욱이다.
오늘 그를 좋아하는 남자가 아닌, 경쟁자라고 인식하며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차라리 좋아하는 남자가 나았다.
경쟁자로 보고 있자니 지연에게는 너무나도 큰 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와아아-!!”
“브라보!!”
이윽고 쇼팽 콩쿠르의 쿠데타나 다름없는 협주곡 2번이 마무리됐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고, 엉덩이가 무겁다는 엘리자베스 여왕도 기꺼이 일어나서 찬사를 보냈다.
최종 심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연은 깨달았다.
그녀의 연주 실력은 연욱에게 닿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보통 벽을 마주하게 되면 공허함과 좌절감이 들기 마련.
하지만 지연은 오히려 더 힘이 났다.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벽이 보였으니, 그걸 반드시 뛰어넘겠다는 열정이 뜨겁게 타오른 것이었다.
* * *
[전에도, 후에도 없을 희대의 우승자.]
[쇼팽의 환생. 희대의 반항아. 마침내 정점에 서다.]
[쇼팽 콩쿠르의 새로운 역사!]
세계 언론에 나온 헤드라인이었다.
최종 우승자가 발표된 뒤 해외 언론에서는 1초 단위로 기사들이 쏟아졌고, 온통 내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다.
한국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장연욱 쇼팽 콩쿠르 우승!]
[역대 최고의 찬사! 장연욱 최고 점수로 우승!]
[쇼팽 콩쿠르에 두 번 다시 없을 역사!]
믿을 수 없는 업적,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쾌거라는 기사들이 즐비했고, 네티즌들도 오늘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군대 면제를 축하한다는 얘기가 가장 많았다.
“전 장연욱 참가자······. 아니. 이제는 우승자라고 해야겠군요. 전 당신이 우승자가 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이틀 전 심사 발표가 되고 오늘은 시상식 및 우승자의 앙코르 공연이 있는 날이다.
총 1등부터 5위까지 상을 주는 쇼팽 콩쿠르다.
최종 상을 받은 다섯 명의 사람들이 앙코르 공연을 하게 되는데, 사실상 1등을 위한 무대라 볼 수 있었다.
2등부터 5등까지는 1곡씩 짧게 연주하고 1등은 여러 개의 곡을 연주해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다.
“마에스트로께서 도움을 주신 덕분입니다.”
레너드 지휘자는 날 무척이나 좋아했다.
들은 얘기에 의하면 날 보려고 한국까지 와서 심사를 봤을 정도다.
사실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습 때도 레너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런 무대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하. 제가 한 거라고는 우승자의 말을 귀담아들었을 뿐입니다.”
“편하게 연욱이라고 불러 주세요. 마에스트로. 제가 평소 존경하던 분과는 편하게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허-.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면야······.”
레너드는 헛기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럼 편하게 말하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격식이 사라지니 꼭 동네 알고 지내는 아저씨처럼 변한 레너드였다.
그는 내 등을 팡팡 때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 어떤 참가자가 감히 협주곡 악보를 건들 생각을 하겠어? 심사위원들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걸 봤지? 내 평생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조금 위험하긴 했습니다. 심사위원 중에서 제 우승을 반대한 사람도 있다던데요.”
무대 뒤에서도 들릴 정도로 심사위원들이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다.
그때 만약 점수가 심하게 갈렸다면 난 우승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희대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어떤 단체라도 보수와 진보가 있기 마련이거든. 특히 쇼팽 콩쿠르를 광적으로 신성시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 사람들 눈에는 네 도전이 무척이나 불편하게 보였을 거야. 이건 마치 성경을 네 마음대로 바꿔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쇼팽을 신성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도 같았다.
“이번 일로 마에스트로께 불이익이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뭐, 어떤 대가라도 난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런데 과연 이게 불이익이 될까? 사람들의 반응을 봐. 다들 좋아 죽으려 하잖아. 쇼팽 콩쿠르에 이단아가 우승했다고 말이야. 사람들은 정해진 길로 가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을 좋아하지. 스토리도 재밌고.”
모두가 날 좋아할 순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많은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것이다.
첫 무대에서부터 지금껏 없는 새로운 무대를 보여줌으로써 이미 청중은 나의 편이 되었다.
보수적인 평론가들이 어떤 비난의 목소리를 내도 괜찮다. 욕먹을 각오로 나온 무대였고, 결국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으니까.
“자. 이제 나가 볼까? 시상식을 거하게 해야지.”
“예.”
나는 사회자의 신호에 따라 무대로 나갔다.
오늘 앙코르 공연도 티켓팅이 시작되자마자 매진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내 연주에 특별히 감명을 받았다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늘 또 공연에 참석하기까지 했다.
심사위원들은 내 목에 메달을 걸어 주고 트로피를 건네주며 내가 이 대회에 우승자임을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그때 나와 악수를 하던 이그니치가 말했다.
“미스터 장.”
“예?”
“난 개인적으로 당신을 우승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심사는 공정했으니, 내 개인적인 생각은 중요하지 않죠. 우승을 축하합니다.”
이그니치는 과거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고 지금은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활약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마에스트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무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번 기대해 보죠.”
줄곧 굳은 표정을 보였던 그가 마지막에는 미소를 지었다.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 여러 연주자의 연주가 끝난 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다들 내가 어떤 곡을 연주할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관례대로라면 콩쿠르에서 했던 걸 연주해야 하지만, 난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었다.
첫 곡의 시작은 콩쿠르에서 잘 연주하지 않았던 쇼팽의 녹턴.
어떤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장연욱이 콩쿠르에서 볼 수 없는 곡으로 청중을 놀랍게 했던 건 고마우나, 한번은 그가 정통적인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걸 보고 싶다고 말이다.
나는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되기 무섭게 사람들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 * *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어.”
지연이는 주먹을 꽉 쥐면서 내 앞에 빙빙 휘둘러댔다.
“그래. 근데 이걸 어쩌나. 난 이제 콩쿠르 나갈 생각이 전혀 없는데. 다음에 나가면 넌 절대 못 이길 거 같거든.”
“거짓말. 오히려 내가 할 소리거든?”
진심이었다.
결승 무대에서 보여 준 지연이의 무대는 완벽했다.
연주 실력으로만 놓고 보자면 지연이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의외성이라는 변수로 내가 우승을 했을 뿐, 순수한 연주 실력은 지연이를 따라갈 수 없다. 더 무서운 건 지연이의 실력이 여기서 더 늘어날 거라는 것이다.
“이제 한국 가면 뭐 하려고?”
“누나랑 새로 앨범 내려고. 내가 콩쿠르 우승하면서 인지도가 더 많이 쌓였거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지금 대한민국 사회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다.
앨범을 내기 딱 좋은 시기라는 것이다.
“하여튼 음악밖에 몰라요.”
“젊었을 때 열심히 벌어야지.”
잠깐 지연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 뒤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욱아. 이제 들어가야 돼.”
“아, 응.”
나는 캐리어를 끌고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지연이는 아쉬운 듯 내 손을 붙잡았다.
“조심해서 가.”
“응. 너도 얼른 한국으로 들어와.”
“안 돼. 다음 콩쿠르 준비하려면 당분간 더 외국에 있어야 돼.”
그리고 점점 저 동그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고 있었다.
“울지 마. 이번에는 내가 놀러 갈게.”
“정말?”
“응. 네가 어디 있든 꼭 갈게.”
그제서야 지연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눈물 몇 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잘 가. 도착하면 연락하고.”
“그래. 너도 건강하게 있어.”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지연이가 갑자기 와락 내 품에 안겼다.
“지연아?”
“응, 이제 됐어. 조심해서 가.”
그리고 혼자 많이 부끄러웠는지 지연이는 저 뒤로 뛰어가 버렸다.
이거 참 난감한 일이구만.
그래도 내심 기분은 좋았다.
“응?”
문제는 뒤를 돌아보니 누나가 뒷목을 잡고 날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