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64화
재밌는 일이었다.
보통 참가자들은 연습 시간에 쫓겨 조금이라도 더 합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주를 한다. 하지만 장연욱은 아주 태연하게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으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단원들은 지휘자가 아직 연주를 중단시키고 있지 않으니 그 리드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게 피아노의 개입이 없는 오케스트라만의 연주가 5분 정도 이어졌을까.
따라란-!
갑자기 연욱의 피아노가 정확한 타이밍에 훅 치고 들어왔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지휘자가 가장 중요하다.
언제 어느 파트가 들어와야 하는지 조율을 해야 하며 연주자들도 지휘자의 몸짓과 표정을 보고 연주를 시작한다. 그래야 오케스트라의 합이 깨지지 않고 올바른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협주곡일수록 연주자는 정확한 박자와 들어가는 타이밍을 알아차리기 힘들기 때문에 지휘자의 신호는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장연욱은 별도의 신호 없이 본인 스스로가 뛰어 들었다.
이러면 음색이 불안해지고 전체적인 밸런스가 깨지기 마련인데, 놀랍게도 아주 자연스럽게 음악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연욱이 혼자 연주를 하는 건 아니었다.
처음 치고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이후부터 지휘자와 아이 컨택을 하면서 연주가 끊이지 않게 했다.
그렇게 한창 고조된 분위기 속에 점점 흐름을 타고 있을 때였다.
쾅-!
강당 문이 갑자기 거칠게 열리면서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당연히 잘 이어지던 연주는 중단됐다.
“무,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말했다.
“마에스트로. 연습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바르샤바 그랜드홀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신고가 들어와 현재 검문 중에 있습니다.”
“폭탄?”
레너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장난 전화입니까?”
종종 있는 일이다.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폭탄을 설치했다고 장난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언론에 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매번 콩쿠르를 진행할 때마다 그런 전화들이 빗발쳤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이번 건은 조금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아 일단 그랜드홀을 잠시 봉쇄하고 철저히 조사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얼른 대피해야겠군요.”
“예. 안전한 대피를 위해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정부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죠.”
레너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 차에 찬물을 확 끼얹다니.
“모두 들었죠? 빠르게 대피를 해야 하니 모두 악기를 정리해서 내려 갑시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레너드가 경관에게 물었다.
“경관님. 혹시 수색이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정확히 단정 지을 수 없지만, 그랜드홀이 워낙 넓다보니 최소 3시간 이상은 걸릴 겁니다.”
“허. 그렇게 되면······.”
레너드는 미안한 얼굴로 연욱을 바라보았다.
“장연욱 참가자는 더 이상 연습을 할 수 없다는 거군요.”
“조금 일정을 미뤄서 연습 시간을 주면 되지 않습니까?”
“콩쿠르의 룰은 명확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정을 늦추는 법이 없죠.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도 딱히 배려를 해주지 않습니다. 이것도 심사의 일부니까요.”
“아······ 그럼 저희가 최대한 빠르게 수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경관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욱은 태연했다.
혹시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일까?
영어로 대화를 해서 충분히 알아 들을 법도 한데 말이다.
레너드는 확실히 매듭을 짓기 위해 연욱에게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보시다시피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최소 3시간 이상은 걸린다는군요. 그 말은 더 이상 장연욱 참가자는 연습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 방금 나누시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생각보다 놀라는 눈치가 아니군요.”
“폭탄 이야기는 놀라긴 했지만, 연습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예?”
레너드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연습은 이걸로 충분하다고요?”
“예. 그래도 혼자 연습해야 하니, 일단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마에스트로.”
레너드는 먼저 자리를 떠나는 연욱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연습에서 1악장도 넘어가지 못했는데 대체 무얼 연습했다는 거지?
당최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 * *
폭탄물 이슈로 인해 한바탕 그랜드홀이 난리가 났지만, 예상보다 사태는 빠르게 진정됐다.
장난 전화를 건 상대가 붙잡히면서 폭탄 설치는 거짓이었다는 게 탄로 난 것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점검을 위해 5시간 동안 그랜드홀이 폐쇄되어 몇몇 참가자들은 아예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참가자들은 항의를 해보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이것 역시 심사의 일부라며 그들을 위해 일정을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어땠습니까? 연습은 잘 끝났습니까?”
“예. 다들 열심히 하더군요.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폭발물 설치 소동 때문에 참가자들 세 명이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운의 요소도 심사의 일부분 아니겠습니까? 신께서 그 세 명을 떨어뜨리고자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 수도 있겠군요.”
“뭐······ 그거야 본선 무대에서 알게 될 일이죠.”
본선 2차 무대가 열렸다.
여러 솔로곡으로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 참가자들이 오늘은 협주곡을 통해 다시 한번 본인의 기량을 뽐낼 예정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어제의 사태는 안타까운 일이나 일정을 늦출 수는 없기에 곧바로 2차 무대를 강행했다.
레너드는 이 상황이 찝찝했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연욱이 태연한 눈으로 연습은 충분하다며 돌아가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그 짧은 시간에 대체 연욱은 어떻게 연습이 충분했던 것일까.
너무나도 궁금해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제 폭발물 이슈 때문에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참가자들이 있다던데.”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그런 불상사도 결국 심사의 기준이라고 하지 않나?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순 없는 일이지.”
“장연욱도 연습을 못 했다던데?”
“그건 더 안타까운 일이네. 그럼 사실상 이번 2차 무대에서 장연욱의 활약을 보는 건 어렵게 됐네.”
청중들도 그랜드홀에서 있었던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기대하는 참가자는 바로 장연욱이다.
1차와 2차 무대에서 전부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2차 협주곡 무대에서는 그 활약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가뜩이나 2차 협주곡 무대는 2시간밖에 연습 시간이 없어 가장 어려운 무대로 손꼽히는데, 장연욱은 거의 연습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음. 결국 반짝이다 이렇게 사그라지는 건가?”
“아쉽네. 정말 쇼팽의 환생을 이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건가 싶었는데.”
“진짜 쇼팽이 아니고서야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지 않고 무대를 소화할 순 없지.”
“쇼팽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이건 힘들지 않을까?”
심사위원들은 청중들의 동요를 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은 장연욱이 오늘 완벽한 협주곡 무대를 보여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중이다. 사실 심사위원들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기대가 컸던 참가자였기 때문이다.
“그럼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첫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장연욱이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장연욱이 무대에 나오자 청중들은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지휘자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쉽다. 아쉬워. 그 죽일 놈의 장난 전화만 아니었어도······.’
레너드는 아쉬운 마음을 덜어내지 못한 채 지휘봉을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
잠깐 연욱과 눈을 마주친 레너드는 그의 눈동자에서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냥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레너드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왜인지 아쉬웠던 마음이 훨훨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아는 것은 있었다.
오늘 연주가 보통 때와는 많이 다를 것임을.
따라란-!
이윽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먼저 시작됐다.
레너드는 지휘를 하면서 슬쩍 연욱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다.
침착한 건가, 아니면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는 건가.
저번 연습 때처럼 피아노를 안 치고 멍하니 음악만 듣고 있으면 안 될 텐데?
그런 걱정도 잠시.
자신이 피아노를 연주해야 하는 타이밍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연욱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레너드가 신호를 주자 연욱은 화려하게 건반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다.’
하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보통 피아노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파트가 각각 나뉘기 때문에 거의 피아노 솔로가 많다. 하지만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오케스트라와 같이 협주하는 부분이 있어 무엇보다 호흡이 중요했다.
빠른 리듬이기에 자칫 타이밍이 엇갈리면 그것만큼 듣기 싫은 음색이 없기 때문이다.
레너드는 그래서 걱정이 됐다.
타이밍을 맞추려면 지휘자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절대적으로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많이 해줘야 한다. 그래야 박자가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
그런데 어느 정도 솔로 연주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던 연욱이 레너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지휘자와 사인을 맞추기 위해 피아니스트는 자주 지휘자와 아이 컨택을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지금은 마치 연욱이 피아노로 오케스트라 전체를 주무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눈빛은 사인을 맞추기 위함이 아니다.
음악적으로 서로 동화되어 단순히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아닌 그것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었다.
레너드는 홀린 듯이 지휘봉을 휘둘렀다.
따란-! 따라란-!
레너드의 신들린 지휘와 그에 따른 연욱의 빠른 건반 터치.
음악이란 건 참 신기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만드는 열기가 단숨에 단원들 마음에도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건 음악을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은 빠른 리듬과 피아니스트의 양손 기교, 거기에 더해지는 바이올린의 음색이 특징이다.
그래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적절한 조화가 항상 중요시됐다. 누가 먼저 튀기라도 하면 곡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바이올린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청중들 귀에는 피아노 소리만 들려왔다.
이러면 곡의 밸런스가 무너졌다고 봐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들어 알고 있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부정당하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진정한 피아노 협주곡인 것은 아닐까.
심사위원들은 심사를 하는 것을 잊게 되었고, 청중들 역시 평가를 그만 두고 그저 눈을 감은 채 두 거장이 만들어내는 협주곡을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