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162화 (162/200)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62화

이어지는 쇼팽 즉흥곡 3번.

저번 1차 무대에서 보여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연욱은 쇼팽 즉흥곡만 3곡을 준비했다. 참으로 과감하기 짝이 없는 무대였는데,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도 곡의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법 같은 무대로군.’

이그니치의 생각대로 이건 마법이었다.

만약 다른 참가자가 즉흥곡을 3개나 준비했다면 두 번째 곡에서 연주 중단을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장연욱의 무대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란-!

첫 번째가 사랑의 충만함, 두 번째가 혼돈과 흔들림이었다면 세 번째 곡은 마치 이별과 슬픔을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분명 세 번째 곡은 첫 번째 곡과 마찬가지로 조금 신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신나는 리듬이 마치 슬픈 눈물을 흘리며 추는 춤 같았다.

억지로 슬픔을 경쾌한 멜로디로 가리고 있지만, 그 안에 잠긴 슬픈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연주가 진행될수록 공허감과 우울감이 극대화되면서 마음 한켠이 찡하게 아려왔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무심코 떠올리게 만드는 감정적인 곡이었다.

“설마 그런 거였나.”

음악이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 이그니치는 비로소 깨달았다.

원래 2차 본선 무대에서 한 사람당 3개의 곡을 연주하게 되어 있다. 물론, 딱 1개만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가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 또한 규칙상 심사위원들이 전원 동의하면 4곡을 연주할 수도 있는 것이 본선 2차 무대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 어떤 참가자도 4곡 이상을 연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장연욱이 보여 주는 무대는 은밀하게 심사위원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3곡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이건 반드시 4곡으로 완성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

“끝났나?”

어느새 세 번째 곡이 끝났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적으로 음악에 너무 빠져 있어 곡이 끝났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해서인지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세 곡을 다 연주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 장연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무대에 있는 청중들과 심사위원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난 너희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저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장연욱 참가자가 네 번째 곡을 준비했을 것 같습니다.”

이그니치만 느낀 것이 아니다.

쇼팽 즉흥곡이라고 하면 보통 그가 마지막에 작곡한 즉흥곡 4번을 대표적으로 거론한다.

쇼팽이 너무나도 아낀 곡이라 세상에 공개하지도 않았다는 즉흥곡 4번.

쇼팽 사후에 유작으로 남겨진 즉흥곡 4번은 그가 만든 최고의 즉흥곡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연욱은 끝까지 즉흥곡 4번을 연주하지 않고 1번부터 차례대로 3번까지 연주하면서 그 안에 본인만의 해석으로 만든 스토리를 담았다.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갈등. 그 이후에 이어진 이별. 장연욱 참가자가 말하고자 하는 즉흥곡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군요.”

“역시 우리 모두 같은 걸 듣고 있었네요.”

“서로 의견이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필시 청중들도 같은 걸 듣고 있었을 겁니다.”

청중 중 저명한 음악가들도 섞여 있다 보니, 평균적으로 음악을 듣는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그들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이 스토리를 끝맺으려면 네 번째 곡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쇼팽 콩쿠르 역사상 참가자가 4곡 이상을 한번에 연주한 적이 없어서 심사위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이 서로 토론하며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네 번째 곡을 연주하게 해라!!”

“우리는 더 듣고 싶다!”

“심사위원들은 뭘 하고 있나! 아직 곡이 끝나지 않았다!”

“더 연주하게 해라!”

청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내자 다른 사람들도 하 둘 목청을 높이며 심사위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청중들 모두 발을 쿵쿵대며 그들의 의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연주하게 해라!!”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하지만, 무대를 즐기는 건 결국 청중이다.

이그니치는 등에 떠밀리듯이 마이크를 들었다.

“장연욱 참가자에게 묻겠습니다. 네 번째 곡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장연욱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번째 곡을 연주해 주십시오.”

이그니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중들이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연욱은 그 박수 소리가 잦아들 때쯤 손을 건반에 가져다 댔다.

따라라-!

첫 번째 곡부터 시작된 사랑 이야기가 이제 네 번째 곡으로 마무리되려 하고 있었다.

쇼팽의 유작, 환상 즉흥곡.

말 그대로 환상처럼 곡이 몽환적이며 감정을 고양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특이하게 장연욱의 연주에서는 세 번째 곡에서 이별로 인해 슬픔에 빠진 한 남자가 다시 연인과 재회하면서 화해하게 되는 장면이 저절로 그려졌다.

쇼팽도 헤어졌던 연인과 다시 만나 극적인 화해를 하면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분명 그런 쇼팽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 옳지만, 이 곡은 왠지 다르게 들렸다.

말 그대로 환상.

이별한 연인과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움에 오직 상상 속에서만 그 환상을 이뤄낸 느낌이랄까.

이제껏 들어왔던 환상 즉흥곡과는 무언가 달랐다.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화해와 기쁨.

그 이질적인 느낌과 감정은 과연 환상이었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라도 그 감정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의 필사적인 마음이 함께 전해지면서 안타까움과 공허함이 감돌았다.

“아-.”

이그니치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완전히 연주에 빠져 있는 장연욱을 바라보았다.

저 어린 동양인에게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을까.

그동안 수십 년을 쇼팽의 음악 연구에 몰입해왔던 스스로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왜 자신은 이걸 보지 못했을까.

어쩌면 쇼팽이 이 곡을 죽는 순간까지도 공개하지 않았던 건 그저 본인만의 환상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환상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 똑같이 공허함과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끼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마침내 곡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그니치는 보았다.

쇼팽의 환생을.

* * *

본선 2차 무대가 끝난 뒤, 뜨거운 박수와 함께 장연욱은 무대를 떠났다.

그가 남기고 간 것은 격동하는 감정과 알 수 없는 공허함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것이 전부 환상처럼 느껴지는 무언가라고 해야 할까.

첫 번째부터 마지막 네 번째 곡까지 뭐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심사해야 할지······.”

“심사하면서 이렇게 에너지가 빨려 들어간 건 처음입니다. 도저히 심사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군요.”

심사위원들은 벌써 녹초가 된 얼굴이었다.

장연욱의 무대를 보기 전까지는 활기가 돌던 사람들이 말이다.

“최고의 음악을 듣고 나면 기운이 다 빠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오늘에서야 깨닫는군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게 정말 쇼팽의 즉흥곡이란 말입니까? 이제까지 저런 즉흥곡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건 아마 청중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그니치도 심사위원들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일부러 청중들이 나가는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들 얼굴에는 장연욱이 건 환상의 마법이 남아 있었다.

“18살. 그런데 벌써 현실과 환상을 망각할 정도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라······.”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굉장한 실력이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그 곡에 담긴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의 해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감정을 전달하는 음악가는 이그니치도 보지 못했다.

“이거······ 오늘 2차 무대는 녹화가 다 됐겠죠?”

“예. 아마 내일이나 모레에 뉴튜브에 올라갈 겁니다.”

“하-. 기다리기 힘들군요. 집에 가서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오랜만에 쇼팽 즉흥곡을 다시금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쇼팽 즉흥곡의 해석이 이번 일로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쇼팽의 음악을 파고들었다.

다양한 해석이 나왔고, 지금은 그 해석이 하나로 정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장연욱이 보여 준 무대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즉흥곡은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쓰이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처지가 매우 곤란하게 됐군요.”

“네?”

이그니치의 말에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처지가 곤란할게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 청중들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그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음악가들도 있고 유명한 평론가들도 다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오늘 장연욱 참가자가 들려준 음악을 듣고 넋이 나간 얼굴로 그랜드홀을 나갔어요.”

“아······ 설마 언론을 걱정하시는 건가요?”

“예. 그들은 지금쯤 아마 기자들에게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을 겁니다. 새로운 즉흥곡의 해석. 그리고 사상 최초로 네 번째 곡을 연주한 참가자.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그니치는 잠깐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었다.

“쇼팽의 환생.”

“······.”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이그니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한 건 청중들 뿐만이 아닌 것 같군요.”

“그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여지껏 본 참가자들과 쇼팽 콩쿠르 우승자 중 저 정도로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연주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예. 정말 쇼팽이 살아 돌아오지 않으면 보여 줄 수가 없는 새로운 해석이었어요.”

심사위원들은 그 이상 평가내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각자 정리하고 강당 밖으로 나가 보았다.

이미 여러 평론가를 인터뷰한 기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왔다.

“평론가들의 극찬이 엄청납니다.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장연욱 참가자의 음악이 그토록 대단했나요?”

“그에 대한 코멘트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공정성을 지켜야 하니까요. 누군가를 지지하는 발언은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터뷰를 하고 있던 이그니치가 자신에게 카메라를 집중시키고 있는 기자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이틀 뒤에 녹화본이 공개될 겁니다. 그때 직접 확인을 하시면 됩니다. 이거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녹화본이 공개되면 음악계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요.”

“예? 음악계가 흔들린다고요?”

“그동안 우리가 지켜왔던 전통, 그리고 해석에 대한 고착. 그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계기가 될 겁니다. 그것이 좋은 영향을 끼칠지,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가려는 이그니치의 뒤에 대고 한 기자가 소리쳤다.

“쇼팽의 환생이라는 평론가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러자 이그니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잠깐 뒤를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겼다.

쇼팽은 환생을 한 것이 아니다.

쇼팽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인 음악의 거장이 21세기에 나타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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