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59화
여느 콩쿠르와는 다르게 참가자는 본선 1차에서 피아노로 3곡 이상 연주해야만 한다.
왈츠, 에뛰드, 녹턴, 판타지 등등.
다양한 쇼팽의 피아노곡들이 있는 만큼, 그중에서 폭넓게 선택해 심사위원들에게 들려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심사위원의 재량.
만일 피아노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심사위원은 중간에 참가자의 연주를 중단시킬 권한이 있다.
그건 곧 본선 탈락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참가자들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은 채 연주를 완성해만 한다.
“첫 연주곡은 강아지 왈츠입니다.”
첫 번째 연주곡은 쇼팽의 왈츠였다.
약 1분 30초 정도의 연주 시간을 갖는 쇼팽의 왈츠 제6번, 강아지 왈츠.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쇼팽은 본국을 떠나 해외로 나가 본격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을 넘기란 쉽지 않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점점 식어 들었을 때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곡을 만들게 되었다.
쇼팽의 왈츠 중에서는 가장 인기가 많다는 강아지 왈츠.
양손이 춤을 추듯 건반을 휘저어 놓아 정말 강아지가 눈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신나는 리듬과 유명세에 피아니스트들은 너도나도 음반을 만들 때 반드시 이 곡을 추가한다.
“강아지 왈츠?”
하지만 쇼팽 콩쿠르에서 강아지 왈츠가 나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일단 곡의 길이가 짧고 여러모로 본선에서 칠 만한 곡은 아니라고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보통 1차에서는 다른 왈츠곡을 치거나 녹턴, 혹은 에뛰드로 시작을 한다.
“본선에서 듣는 건 오랜만······ 아니. 처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강아지 왈츠라니. 이걸 도전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생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심사위원들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본선 1차에 모인 관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랜드홀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그들 중 유일하게 진지한 표정을 한 건 이그니치 뿐이었다.
따라란-!
이윽고 왈츠가 시작되었다.
이 곡의 첫 시작은 오른손이다.
첫 마디에서 오른손으로 어떻게 재주를 부리느냐에 따라 강아지 왈츠의 질이 달라진다.
“음~.”
“오-.”
심사위원들의 짧은 감탄사에 이어 왼손의 마법이 시작되었다.
강아지 왈츠에서 왼손은 마법을 부리는 손이라 불리곤 한다.
오른손이 만들어 내는 강아지의 과한 행동력을 왼손이 베이스로 붙잡아 주기 때문이다. 만약 강아지 왈츠가 오른손만의 음색과 리듬으로 이루어졌다면 쇼팽 최고의 왈츠라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왼손이 적절한 균형과 여운을 남겨 주기 때문에 강아지 왈츠의 진가가 살아난다고 볼 수 있었다.
“어······.”
“벌써 끝?”
1분 30초의 짧은 곡.
워낙 빠른 리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들인 강아지 왈츠라고 부르기보다, 순간의 왈츠라고 부른다.
짝짝짝-!
곡 하나가 끝이 나면서 관중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심사위원들도 짧게 박수를 쳐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요 근래 들어본 강아지 왈츠 중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저도 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선 1차에서 강아지 왈츠라니. 이거 참.”
“이 대회를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원래 같으면 감점을 줘야 하겠지만······.”
그들은 슬쩍 이그니치를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연욱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통 긴장감 때문에 곡 하나를 연주하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스태프들이 상시 체크를 해주고 수건으로 땀을 닦게 한다.
그런데 지금 장연욱은 긴장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연습실에서 혼자 연습곡을 친 것마냥 평온해 보였다.
항상 참가자들을 보면 뭔가에 쫓기는 듯, 아슬아슬한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장연욱은 베테랑 연주자처럼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저 장연욱이란 참가자가 한국에서는 유명한 연주자라고 했던가요?”
“아, 가수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ost를 작곡해서 빌보드 순위에 오르기까지 했다고 들었고요.”
“그럼 큰 무대에 나름 경험이 있겠군요.”
“들리는 말에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본 경험도 있다고 합니다.”
역시.
그래서 저렇게 안정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건가.
여기 참가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무대 연주를 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무대 공포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연욱은 이미 충분한 경험을 거쳐서 그런지 그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다음 곡을 들어보죠. 그때 평가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네.”
심사위원들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연욱은 다음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심사위원들이 탈락 신호를 보냈다면 첫 곡만 치고 무대에서 내려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곡은 쇼팽 왈츠 1번, 화려한 대왈츠입니다.”
“!?”
또 다시 관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사위원들도 설마 두 번째 곡도 왈츠를 연주할 줄은 몰랐던 터라 얼굴에서 당황함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런 그들의 어수선함을 아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을 하는 건지 연욱은 곧바로 연주에 돌입했다.
따라라란-!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화려한 대왈츠.
무도회에서 쓰이기 딱 좋은 왈츠곡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강아지 왈츠는 가벼운 빠르기라면, 이 곡은 풍성한 음색이 가득하면서 동시에 리듬이 빨라 정말 가면을 쓰고 함께 춤을 춰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자 어수선한 청중들 분위기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
“으음.”
그러나 이따금 몸이 자기도 모르게 들썩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연욱이 들려주는 화려한 대왈츠는 과묵함과 고요함으로 예의를 지키는 청중들의 몸을 당장이라도 일으키고 싶게 만들 정도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어깨를 으슥이거나 발을 총총거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따라란-!
정신없는 리듬을 가진 화려한 대왈츠에도 쉬어 가는 부분이 있다.
다소 느릿한 마디가 조금 진행되다 곧바로 다시 빠른 연주가 이어졌다.
이그니치는 잠깐 눈을 감아 보았다.
눈을 감고 들으면 이 그랜드홀 전체가 가면 무도회로 변해 버린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원래 춤을 좋아하진 않지만, 저 곡을 듣고 있자니 오늘만큼은 한번 파트너와 같이 춤을 춰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정도였다.
음악은 사람의 생각을 다르게 만들고 마음을 녹인다고 했던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오늘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와아~”
눈을 뜨자 음악이 끝이 났고 감상을 하던 시간 동안 가면 무도회로 변해 있었던 그랜드홀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록 당황스러운 선곡이었으나, 청중들은 아주 마음에 든 연주를 들었다는 듯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허-. 이거 참.”
“이걸 대체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설마 두 번째 곡도 왈츠를 연주할 줄이야.”
빠른 곡임에도 불구하고 미스 터치가 하나도 없었다.
리듬도 안정적이었고, 무엇보다 곡의 흡입력이 엄청났다.
당장 이그니치도 눈앞에 무도회가 생생하게 열릴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곡이 전부 왈츠였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정말 없지 않나요?”
“예. 첫 번째와 두 번째 곡 모두 왈츠로 고른 건 이번이 처음일 겁니다. 거기다 강아지 왈츠도 나왔으니 이건 뭐 말 다 했죠.”
“역사상 전례 없는 참가자라는 건 이견이 없군요.”
심사위원들은 이제 다시 이그니치의 눈치를 살폈다.
“전 아직 좀 더 들어봐야겠습니다.”
“예. 세 번째 곡도 한번 들어보죠.”
“세 번째 곡은 과연 뭘 할지 궁금하군요.”
“왈츠로 사고를 거하게 쳤으니, 이제 에뛰드로 마무리를 하지 않을까요?”
“하하. 설마 세 번째 곡도 왈츠로 하진 않겠죠?”
그렇게 농담을 던지며 다음 곡을 기다리던 중.
“세 번째 곡은 쇼팽의 왈츠 7번입니다.”
“······?!”
“뭐, 뭐라고?”
“아니. 세 번째 곡도 왈츠라고요?”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곡부터 세 번째 곡까지 전부 왈츠를 연주하다니.
이건 마치 콩쿠르 자체를 조롱하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이대로 연주를 중단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묵묵히 있던 이그니치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곧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사과하며 잠시 안경을 벗고 너무 크게 웃느라 흘린 눈물을 닦았다.
“아. 미안합니다. 내 평생 이렇게 재밌는 광경은 처음 봐서요.”
“이건 명백히 콩쿠르에 대한 도발입니다. 이대로 연주를 들을 생각이십니까?”
“안 될 건 없죠. 어차피 다 똑같은 쇼팽의 곡 아닙니까? 왈츠를 세 번 연속 친다고 해서 그게 도발이라고 한다면 대체 어떤 연주자가 창의적인 곡을 연주하려 한답니까?”
“그건······.”
의외로 이그니치는 진보적이었다.
자기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외치지만, 실상은 보수적인 심사위원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곡 선택도 무척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 많은 왈츠 중에서 하필이면 7번이라.”
보통 왈츠곡이라고 하면 리듬이 빠르고 분위기 자체가 신이 나지만, 7번 왈츠곡만은 제외였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7번 왈츠곡을 왈츠라고 하는 대신, 마주르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마주르카는 폴란드의 민속 무곡을 뜻한다.
폴로네이즈가 남성의 것이라고 하면 마주르카는 여성의 무곡이라고 불리는데, 느린 서주와 리듬, 소나타와 같은 부드러움을 보여 준다.
7번 왈츠곡 역시 사교계에서 크게 인기를 끈 왈츠곡으로, 기존에 있던 왈츠곡과는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큰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따란~ 따라란~
느린 연주가 시작되고 만진 듯, 만지지 않은 듯한 건반 터치가 화로 가득 차 있던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천천히 녹여 내리고 있었다.
감미로운 서사와 느린 리듬이 곡의 난이도를 낮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균형 잡힌 리듬을 유지하면서 풍성한 음색을 그 안에 가득 채워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연주자의 테크닉이 중요했다.
자칫 잘못 감정을 잡았다가는 곡의 흐름이 망가져 아름다운 곡이 시끄럽게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
연주가 중간 정도 이르렀을 때, 심사위원 중 하나가 먼저 짧게 기함을 터트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왈츠곡은 정말 정신없는 리듬감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 세 번째 왈츠곡은 통통 튀고 있던 마음을 한순간에 잡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제서야 이들도 장연욱이 왜 세 번째 곡을 7번 왈츠로 정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쿨링다운.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것을 차갑게 식히면서 서서히 녹아내리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마치 균형 잡힌 코스별 요리를 즐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만약 이게 정말로 저 남자의 설계라면······.’
이그니치는 일순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에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쉬와 디저트까지.
쇼팽이 작곡한 왈츠가 어느새 코스 요리처럼 변모했다.
이런 식으로 쇼팽의 왈츠를 해석한 연주자가 이제까지 있었던가.
이 순간만큼은 심사위원이 아니라 장연욱이라는 피아니스트가 들려주는 음악에 푹 빠진 하나의 청중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