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58화
“본선 참가자들의 컨디션 유지와 기량 상승, 그리고 여러분의 음악을 듣게 될 관중들을 위해서 최고의 연습 시설을 갖췄습니다.”
본선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예선에서부터 이미 수만 명이 나가떨어지기 때문에 본선에 참가하는 인원은 100명도 되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쇼팽 콩쿠르는 총 3주간 진행됩니다. 본선 1차, 2차, 3차, 그리고 결선으로 이어지는데 여러분은 앞으로 총 40곡을 연주해야 합니다. 또한 피아노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연습도 필수입니다.”
3주.
그 안에 40곡을 쳐야 하고 오케스트라와 협주곡도 해야 한다.
물론, 폴란드에 오기 전 모두 연습한 곡이기는 하나 여기서 감을 떨어뜨리지 않게 맹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각자 원하시는 연습실로 들어가세요. 연습하다 지치면 언제든 로비로 나와 음료나 커피를 마셔도 되고 헬스장과 수영장도 마련되어 있으니 마음껏 이용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5년마다 열리는 폴란드 최고의 이벤트가 바로 쇼팽 콩쿠르다.
이때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는 걸 알기에 폴란드 정부에서도 콩쿠르 참가자들을 위해 대형 시설을 건설해 두었다.
참가자들이 연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연습실과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로비, 그리고 리프레시를 위한 운동 공간 등등.
그 외에도 다양한 공간들이 이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서로 친분도 쌓고 나중에 사교 모임도 한다더라.”
“응?”
“생각해 봐.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실력이 검증되어 있잖아. 이중 몇몇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세계 무대를 전전하게 될 테고. 거기다 음악을 할 정도면 집이 크게 사업을 하거나 돈이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니까. 다들 친해지면 좋다고 생각하는 거지.”
지연이의 말을 듣고 보니 이곳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우리나라에서 봤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거기서는 모두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이곳은 마치 사교 모임을 온 듯했다.
“저번 대회에서 보고 한 번도 연락을 못 했네. 그동안 잘 지냈어?”
“하루 종일 연습만 하느라 나도 다른 곳에는 연락도 하지 못했어.”
“이따 연습 끝나고 와인이라도 한잔 어때?”
“좋지.”
다양한 인종이 모인 곳이다 보니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다.
다들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연습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음. 엄청 뻘쭘하네.”
“그치? 다들 아는 사이 같은데, 우리는 뭐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라고 하는 순간 어떤 백인 하나가 지연이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지연? 맞지? 나 기억나?”
“어? 팀?”
“그래. 나야. 너도 이번 콩쿠르에 왔구나. 그래. 네 정도 실력이라면 충분히 올 거라 생각했어.”
지연에게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아, 연욱아. 여기는 팀이라고 예전에 유럽에서 콩쿠르 나갔을 때 만났던 친구야.”
“반가워요. 팀 레이크입니다. 편하게 팀이라 불러 주세요.”
“장연욱입니다.”
나와 악수를 나누던 팀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아니요.”
“이상하네.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거 같지?”
그러자 지연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다크 스페이크 영화 봤어?”
“응? 아, 물론이지. 그거만 벌써 10번은 본 거 같아. 영화 연출이 마음에 들어서. 특히 거기 나오는 음악은 환상적이야. 그것 때문에 계속 보게 돼. 그런데 갑자기 그걸 왜?”
“그 음악 작곡가가 누군지 알아?”
“어린 동양인이라고 들었어. 이름이 장연······ 응?”
팀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혹시 그 작곡가가 설마?”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여주니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지연이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맞아. 연욱이가 바로 그 영화 음반 제작자야.”
“와아-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팀은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다크 스페이스 OST는 자기 전에도 듣고, 일어나서도 듣는 제 최고의 음악이에요. 이럴 수가. 여기서 설마 그 위대한 작곡가를 만나게 되다니.”
“위, 위대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참. 팀. 혹시 게임은 해?”
이번에 또 지연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게임? 당연히 하지.”
“레전드 오브 챔피언이란 게임도 해?”
“아! 내가 하는 게임이 바로 그거야.”
“그럼 그 게임에 나오는 걸그룹도 알겠네?”
“레이스? 물론이지. 그 게임 하는 사람 중 레이스 팬 아닌 사람이 없을걸?”
지연이는 이번에도 자랑스러운 손동작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 ‘레이스’ 걸그룹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아?”
그러자 팀은 방금 전과 똑같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과한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영어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감탄사를 다 들었을 때쯤.
“이봐. 다크 스페이스 음반 제작자가 누군지 알아?”
“알지. 그 천재 동양인?”
“어. 그 천재 작곡가가 오늘 우리랑 같이 본선에 진출했어.”
“뭐?”
겉모습부터 인싸의 냄새가 풀풀 풍기더니, 팀은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내 앞에 왔다.
“와아~. 노래 잘 듣고 있습니다.”
“저도 그 음반 커버 곡을 자주 치곤 해요. 그때마다 마음을 울리는 음색에 감동을 받았는데,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콩쿠르 본선에 올라올 정도면 대단한 피아노 실력을 가지셨다는 건데, 작곡도 세계 수준급이라니. 존경합니다.”
한국과는 많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조금 적응이 안 될 정도였다.
갑자기 관심을 한몸에 받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하나씩 다가와 악수를 건넸고, 그걸 다 받아 주다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되었다.
“아, 이제 연습하러 가야겠네.”
“가볍게 빵 하나씩 먹고 가자고.”
“난 그냥 커피랑 쿠키만 먹을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도 오후가 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모두 마실 것과 먹을 걸 대충 챙기고 연습실로 들어갔다.
“밤에 연습하면 더 피아노 숙련이 잘 된다는 미신이 있거든.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이상하게 밤에 연주를 많이 해. 특히 새벽에는 더 감성적으로 변해서 감정 잡는 실력이 더 올라간다나 뭐라나.”
말도 안 되는 미신이라고 하기에는 나도 밤에 유독 영감이 잘 떠오르고 연습도 잘 된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프로듀서들도 낮에 작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작업을 하다 아침에 잠을 잔다.
이상하게 음악 쪽 일만 하면 사람이 야행성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피아니스트 중에 야행성 아닌 사람들이 없었어. 특이하게 다들 그러더라고.”
“너는?”
“난 부모님 때문에 딱 정해진 시간에 자야 돼.”
차라리 이게 좋았다.
괜히 밤늦게까지 연습하다 건강을 버리느니,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 최고였다.
“너도 연습하러 갈 거야?”
“음. 다들 연습하러 가는 걸 보니 나도 하러 가야 되긴 할 거 같아.”
“응. 배정된 피아노실로 들어가면 악보가 다 있대. 거기서 골라서 해. 나도 연습하러 갈게. 이따 연습 끝나고 호텔에 같이 들어가자.”
“그래.”
지연이는 손을 흔들며 먼저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커피 한잔을 챙기고 배정된 연습실로 들어가 보았는데, 과연 세계 최고 수준의 연습 시설이라 할 만했다.
피아노도 그 비싼 그랜드 피아노였고, 연습실이 보통보다 3배는 넓어 보였다.
“오랜만에 연습 좀 해볼까.”
예선이 끝나고 이것저것 신경을 쓰느라 연습을 많이 하진 못했다.
처음에는 예선만 통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한번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고 싶은 열정이 샘솟았다.
* * *
“오늘도 많은 사람이 모였네요.”
“티켓이 1분 만에 다 팔렸다죠? 아직 본선 1차인데 말입니다.”
쇼팽 콩쿠르 본선 1차 첫날.
바르샤바 그랜드홀에 있는 수천 개의 관중석이 꽉 찼다.
아마 밖에 있는 TV로 티켓을 놓친 관중들이 시청하고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중에는 몇 번 연속으로 심사를 맡은 사람도 있고, 이번이 처음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마음은 다 똑같았다.
그랜드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가슴이 뛰고 기대감으로 흥분되었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인재가 나와서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인가.
“저번 콩쿠르는 굉장히 실망스러웠어요.”
“예. 1등 없이 2등만 나왔으니까요.”
“그나마 그 2등도 억지로 줬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쇼팽 콩쿠르는 1등부터 6등까지 뽑는다.
하지만 무조건 다 뽑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1등도 뽑지 않고 아예 수상자 없이 콩쿠르를 끝내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굉장히 심사 기준이 엄격했다.
“뭐, 우리가 체면상 순위를 뽑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번 대회에도 그랬듯이 저는 이번 대회에서도 마음에 드는 피아니스트가 나오지 않는다면 과감히 점수를 전부 빼버릴 겁니다.”
심사위원 중에서는 가장 권위가 있다는 이그니치.
그는 폴란드 사람으로, 과거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 하나다.
지금은 피아노 세계에서 은퇴했지만, 그 명예를 인정해 현재 쇼팽 콩쿠르의 최장 기간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이번에는 부디 1등이 나오기를 바라야죠”
“예. 그리고 이번 대회는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예선 때부터 다들 반응이 뜨거웠으니까요.”
“그것도 들으셨나요? 레너드 지휘자가 직접 한국으로 날아가서 심사를 봤다는 거.”
“아, 들었습니다. 그것도 꽤 화제가 됐었죠. 레너드 지휘자 말로는 그 나라에 천재 피아니스트 하나가 있다고 하던데요?”
“이거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대체 이번에는 얼마나 재밌으려고.”
심사위원들의 말을 듣고 있던 이그니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섣부른 판단은 여기까지 합시다. 괜히 이상한 편견이 생겨서 공정한 심사를 망칠 수도 있어요. 쇼팽 콩쿠르는 그 어느 대회보다 경건하고 신성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심사가 그 신성함을 깨뜨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그니치였으나, 아무도 그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음악을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가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 쇼팽 콩쿠르 본선 1차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관중석 에티켓을 지켜주시기 바라며 앞으로 나올 참가자들을 향해 열렬한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곧 대망의 본선이 시작되려 한다.
명단을 살펴보던 심사위원들은 첫 번째 참가자 이름을 보고 재밌다는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서 온 참가자네요?”
“이번 예선을 통과한 한국인이 3명이라면서요?”
“예. 한 명은 특이하게 독일에서 봤고, 다른 두 명은 한국에서 예선을 보고 통과했다네요. 그런데 첫 번째 참가자가······.”
“장연욱?”
본선 1차의 시작을 알릴 참가자는 다름 아닌 장연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