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57화
“일주일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에스트로.”
“아닙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어 매우 기뻤습니다.”
콩쿠르 예선이 끝나고 레너드는 공대인 지휘자와 같이 마지막 식사 자리를 가졌다.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공대인은 슬쩍 레너드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꼭 보고 싶었다던 참가자가 혹시 장연욱이 맞습니까?”
레너드는 입 꼬리를 씰룩이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눈치 채셨습니까?”
“그때 거기 있던 심사위원들 모두 대강 눈치를 챘을 겁니다. 마에스트로께서 그의 연주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으니까요.”
레너드가 장연욱을 보기 위해 한국까지 왔다는 건 공대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장연욱의 연주를 넋을 잃고 감상했다는 건 심사위원들 전부가 알고 있는 일.
레너드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 연주를 보고 나서 참 아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쉽다고요?”
“예.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는데, 공정성을 이유로 참가자들에게는 다가가지도 못하니까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이 얼굴에서 드러났다.
공대인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대체 레너드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장연욱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장연욱이란 아티스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영화 다크 스페이스 덕분이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OST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하겠더군요. 그 웅장함, 그리고 웅장함 속에서 나오는 우주와의 조화. 참으로 대단한 음악이었습니다.”
레너드는 그날의 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 더 충격을 받았던 건 그 곡을 제작한 사람의 나이가 무척이나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3~40은 될 거라 생각할 정도로 연륜이 느껴졌으니까요.”
“그때부터 장연욱의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하신 거군요.”
“예. 그가 만들었다는 노래는 전부 다 찾아 들었고, 한국에도 이처럼 대단한 작곡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레너드가 이토록 높게 평가할 정도라면 이번 쇼팽 콩쿠르 우승자는 장연욱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해외에 있는 다른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이번 대회에 쟁쟁한 경쟁자들이 다수 참가를 한다고 합니다. 특히 독일에서 예선을 본 한국인이 하나 있다는데, 실력이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인이라고요?”
“예. 범상치 않은 실력이라고 칭송이 자자합니다. 이번 콩쿠르는 그 어느 때보다 재밌을 것 같습니다.”
장연욱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독일에서 한국인 여성이 심사위원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실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레너드 말대로 이번 콩쿠르는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워질 것 같았다.
* * *
“이번 곡 잘 뽑혔더라. 솔로곡으로는 딱인 것 같다.”
내가 예전에 작곡해 둔 곡 중 하나를 강 대표가 뽑아서 프로듀서들이 다듬었다.
원래는 내가 해야 되는 작업이지만, 콩쿠르 예선 통과 이후 피아노 연습을 하느라 도통 시간을 내지 못했다.
“네. 저도 들어봤는데, 대표님 귀가 의외로 잘 맞더라고요. 지혜 씨한테는 딱 어울리는 솔로곡 같아요.”
“뭐? 야. 내가 이래 봬도 이 바닥에서 엄청 오래 구른 사람이야. 듣는 귀 없었으면 벌써 도태되고 사라졌지.”
틀린 말은 아니다.
노래를 선정하는 데에 있어 강 대표는 남들보다 감이 좋다.
“그리고 네 말대로 미리 홍보를 시작했다. 커뮤니티에도 글을 올리고 언론사에도 몇 번 기사를 뿌렸어.”
“반응은요?”
“다들 좋아. 커뮤니티에서도 네가 새로 런칭하는 솔로 가수라고 하니까 기대가 많더라. 이제까지 네가 내놓은 곡 중에 욕먹은 건 없잖아. 그러니까 다들 평가가 좋지. 거기다 이번에 보이 그룹도 내놓는다고 하니까 더 난리야.”
“제가 콩쿨만 아니면 잘 도와 드릴 텐데.”
“됐어. 넌 작곡만 하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그러다 강 대표는 내 옆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는 혜나 누나를 불렀다.
“혜나야. 근데 넌 대학 안 가냐?”
“예? 대학이요?”
“너 고등학교도 졸업했잖아.”
“흥. 졸업식도 안 오신 분이.”
“뭔 소리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스케쥴 때문에 너 졸업식도 안 갔잖아.”
스케쥴은 사실 핑계였다.
혜나 누나가 고등학교 졸업식을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방 곳곳에서 몰려든 기자들과 팬들 때문에 졸업식에 차질이 생길까 염려하여 누나는 스케쥴을 핑계로 졸업식을 가지 않았다.
물론, 평생 한 번밖에 없는 고등학교 졸업식이라 무척 아쉬웠을 텐데 누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아마 나도 내년에 졸업식을 하게 되면 누나와 똑같은 이유로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대학교는 아직 좀 더 생각해 보고요.”
“너 오라는 대학은 많을 텐데. 다른 성적 상관없이 실기로만 가는 곳도 있잖아. 특별 입학도 있고.”
“그래도 아직은 별로······. 스케쥴 소화하면서 학교 생활 하기도 힘들 것 같아서요.”
강 대표는 그런 누나를 스윽 바라보더니 옆에 있는 날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 설마 연욱이가 어디 대학 가는지 보고 결정하려는 거냐?”
“예?”
“얼굴 보니까 맞네. 어휴. 하여튼 둘이 진짜 껌딱지라니깐. 어떻게 한시도 안 떨어지려고 하냐.”
나랑 같은 대학을 가려고 한다고?
진짜인가?
“뭐, 이왕 다니는 거 같이 다니면 좋잖아요. 연예인이라서 일반 친구들 사귀기도 많이 힘들 텐데.”
“뭐야. 진짜였어? 나랑 같이 대학을 가겠다고?”
“왜? 안 돼?”
“누나 수능도 망쳤잖아. 나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못 따라 올 텐데?”
누나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해갔다.
여기가 사람들 있는 사무실이라서 그렇지, 집이었으면 주먹부터 날아왔을 것 같다.
“야! 그까짓 수능 다시 보면 돼.”
“누나가 공부를 한다고? 상상이 안 되는데.”
“이게 진짜.”
갑자기 누나가 이상한 곳에 열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두고 봐. 너 수능 볼 때 나도 다시 봐서 엄청 좋은 성적 받아 놓을 거야. 그때 네가 나보다 적게 나오기만 해.”
“뭐······ 그러세요. 누님이 하시겠다는 일에 이 아우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근 기대가 됐다.
혜나 누나랑 같은 대학을 다닌다라······.
뭔가 조금 피곤할 것 같으면서도 두근대는 마음이 생겼다.
연예인이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평범한 사람처럼 지내긴 아마 힘들 것이다. 그때마다 누나가 곁에 있다면 덜 외롭게 대학을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아참. 근데 폴란드로는 언제 가는 거야?”
“아직 시간 좀 남았어요.”
“혹시 혼자 가냐?”
“그건 아직 결정 못 했는데.”
“야! 당연히 다 같이 가야지!”
콩쿨 본선을 보기 위해서는 폴란드로 날아가야 한다.
그냥 소속사에서 붙여 주는 매니저랑 같이 갈까 했는데, 누나는 가족 전체가 같이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네 멘탈 케어도 해줘야 하고, 가족 없이 타지에 혼자 있으면 얼마나 외로운 줄 알아?”
“그런가. 폴란드 최고 등급 호텔에서 지내다 보면 딱히 외롭다는 생각은 안 들 것 같았는데.”
내 말에 누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였다.
“너 설마 우리 가족 빼놓고 가려는 이유가 지연이 때문이냐?”
순간 뜨끔했다.
“지연이가 왜?”
“음흉한 놈. 지연이랑 둘이서 뭐하려고.”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거 아니면 다 같이 가. 엄마 아빠도 너 혼자 폴란드에 가 있으면 얼마나 걱정하겠어.”
그냥 부모님이 나 때문에 폴란드로 갔다가 고생만 하실 것 같아 그랬던 건데, 누나는 내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지연이는 독일에서 예선을 보고 본선 티켓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 이번에도 지연이는 혼자 맹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저번처럼 연락이 없어서 조금 섭섭하긴 했다.
그런데 내가 지연이 때문에 혼자 폴란드로 가려고 했다고?
“······.”
절대 그렇지 않다.
* * *
10시간 30분 동안의 비행.
다소 긴 비행 시간이라 지루하기 마련이나, 부모님은 오히려 아쉬워 하셨다.
“내가 우리 아들 딸 덕분에 퍼스트클래스만 타고 있네. 꼭 재벌이 된 기분이야.”
“저번에도 느꼈지만, 퍼스트클래스로 타면 비행기에서 내리기가 싫어진다니깐?”
나와 누나가 잘 되고 나서부터 부모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해외 여행을 보내드릴 때도 퍼스트클래스만 태워 드리며 말 그대로 돈으로 효도를 해 드리는 중이었다.
둘 다 스케쥴 때문에 부모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기가 힘드니, 이렇게라도 효도를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대학생 때 여기 꼭 한번 와보고 싶었어.”
“아~ 기억나네. 당신이 옛날에 폴란드로 관광 한번 가보고 싶었다고 했지?”
“응. 결국 이렇게 오게 되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폴란드라고 하면 생소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또한 쇼팽 콩쿠르 같은 세계적인 국제 대회가 바르샤바에서 치러지는 만큼, 음악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기 바르샤바 국립 대학교 도서관이 정말 아름답다고 하던데.”
“맞아. 나도 인터넷으로 봤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면서? 엄마. 이따 호텔 체크인하고 다녀와 볼까?”
“좋지.”
엄마와 누나의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오늘 여기에 오기 참 잘한 것 같았다.
“연욱아.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 아빠는 상관하지 않는다.”
“네.”
엄마와 혜나 누나가 먼저 앞서가던 중, 아버지가 갑자기 어깨동무하며 무게를 잡으셨다.
“그런데 혹시라도 포기하고 싶거나 힘들 때 이걸 잘 생각하렴.”
“······?”
“오늘 여기서 우승하지 못하면 2년 동안 군대에서 삽질해야 한다는 걸.”
진심으로 응원과 충고가 되는 말이었다.
“하하. 그래도 우리 아들이 군복 입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긴 하네.”
우리나라 남성 피아니스트들이 국제 무대에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이유가 있다.
본인의 커리어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군대 면제가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한다.
생각해 보라.
남들은 2년 동안 열심히 피아노로 커리어를 쌓아 가며 발전하는 동안, 본인은 군대에서 허송세월해야 한다.
그사이에 벌어진 갭은 도저히 채울 수가 없다.
그래서 남자는 국제 무대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봐도 결국 한계가 있기 때문.
음악가에 있어서 2년이란 시간은 어떠한 재능과 노력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와~ 호텔 진짜 좋네.”
“원래 본선 참가자들이 묵는 호텔이 있긴 한데, 여기가 더 좋은 곳이라서 일부러 여기로 잡았어요.”
“진짜? 잘했다.”
“네. 여긴 부모님이 쓰시고 앞방은 혜나 누나가. 그리고 옆방은 제가 쓸게요.”
혜나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방을 세 개나 잡았어? 이렇게 넓은데? 그냥 너랑 나랑 같이 써도 될 거 같은데.”
“응, 안 돼.”
초등학생도 아니고 누나랑 같이 방을 쓸 생각은 없다.
“연욱아~! 잘 도착했네?”
“응? 지연이?”
“엇! 언니.”
그런데 그때 누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그제서야 누나는 내가 왜 이 호텔에 왔는지 알았다는 눈빛으로 날 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