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56화
국제 쇼팽 콩쿠르.
세계에서 유명한 3대 콩쿠르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고 인정을 받는다.
음악가들에게는 이 콩쿠르의 여정 자체가 경건하고 신성한 것이라 여겨진다.
당연히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만큼 심사 과정은 공정하고 엄격해야만 했다.
즉, 인맥 따위로 예선을 통과하게 될 경우 실력에서부터 들통이 나 창피만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인맥은 절대 통하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자리.
그것이 쇼팽 콩쿠르였다.
“마에스트로 레너드. 오늘 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국 심사위원들은 레너드를 눈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레너드는 그들의 인사를 하나씩 받아주다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 나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오~ 마에스트로 공. 이게 얼마만에 보는 겁니까?”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공대인 지휘자.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을 세 번이나 맡을 만큼 해외에서도 알아 주는 지휘자였다.
몇 번 모임을 통해 공대인 지휘자를 알고 있던 레너드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이런 저런 말을 나누었다.
“마에스트로. 얘기는 들었습니다. 심사위원 자리를 거절했다가 갑자기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한국을 오는 조건으로.”
“소문이 빠르군요.”
“워낙 유명한 얘기였으니까요. 마에스트로는 심사 대신 콩쿠르 지휘자를 맡을 줄 알았거든요.”
쇼팽 콩쿠르는 솔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하지만, 본선 중반부터는 오케스트라와 같이 합을 맞춰 가며 연주를 해야 한다.
그때 저명한 지휘자들이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아 주곤 하는데, 레너드도 저번 콩쿠르에서 지휘자를 맡아 주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혹시 한국에 특별한 인연이라도······?”
“아니오. 한국은 처음 와보는 겁니다. 아! 예전에 공연 때문에 딱 한번 와본 적이 있군요. 아무튼, 한국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 그저 이번에 한국에서 예선을 보는 참가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레너드가 관심을 갖고 있는 참가자가 있다?
공대인은 그게 누구인지 더더욱 궁금해졌다.
대관절 누구이기에 저 먼나라에서 살고 있는 레너드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게 누굽니까?”
“흐흐. 그걸 알려 줄 순 없죠. 공정성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이거 궁금해서 미치겠군요.”
“굳이 내가 말해 주지 않아도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공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너드가 어떤 방식으로 심사를 할지 유심히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윽고 심사가 시작되었다.
참가자가 많고, 허투루 심사를 할 수 없기에 며칠 동안 이곳에서 심사를 해야 한다.
고된 일이지만, 대한민국의 새싹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기에 피곤하지 않았다.
“음-.”
첫 번째 참가자가 나왔다.
레너드가 왔다는 말에 몇 배는 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우려대로 크게 긴장한 탓에 본인의 실력을 마음껏 보여 주질 못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참가자들이 본인의 기량을 선보였으나, 레너드는 묵묵한 얼굴로 심사만 할 뿐이었다.
“어땠습니까?”
10분간의 휴식 시간.
공대인 지휘자의 물음에 레너드는 웃으며 말했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재능 있는 사람이 많더군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세계 레벨이라 불릴 정도의 참가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공대인 지휘자가 봐도 그러했다.
모두 평소보다 더 긴장한 탓인지 연주 실력이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렇게 휴식 시간이 끝나고 나서 다시 참가자들을 하나씩 무대에 세웠다.
“음. 이번에는 좀 낫군요.”
저번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레너드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은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레너드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니,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마치 택배를 시켜 놓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해야 할까.
레너드는 자꾸만 명단을 확인하며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얼른 나오기를 기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나와 주세요.”
짧으면 1분. 길어 봐야 2분 안에 끝나는 심사.
이 짧은 시간 동안 뭘 볼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심사위원으로 나온 사람들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단 1분이라고 충분히 실력 파악이 가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계 최고의 콩쿠르 심사위원을 맡게 된 것이다.
참가자들 모두 그것을 알고 있기에 중간에 본인의 연주가 끊겨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일어나 무대를 내려갔다.
‘이번에는 확실히 눈에 띄는 사람이 아직 없네.’
레너드와 마찬가지로 공대인 역시 참가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쇼팽 콩쿠르라서 그런지 모두 예선곡을 쇼팽 것으로 준비해 왔다.
듣던 걸 또 듣고 계속 듣다 보니 점점 질려 갔다.
쇼팽 콩쿠르 예선은 곡이 자유롭다.
본선부터는 곡을 정해주지만, 예선에서는 참가자 마음대로 곡을 선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선에서도 반드시 쇼팽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게 고착화가 되어 모두 비슷한 곡만 가져와 예선을 치른다.
“으-. 드디어 마지막 참가자네요.”
“예. 좀만 더 힘내 봅시다. 그런데 마지막 참가자 이름이······.”
어느덧 시간이 흘러 드디어 오늘 마지막 참가자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름이 익숙하다.
“장연욱? 아! 혹시 그 장연욱인가?”
“맞네. 저도 얼핏 들었어요. 이번 콩쿠르에 참여한다고 하더니, 진짜 했네?”
“하하. 이거 설마 방송용 이벤트는 아니겠지?”
“방송에서 화제를 이끌려고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이 있긴 하죠.”
심사위원들은 대다수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장연욱인 연예인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그런 놈이 쇼팽 콩쿠르 예선을 참여한다?
이건 필시 방송용으로 쓰려는 간악한 술수이리라.
심사위원들에게는 당연히 건방지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30초 안에 내보내는 것도 찬성입니다.”
“그럽시다. 뭐, 저번에 작곡한 곡으로 이름 좀 날렸다고 까부는 거 같은데, 이 신성한 콩쿠르에서 그랬다가는 혼쭐이 난다는 걸 보여줘야죠.”
“그래도 서울대에서 학생들이 인정을 했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분명 방송용으로 조작한 게 아닐까요? 요즘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심사위원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으며 공대인은 레너드를 슬며시 살펴보았다.
여전히 묵묵한 얼굴이다.
어떤 참가자 때문에 이번 콩쿠르 예선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그게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예선에 참여하지 않는 참가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남은 장연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연욱이라고 하기에는 레너드의 얼굴이 무척이나 잔잔하다.
더군다나 레너드 정도의 지휘자가 장연욱의 이름을 들어나 봤는지 의문이었다.
“그럼 마지막 참가자를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곧이어 마지막 참가자이자 오늘 최고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장연욱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은 뒤 건반에 손을 올렸다.
과연 장연욱은 어떤 쇼팽곡을 준비했을까.
심사위원들 중 절반 이상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대로 심사를 끝내 버릴 것처럼 말이다.
따라란~
“음?”
“엇.”
그런데 도입부가 색다르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하는 곡이 나오자 심사위원들 모두 기함을 터트렸다.
“여기서 차이코프스키 곡을?”
쇼팽 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라이벌 관계를 띤다.
누가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사람들은 쇼팽 콩쿠르를 조금 더 높이 쳐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엄연히 두 세계적인 대회는 음악가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으며, 영원한 라이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쇼팽 콩쿠르 예선에서 차이코프스키 곡을 연주한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하. 이거야 원.”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는 심사위원들이었으나, 차차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며 멍하나 장연욱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이 협주곡이 나온지 150년이나 지났고,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적인 협주곡으로 불린다. 더군다나 박자의 형성이 매우 복잡해서 약간의 미스 터치도 금방 티가 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곡이다.
또한 강약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곡의 음색이 확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유명한 곡이지만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보여 주려는 걸 기피하는 곡이기도 하다.
그런 곡을 지금 장연욱은 쇼팽 예선에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2분 정도 흘렀을까.
보통의 경우라면 지금 연주를 중단시키는 게 맞다.
하지만 누구 하나 마이크를 들지 않고 있었다.
모두 연욱의 연주에 집중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내 평생 이런 예선을 본적이 있던가.’
공대인 지휘자는 지금껏 여러 예선에서 심사위원을 맡아왔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첫 충격은 쇼팽 예선에서 나온 차이코프스키의 곡이었다.
두 번째 충격은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연주를 보이는 장연욱이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상대를 떨어뜨리려고 했던 심사위원들의 얼빠진 표정이 그 증거다.
그리고 공대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바로 옆에 있던 레너드였다.
“아아-.”
마치 성모 마리아를 눈앞에서 만난 것처럼 두 손을 경건하게 모으고 있는 레너드.
장연욱을 바라보는 레너드의 시선은 더 이상 심사위원의 그것이 아니었다.
콘서트에 온 팬의 눈동자라고 해야 할까.
그제서야 공대인은 레너드가 한국에 온 이유를 알았다.
‘장연욱 때문이었구나.’
레너드가 그토록 기다리던 예선 참가자는 바로 장연욱이었다.
대체 장연욱과 어떤 연결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장연욱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직접 심사하기 위해 한국까지 왔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이번 예선 참가자들의 실력이 다 별로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쇼팽 예선에서 과감히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들려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장연욱의 연주는 최근 들었던 피아노 연주들 중 가히 베스트였다.
오늘 예선의 1위를 뽑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공대인은 장연욱을 뽑을 것이다.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피아노 연습까지는 또 어떻게 한 걸까?’
장연욱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슈퍼스타이지 않은가.
그런 그가 피아노 연습까지 하며 콩쿠르에 나와 이 정도의 실력을 보여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브라보.”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연주가 끝났다.
레너드는 처음으로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쳐주었다.
심사위원들도 아직까지 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 한 듯 멍하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공대인 지휘자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박수를 치면서 유유히 퇴장하는 장연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오늘 대한민국에 두 번 다시 없을 희대의 음악가를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