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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146화 (146/200)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46화

아름다운 날이다.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

땅에 내리쬐는 햇볕.

모든 게 완벽했다.

다만, 오랜만에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나오느라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 났다.

혹시······ 살찐 건가?

젠장. 요즘 돌아다닌다고 운동을 좀 쉬었더니 금방 몸으로 죗값을 치르게 됐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인데 말이다.

“연욱아. 여기야.”

카페에서 미리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지연이가 손을 흔들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냐. 내가 조금 일찍 온 거야. 커피는 네가 항상 마시던 걸로 시켰어. 카페모카, 맞지?”

“아, 응. 고마워.”

지연이가 외국으로 나간 뒤로 종종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기면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다방면으로 알아보기도 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 연락이 왔을 땐 반가움과 흥분감에 고양이 되었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딱 하나 묻고 싶은 건 있었다.

대체 왜 1년간 연락을 끊은 것인지, 그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분위기상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어 말없이 앉아 있었는데, 오히려 지연이가 답답했는지 먼저 운을 띄었다.

“왜 안 물어봐?”

“응?”

“내가 연락 끊은 이유. 궁금하지 않아?”

미칠 듯이 궁금하긴 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연락 한번 쯤은 줄 수 있었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가 너 무사한가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얼마나 많이 돌렸는데.”

지연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음. 그냥 집중을 할 필요가 있었어.”

“집중?”

“곧 있으면 새해잖아. 그리고 내년에 너랑 한 약속도 지켜야 하고.”

약속?

설마 그걸 말하는 건가.

“국제 콩쿠르?”

“다행히 기억하고 있네.”

“그럼. 누구랑 한 약속인데.”

그러자 지연이의 얼굴에 수줍음이 묻어 나왔다.

줄곧 냉랭한 표정만 짓고 있어서 조금 긴장을 했는데, 지금은 다 풀어진 듯 보였다.

“준비는 잘 돼가?”

“응.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했어. 아무랑도 연락하지 않고 인터넷도 다 끊고 하루 종일 피아노만 쳤어.”

그녀가 피아노에 열중 중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어 연습에만 매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만큼 그녀에게 국제 콩쿨이 중요했던 걸까.

“연욱이 너는? 요즘 보니까 엄청 바쁠 거 같던데. 거기다 걸그룹도 성공적으로 잘 데뷔시켰다면서? 축하해.”

“응. 고마워.”

“그럼 연습은 제대로 못 하고 있겠네?”

“그건······.”

“콩쿨은 나올 거니?”

부드러웠던 지연이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나가야지.”

“그 말은 나가고 싶지 않다는 거네?”

“아니야. 나갈 거야.”

국제 콩쿨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일에 쫓겨 사느라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한 건 사실이다.

지연이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연욱아. 난 너랑 한 약속 하나로 그토록 싫어하던 피아노를 다시 좋아하려고 노력했어. 그리고 지금은 예전처럼 피아노를 즐겁게 치면서 쉬지 않고 연습 중이고.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지연이는 내 손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국제 콩쿨에 같이 나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난 꼭 너랑 같이 콩쿨에 나가고 싶어. 결승 무대까지 말이야.”

지연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미세하게 떨림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이대로 콩쿨에 나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 보였다.

난 손을 맞잡아주며 대답했다.

“응. 걱정하지 마. 꼭 같이 나가게 될 테니까. 그나저나 외국 생활은 어땠어? 1년 동안 피아노 연습만 하느라 너무 재미없게 보낸 거 아니야?”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화제를 바꿨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지연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연습 들어가기 전에 실컷 놀러 다녔지. 영국은 진짜 음식 너무 맛이 없는데, 다른 나라들은 다 괜찮았어. 그리고 나중에 너랑 혜나 언니랑 같이 유럽 여행 다니고 싶더라. 아참! 혜나 언니는 잘 지내셔? 내가 통 연락을 안 드려서 걱정하시겠다.”

“안 그래도 오늘 너 만난다니까, 아주 길길이 날뛰더라. 다음에 너 만나면 가만 안 놔두겠다고. 혜나 누나도 너 걱정 많이 했거든.”

“으으. 큰일 났네.”

이렇게 보면 예전의 지연이 모습이었다.

애써 무게를 잡고 얘기하는 건 역시 지연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대답은 했지만 국제 콩쿨이라.

이거 배은망덕한 제자가 또 한번 스승을 찾아뵈어야 하겠는데?

* * *

“음. 돌아가라.”

오랜만에 만난 이창호 교수는 ‘나 완전히 삐졌다’라고 이마에 쓰여 있는 듯했다.

“아이. 스승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이거부터 받으시죠.”

“허어. 어딜 감히 씨알도 먹히지 않을 뇌물을.”

“이거 몸에 아주 좋은 거예요. 인삼도 아니고 무려 산삼입니다. 엄청 비싼 거라고요. 제가 꿀꺽하려다가 스승님 생각이 나서 이렇게 가져온 겁니다.”

“뭐? 사, 산삼?”

벌써 입질이 왔다.

이창호 교수는 물욕이나 돈 욕심은 없는데, 유독 몸 건강 챙기는 건 좋아한다.

하지만 그냥 날름 받기에는 자존심이 있으니, 한 번 더 튕기고 있었다.

“크흠. 이런 걸로 얼음장 같은 내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산삼 한 뿌리 드시면 몸이 뜨뜻해져서 금방 녹지 않을까요?”

“됐어. 그냥 나가 인석아.”

“하아. 알겠습니다. 이 귀한 산삼은 그냥 삼계탕에 넣어서 끓여 먹어야겠네요.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스승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이창호 교수가 붙잡았다.

“뭐? 산삼을 삼계탕에 넣어 먹는다고? 그건 생으로 먹어야 효과가 직빵이야!”

“전 이런 걸 잘 못 먹어서요. 그나마 삼계탕 같은 곳에 넣어 먹으면 좀 먹을 만 하던데요?”

“이놈아! 그럴 바에는 먹지 마! 다른 사람 줘!”

“그럼 스승님이 드실래요?”

이창호 교수는 미간을 좁혔다.

“에잉. 내가 또 너한테 홀라당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산삼에 솔깃하신 순간, 이미 넘어가셨습니다.”

“하여튼 이 악랄한 놈 같으니라고.”

“악랄하긴 해도 스승님을 챙기는 마음이 예쁘지 않습니까?”

“그런 놈이 몇 달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나는 진상품을 이창호 교수 앞에 놓았다.

“죄송해요.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바쁜 사람이잖아요.”

“잘났다. 스승 앞에서 자랑이나 하고.”

“이제 저도 공인이라서 함부로 남 앞에서 자랑 같은 거 못하거든요. 이럴 때 해야지 언제 또 하겠습니까.”

결국 백기를 든 이창호 교수가 차를 한 잔 타왔다.

“산삼까지 들고 올 정도면 보통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데, 말해 봐. 뭐 때문에 왔냐? 설마 네가 콩쿨 때문에 온 건 아닐 테고.”

“콩쿨 때문에 온 거 맞는데요?”

“그래. 네가 콩쿨 때문에 왔······ 뭐라고?”

“내년에 있는 쇼팽 국제 콩쿨 때문에 왔다고요.”

이창호 교수의 눈동자가 번뜩 커졌다.

“진짜냐? 콩쿨은 관심도 없다던 놈이 정말 콩쿨을?”

“예. 제가 꼭 나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요.”

“이유? 무슨 이유? 군대?”

“뭐, 그것도 있고 누구랑 약속을 한 게 있어서요. 아무튼 꼭 나가야 돼요. 안 그럼 저 맞아 죽어요, 스승님.”

이창호 교수가 활짝 웃는 것을 보니 문전박대를 할 거 같진 않았다.

“말 잘했다. 안 그래도 내가 너한테 콩쿨 한번 나가보라고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네놈이 감히 스승의 전화를 씹고 있기에 말할 기회가 없었지.”

“아휴. 제가 언제 씹었다고 그러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내가 3번이나 전화했는데 다 씹었잖아.”

“그건······ 제가 외국에 있느라 그랬습니다.”

“변명하지 마.”

“넵.”

이창호 교수는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국내 콩쿨은 몰라도 국제 콩쿨은 쉽지 않아. 특히 쇼팽 콩쿨은 우승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어.”

“우리나라 사람이 딱 한번 우승한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 그것도 엄청난 기적이었지.”

“옛날에는 제가 나가면 우승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가 이렇게 피아노를 등한시할 줄 모르고 했던 말이지. 그때 만약 네가 남들처럼 피아노만 주야장천 팠으면 가능했을 거다.”

우승은 힘들다고 아예 못을 박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그만큼 국제 콩쿨 경쟁력이 엄청나다는 것이겠지.

“거기다 우리 서울대 학생들도 대거 출전할 예정이야. 거기서 과연 본선에 올라갈 놈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는 거지. 예선 심사도 상당히 까다롭거든.”

“몇 명이나 나가는데요?”

“우리 서울대만 고르고 골라서 35명.”

“생각보다 많이 안 나가네요.”

“이도 저도 아닌 놈을 예선에 보냈다가 학교 명예만 실추되니까.”

서울대도 그런 쪽으로 나름 관리를 하고 있구나.

자유롭게 신청이 가능한 줄 알았는데, 학교 자체에서 커트라인을 만들어 놓는 것 같았다.

“근데 피아노는 거의 치지도 않고 해외 돌아다니면서 음악 작곡만 한 놈이 갑자기 국제 콩쿨을? 본선으로 올라가는 것도 드라마일 거다.”

나는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 귀한 제자를 이대로 포기하시는 거예요?”

“이제 몇 달밖에 안 남은 대회잖아. 사실 포기하는 게 맞지.”

이 정도 했으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이창호 교수는 아무래도 난 본선으로 진출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네 말대로 제자를 포기하는 스승이 될 순 없는 것도 맞고.”

“예?”

“따라와라.”

이창호 교수는 교수실을 나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여러 건물을 지나 도착한 드넓은 강당.

아니. 실내 체육관이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여기 강당에 피아노 여러 대가 놓여 있었는데, 각자 하나씩 앉아 피아노를 치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하는 곳이죠, 여긴?”

보통 피아노 연습은 방음이 되는 방에 들어가 혼자 한다. 그런데 여긴 뻥 뚫린 곳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러 명이 함께.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서로의 경쟁을 부추기는 곳. 편하게 아레나라고 할까?”

“아레나요?”

“여기 있는 피아노가 총 15대. 지금 네가 보는 대로 엄청 시끄럽지? 연습이 안 될 거 같고 말이야.”

“네. 좀 무식한 방법 같은데요? 연습이 되겠어요?”

“신기하게도 연습이 돼. 처음에는 자기 피아노 소리도 안 들리고 남의 피아노 소리도 다 겹쳐서 들리지. 근데 계속하다보면 점점 내 소리랑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함께 들려. 그러면서 본인의 실력이 나은지, 아니면 상대방의 실력이 나은지 가늠을 할 수가 있게 돼.”

무식한 방법이기는 해도 효과가 있는 훈련이라는 건가?

“그러면서 내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거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서로 배우는 것만큼 좋은 훈련이 없거든.”

나름 서울대의 비밀 훈련 방법인 것 같은데, 나한테 이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뭘까?

“앞으로 넌 여기서 연습해라.”

“네?”

“출입카드는 내가 마련해 줄 테니까, 앞으로 여기 와서 피아노 연습해. 분명 배우는 게 있을 거다. 너 스스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도 알게 될 테고.”

그렇게 말한 뒤 이창호 교수는 나를 빈자리에 강제로 앉혔다.

“오늘부터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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