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40화
“연욱아.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아까부터 왜 그래?”
내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 걱정이 됐는지 누나는 주위를 서성였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음. 그럼 좀 쉬고 있을래?”
“응. 미안해. 멤버들이랑 식사 먼저 해. 난 알아서 먹을게.”
머리가 복잡해서 도저히 누나와 멤버들을 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아까 본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갑작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광경.
처음에는 데자뷰를 겪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건 데자뷰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어 머리가 아플 뿐이다.
정말로 또 다른 전생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할 수도 없을 때였다.
- 미스터 장!!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기에 생각 없이 받았는데, 우렁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나왔다.
“누, 누구시죠?”
- 이거 실망입니다. 제 번호를 저장도 안 해 놓으시다니!
“아······.”
화면을 살펴보니,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다름 아니라 알렌 감독이었다.
“감독님이셨군요. 죄송해요. 제가 화면도 안 보고 전화부터 받은지라.”
- 괜찮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저한테 말도 없이 미국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전화를 드리게 됐습니다.
딱히 알렌 감독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온 걸 어떻게 안 거지?
“일이 바빠서 깜빡했네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전화를 한번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왔다는 건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 당연히 C&C를 통해서죠. 거기랑 계약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인지 그쪽 사람들이 미스터 장의 행보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워낙 큰 회사다 보니까 도처에 깔린 눈도 많고요. 아마 묶고 계신 호텔에도 C&C 끄나풀들이 미스터 장을 감시하고 있을 겁니다. 하하!
분명 농담으로 한 말일 텐데, 나한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 그래서,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어야죠. 미스터 장에게 제대로 대접 한번 하지 못해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 부담스러워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나오기만 하세요.
딱히 만나고 싶지 않은데 알렌 감독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차라리 단호하게 거절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찰나.
“감독님.”
- .
“SF물에는 빠삭하시죠? 판타지 소설 같은 것도 많이 읽으시고. 과학 쪽에도 관심이 많으십니까?”
- 물론입니다. 국가를 가리지 않고 판타지 소설 중 유명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보고 맙니다. 돈을 들여 번역해서라도 말이죠. 거기다 과학은 항상 자문을 받고 있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마음을 정했다.
“이틀 뒤 저녁에 어떻습니까?”
- 오! 만나 주시는 겁니까?
“예. 약속 장소를 보내 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공상 과학 쪽이라면 알렌 감독이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좀 엉뚱하긴 해도 혼자서 끙끙 대기보다는 한번 물어보는 게 낫겠지?
* * *
“저번에 들었던 세 번째 곡 말입니다. 제가 몇 가지 수정 사항을 적어 왔습니다.”
복잡한 머리를 다스릴 때 가장 좋은 건 일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혼자 열심히 생각해봤자 답이 나올 일은 영원히 없을 테니, 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예? 세 번째 곡이라면 저희가 저번에 샘플로 들려드린······.”
“네. 이 곡 맞죠?”
“아, 네. 그런데 저희가 그때 악보를 드렸던가요?”
“아뇨. 그날 듣고 외워서 악보에 옮겨 적었는데요?”
제드와 음악팀 직원들이 모두 동그랗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때 그걸 다 듣고 외우셨다고요?”
“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여기 몇 가지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들을 적어 두었습니다. 한번 검토해 보시죠.”
그들은 악보 앞에 모여 내가 체크해 둔 곳들을 살펴봤다.
제드는 악보를 다 본 뒤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몇 가지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수정할 사안이 꽤 많군요.”
“최대한 추려 놓은 겁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곡이었거든요. 그래서 대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하. 그럼 저희도 열심히 해봐야겠네요. 그런데 저희도 장 PD님이 들려주신 샘플 곡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하실 예정인지······.”
“일단 메인 곡을 뭐로 할지 정한 다음, 나머지는 수록곡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역시 듣던 대로군요.”
듣던 대로라고?
“이미 이 바닥에서는 장 PD님에 대한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음악 작업할 때만큼은 정말 양보가 없으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특히 악기를 연주하려고 하면 10초마다 중지시켜서 곤욕을 치른다고들 하던데······.”
“뭐든 완벽한 게 좋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완벽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최소한 해야 할 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영화 다크 스페이스 OST 작업을 하면서 내 소문이 사방팔방 퍼져 나갔던 모양이다.
나도 내가 악독하다는 걸 알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 내 귀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백 번이고 다시 연주를 시키니 말이다.
“이거, 울상 짓고 있는 멤버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선합니다.”
“멤버들도 이제 데뷔를 해야 하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아 참, 그리고 저는 전자음으로 악보를 전체 다 연주시키는 걸 싫어합니다.”
“아! 그건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내는 소리보다는 직접 연주자들을 불러서 한다고 말입니다. 뭐랄까······. 낭만이 있는 분이시군요.”
“요즘 트렌드랑 맞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풍성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회사에서 음악팀에 많은 돈을 투자한다고 했죠? 따로 준비된 연주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팀은 없으니 그 점은 양해바랍니다.”
어차피 이번 곡은 오케스트라 협주곡이 아니라 가요다.
그것도 대중이 흥얼거리며 좋아할 만한 가요곡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렇기에 오케스트라는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몇몇 개 악기를 연주해 줄 수 있는 연주팀만 있으면 된다.
“장 PD님. 새로운 악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에게 주신 피드백대로 수정한 겁니다.”
얼마 안 있어 제드가 수정 사항이 적용된 새로운 악보를 건넸다.
그러나 절반만 마음에 들고 나머지 절반은 별로였다.
“음-. 이런 느낌이 아닌데······. 초반 부분은 마음에 들지만 중반부터가 이상합니다. 제가 피드백을 드린 건 이런 식의 느낌이 아니었어요. 여기서 몇 가지 음을 추가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제드도 내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이렇게 음을 돌리는 방법이 있었군요. 신선한 발상입니다. 뭔가 조화를 이루지 않을 것만 같은 음표들이 막상 붙여 놓으니 아주 괜찮게 들립니다. 저기 그러면 이쪽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제드는 진지하게 내 피드백을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내가 그러하듯, 이 사람도 음악에 대해서는 아주 진지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와 제드가 상의 끝에 나온 수정 사항이 있으면 직원들이 그에 맞춰 악보를 수정하고 프로그램을 돌려 연주를 해 본다.
그렇게 해서 우린 타이틀곡과 그 외 수록곡들을 정해 놓은 다음 계속해서 수정을 거듭해 나갔다.
원래 어색한 곳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불편하고 악상이 잘 떠오르지 않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예술이라는 게 서로 한번 부딪히면 끝도 없이 부딪히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모든 게 스무스하게 흘러갔다.
마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본 팀처럼 말이다.
* * *
“아! 미스터 장. 여깁니다.”
탁 트인 장소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알렌 감독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유명한 곳인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여기 요리가 정말 맛있는 곳이라서 미스터 장에게 꼭 한번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미국에 온 이후부터 맛집만 찾아서 가고 있었는데, 여전히 내가 모르는 맛집이 참 많은 것 같았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식당이 있지만, 로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식당도 있는 법이죠. 워낙 떠드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겁니다.”
나름 신경을 썼다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렌 감독과 신변잡기를 했다.
그렇게 음식이 나오고 시답잖은 이야기가 슬슬 질려갔을 때쯤.
“미스터 장.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나온 것 아닙니까?”
눈치 빠른 알렌 감독의 말에 나는 애써 숨기지 않았다.
“예. 그냥 별다른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도 나름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터라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살면서 판타지 소설이라고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예. 어떤 것이든.”
“혹시 회귀를 하게 되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기도 합니까?”
“음-. 그런 소재의 글들이 많이 있긴 하죠. 원래 본인의 몸으로 회귀를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눈을 뜨기도 합니다. 그건 빙의라고들 하죠. 자기 몸이 아니니까요.”
빙의라고 하니까 어감이 좀 섬뜩해 보였다.
“그럼 만약 A라는 사람이 회귀······ 아니. 15년 전으로 빙의를 하게 됐다고 칩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번도 가보지 않은 특정 장소로 가니까 자기도 모르는 기억들이 솟구쳐 올라오는 겁니다.”
“오. 그래서요?”
“당연히 A는 혼란스럽겠죠.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일인데,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니까요. 그런 걸 뭐라고 하죠?”
“음. 보통 그런 건 데자뷰 현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전생에서 자신이 방문했던 곳이거나.”
“만약 그랬던 적이 없다면요?”
“그럼 자기도 모르는 또 다른 전생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알렌 감독이 내 추측과 똑같았다.
“그런 소재의 내용이 몇 개 있긴 하죠. 주인공이 회귀를 몇 번 거듭해 미래를 바꾸는······. 하지만 자기가 기억하지 못 하는 회귀와 빙의는 처음 들어 봅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예. 보통 그런 경우라면 그 주인공이 정말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주인공이 정말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
“미스터 장. 사실은 A가 아니라 B라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었을까요?”
“그게 무슨 뜻이죠?”
“A는 자기가 회귀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B라는 사람이 이제까지 회귀를 해왔던 겁니다. 어쩌면 우연히 그 부작용으로 A가 회귀를 알아차린 것일 수도 있고요.”
순간 머릿속에서 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