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39화
“자. 여기가 미디어룸입니다. 음악 작업은 물론, 영상 작업까지 가능한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죠. 애니메이션 팀과 호흡을 맞춰야 할 때 여기서 모여 작업을 하곤 합니다.”
제드는 작업실을 하나씩 소개해 주며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가 어느 문 앞에 서서 우리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여기는······.”
“악기실.”
“예? 아, 예.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나요? 여기 딱히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찍은 겁니다.”
사실 나도 모른다.
그냥 번뜩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왠지 이 공간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몇 번이고 와봤던 곳인 것처럼 말이다.
“흠흠. 그럼 대망의 음반 작업실을 공개합니다.”
제드는 한껏 신이 난 듯 음악 작업실을 소개해 주었다.
과연 이 층의 메인답게 공간도 넓고 다양한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입이 절로 벌어질 만한 곳이다.
그런데 난 별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랄까.
조금 그리웠던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유저들이 특히 우리 OST팀을 좋아해 주고 있습니다.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도 우리가 만든 음악을 좋아해 레전드 오브 챔피언을 시작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죠. 그래서 회사가 매번 든든하게 지원을 해줍니다.”
신뢰를 얻고 있는 부서는 항상 부족하지 않은 지원을 받게 된다.
제드는 귓속말로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밸런스팀은 매번 이사회에게 까이고 있어서 예산도 적다고 하죠. 후후.”
그게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켜 게임을 개판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 앞으로 여기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진행하면 됩니다.”
그때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혜나 누나에게 통역을 받고 있던 멤버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근데 일주일 안에 되나요?”
혜나 누나가 그 질문을 통역해주자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충분합니다. 아!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일주일 안에 앨범을 완성시키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드는 왜 우리를 미국으로 초청했는지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러분이 본사까지 온 이유는, 캐릭터 모델링 때문입니다.”
“모델링이요?”
“네. 여러분의 여러 가지 동작을 모델링해서 게임으로 구현하기 위해서죠. 그리고 몇 가지 점검을 한 뒤에 본격적으로 음악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미팅이랄까요? 나머지는 한국에 돌아가셔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난 부가적으로 설명을 추가했다.
“인터넷으로 서로 교류하며 작업을 할 수도 있지만, 여기 사람들은 멤버들을 직접 보고 싶은 겁니다. 만약 자신들의 기준에 충족하지 않으면 언제든 바꿔 버리려고 말이죠.”
그 말에 멤버들이 흠칫했다.
물론 여기까지 왔는데 멤버 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놓은 채 작업을 하는 건 옳지 않다.
어느 정도 긴장을 하면서 해줘야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겠는가.
“멤버들의 표정을 보니 PD님이 겁이라도 준 모양이군요.”
“네. 대충하면 안 되는 프로젝트니까요. 이건 저들의 데뷔가 걸린 일이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죠. 게임 속 모델로 첫 데뷔를 맞는다라······. 좀 어색한 일이긴 하지만요.”
작업실 구경은 대충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호텔로 가야겠지만, 이왕 온 거 조금이라도 작업을 하고 싶었다.
“누나. 멤버들이랑 같이 가서 통역 좀 해줘. 아마 애니메이션 팀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 응. 너는 여기 있게? 바로 호텔로 안 가고?”
“응. 시간 아깝잖아. 스케쥴도 타이트하고. 빨리 일해야 조금이라도 놀지.”
누나와 멤버들을 보내고 나서 제드는 음반 작업실에 있는 프로듀서들을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
“반가워요. 편하게 존이라고 불러주세요. 장 PD님의 노래는 항상 잘 듣고 있습니다.”
“웬디라고 해요. 개인적으로 장 PD님의 음악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어요.”
프로듀서들과 작업팀 직원들만 20명이 넘었다.
이들 모두 이번 프로젝트에 매달리게 될 예정이다.
“장연욱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방금 막 도착하셨다고 들었는데,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요. 바로 샘플 작업부터 해보죠. 그래야 한국 돌아가서도 일이 편해지니까요.”
“아! 그럼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제드가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이 촉감, 이 공기.
왠지 익숙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아까 전에 데자뷰를 본 것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이 익숙한 기분이 참 어색했다.
거기다 처음 보는 장비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다루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제가 한국에서 만들어 온 샘플곡이 몇 개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오~ 좋죠. 장 PD님의 곡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모두 모여봐.”
총 7개의 곡을 준비해왔고, 최대한 걸그룹스러운 느낌에 맞춰 만들었다.
또한 어디까지나 게임을 배경으로 하는 곡이기 때문에 빠른 비트와 신나는 리듬이 노래의 핵심이었다.
“흠-.”
“으음.”
첫 샘플곡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모두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조금 별로였나?
나는 곧바로 다음 곡을 들려 주었다.
이번에는 걸그룹보다는 게임에 더 치중해서 만든 곡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모두 덤덤한 반응만 보였다.
들려주는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7번째 곡이 묵묵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
모두 침묵을 지킨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해 내가 먼저 물어봤다.
“혹시 노래가 별로였습니까, 제드?”
그러자 제드는 번뜩 정신을 차리며 손을 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정말 엄청난 곡들이었습니다.”
“아무도 말씀을 안 하시기에 제가 이상한 곡을 들고 왔나 해서요.”
“미안합니다. 저희가 보통 노래를 감상할 땐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워요?”
“사실 저희도 샘플곡을 준비해 놓았었는데, 오늘 장 PD님의 곡을 들으니 준비한 샘플곡을 들려 드려야 할지······.”
그런 이유였나.
제드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괜찮습니다. 한번 들어보죠.”
“하하. 이거 부끄럽네요.”
제드가 준비한 곡은 3개였다.
그런데 첫 곡과 두 번째 곡은 별로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EDM 스타일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해 걸그룹 노래라기보다는 그냥 영화 OST나 클럽에서 들을 법한 곡 같다고 해야 할까.
내 얼굴빛을 읽은 것인지 제드는 얼른 세 번째 곡을 틀었다.
“이번 곡은 마음에 드실 겁니다.”
강렬한 드럼 소리와 함께 몰아치는 도입부.
그 첫 도입부를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노래가 듣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 노래가 왠지 익숙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듯한 멜로디와 리듬이었다.
“저··· 어떻습니까?”
제드는 잔뜩 기대한 얼굴이다.
내 입에서 칭찬이 나오기를 바라는 듯보였다.
“제드. 혹시 세 번째 곡은 프로그램으로 돌려 보셨나요?”
“예?”
“그러니까 다른 곡과 겹치는 게 없는지 확인을 해보셨냐는 겁니다.”
표절에 민감한 시대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멜로디를 만들어 놓고 프로그램을 돌려 현재 시중에 나온 곡들 중 자신의 것과 겹치는 것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만일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내놓았다가는 표절 의혹을 받아 곡이 사장될 수도 있다.
그만큼 민감한 것인데, 왠지 이 곡은 내 귀에 너무 익숙하게 들려왔다.
정확하게 무슨 곡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디선가 많이 들은 곡이라는 건 확실했다.
“아뇨. 돌려 보진 않았습니다. 아직은 샘플이라서요. 혹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멜로디인가요?”
“예. 도입부도 그렇고 코러스 부분도 그렇고 어디선가 들어본 멜로디였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가 한번 돌려보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확인차 한번 해주세요. 세 번째 곡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거든요.”
제드는 직원들을 시켜 세 번째 곡을 프로그램으로 돌려 확인 작업을 거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장 PD님.”
“네. 결과는 나왔나요?”
제드는 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곡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다시 프로그램을 돌려봤는데도 멜로디가 겹치는 건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럼 나는 왜 그 곡을 아는 것처럼 느껴졌던 걸까.
단순히 익숙하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나서 다음 음이 뭔지 이미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혹시 어디서 들은 곡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혹 미발표된 곡은 아닐지······. 우리가 쓰고 있는 장비는 전부 최신이고 인터넷에 풀린 곡이라면 무조건 프로그램에 등록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 말씀은 멜로디가 겹치는 곡이 절대 없을 거라는 거군요.”
“네.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나도 더 이상 거기다 대고 할 말이 없었다.
프로그램이 정확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뭔가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괜히 시간만 뺏었네요.”
“아닙니다. 뭐든 확실하게 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좋은 샘플곡들도 주셨으니, 저희가 잘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중에서 좋은 곡들을 선별해 내일 알려드리죠. 오늘은 피곤하실테니 이만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샘플곡들을 듣고 세 번째 곡을 따로 확인하느라 시간만 축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조금 더 많은 걸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예.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나는 작업실을 나와 애니메이션팀에 있는 혜나 누나와 일행을 데리러 갔다.
“꺄하하-!”
애니메이션팀은 바로 밑의 층에 있었는데, 내려가 보니 누나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 연욱아. 벌써 왔어?”
“벌써라니. 4시간이 지났는데.”
“응?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났나? 아! 여기 인사해. 애니메이션팀을 총괄하시는 분이래.”
참 누나도 대단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과 벌써 웃고 떠들 정도로 친해진 모양이다.
그에 반해 멤버들은 영어를 하지 못해서 그런지 많이 굳어 있었다.
“반가워요. 혜나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로렌이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저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나 보네요. 장연욱입니다.”
나는 로렌과 악수를 나누다 또 다시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이 여자와 회사 내에 있는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거기다 더 가관인 건 로렌 다음으로 내게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였다.
“제임스라고 합니다. 다크 스페이스 영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특히 거기 나오는 음악을 가장 좋아합니다.”
“콜린이라고 해요. 혹시 저희 게임은 플레이하고 계십니까? 혹시 티어가······.”
심지어 제임스와 콜린, 이 둘의 얼굴도 친숙했다.
그리고 이 둘을 보면서 또 다른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두 사람과 내가 컴퓨터 게임을 하고 맥주를 나눠 마시는 광경이었다.
거기서 문득 깨달았다.
지금까지 떠오른 수많은 장면들.
이건 단순한 데자뷰가 아니다.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 하는 또 다른 삶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