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98화
“내가 음악의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달 한번씩은 꼭 클래식을 들으러 표를 구하곤 합니다.”
서울대학교 총장 황석현.
젊은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수 생활을 하다 서울대학교 총장이 된 인물이다. 경영학과를 나온 사람인데,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밴드팀을 운영하고 앨범까지 내놨다고 한다.
“그래서 악보를 보는 눈이 아주 조금은 있어요. 그래서 장연욱 씨가 작곡했다는 악보를 보고 느낌이 왔죠. 이걸 우리 학생들이 협주하면 아주 좋은 음색이 나오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내가 이 사람을 마주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창호 교수 때문이었다.
“하하. 역시 총장님께서는 듣는 귀도 매우 밝으시군요.”
이창호 교수가 저렇게 아부도 떨 줄 아는 사람이었나.
하긴. 서울 대학 총장의 권위가 얼마나 높겠는가.
교수들의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자리이니, 이창호 교수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JJ의 노래는 항상 잘 듣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말인데, 그 악보를 우리가 써도 괜찮을까요?”
이미 이창호 교수에게 마음대로 쓰라고 말을 해 두긴 했다만, 총장이 직접 나를 학교로 초대해 확답을 받고자 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막 휘갈겨 쓴 악보거든요. 전혀 다듬어지지도 않았고요. 어느 정도 수정이 필요할 텐데······.”
“뭐, 그거야 지휘자가 알아서 하겠지요. 다듬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지휘자가요?”
“아. 이 교수. 아직 말씀 안 드렸나?”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이창호 교수가 마치 까먹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총장님이 이번 악보를 가지고 네가 직접 지휘해 보는 건 어떠냐고 하셨다.”
“예? 잠시만요. 제가 지휘를 한다고요?”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우리 서울대 학생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이에요. 그들을 데리고 잠깐이나마 지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전 지휘를 배워본 적도 없는데요?”
“그건 이 교수가 옆에서 가르쳐 줄 겁니다. 뭐든 빨리 배운다고 들었는데, 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 금방 할 수 있을 거예요.”
정상인이라면 거절을 하는 게 옳다.
그렇기에 나도 거절을 하려고 했다.
엉성한 실력으로 지휘봉만 휘두르다 우스운 꼴을 당하긴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황석현 총장 말대로 이건 좋은 기회가 아닐까?
“나도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번에 우리 학생들이 협주곡을 하는 걸 듣고 문제점을 바로 잡아줬다죠? 그게 지휘자의 덕목이에요.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걸 듣고 깨달아서 문제를 고치는 것. 그게 지휘자의 할 일이죠.”
그 일 때문에 앙심을 품고 날 물 먹이려고 이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나도 뭔가 얻을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제가 지휘를 맡아 무대를 올리는 대신, 이번에 제가 새로 앨범을 낼 때 서울대에서도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죠?”
“마음에 드는 연주가 나오면 단원들을 앨범 녹음에 참여시키겠다는 겁니다. 제 새 앨범에요.”
“그거야 제 의지보다는 학생들의 의지 아닐까요?”
“학생들도 음악 작업을 할 때 담당 교수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미리 오케이를 해주시면 다른 분들도 알아서 승인해 주실 겁니다.”
음악 대학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조건을 내건 것이다.
총장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생각보다 아는 게 많군요. 좋습니다. 지휘를 맡아 준다면 그 조건을 받아들이죠.”
이로써 나도 얻는 것이 생겼다.
문제는 단원들이다.
“그런데 단원들이 잘 모여 줄까요?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제가 지휘를 한다고 하면 다들 자존심 때문이라도 안 하려 할 텐데요.”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얘기입니다.”
“네?”
“우리 학생들의 학구열은 굉장히 대단하죠. 상대의 나이가 어떻든, 신분이 어떻든 상관없어요. 배울 점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게 예술가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기도 하고요.”
정말 그런가?
만약 나라면 학교가 또 사이코 같은 짓을 한다면서 단원 자리를 내팽개치고 나갈 거 같은데 말이다.
***
[우리 학교 지금 난리남.]
최근 각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서울 대학교에서 벌어진 한 사건 때문이었다.
-JJ의 장연욱 알지? 그 사람이 우리 교수 제자인데, 이번에 자기가 5시간 동안 휘갈겨 썼다는 악보를 가져옴. 근데 그게 화제가 돼서 지금 학생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고 심지어 교수들도 가져갔음.
-악보? 대체 뭔 악보인데. 새 앨범 준비하나?
-아니. 대중 가요 악보가 아니라 무려 오케스트라 협주곡 악보임. 악기마다 악보가 다 달라서 수십 장이 넘음.
-그걸 다섯 시간 만에 만들었다고? 그냥 아무렇게나 음표 써놔도 그것보다는 시간 더 나올 듯.
-다섯 시간은 나도 구라 같긴 한데, 아무튼 악보가 잘 뽑히긴 함.
-주작이네 ㅋㅋㅋ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주작질이야. 나도 음대 다니는데, 다섯 시간 만에 협주곡 하나를 만들었다고? 그리고 그게 서울대에서 화제가 돼? 지랄하지 마라.
장연욱이 만든 협주곡 악보가 서울대 안에서 화제가 됐다는 말이 나왔을 땐 다들 글쓴이가 어그로를 끌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인증글이 여기저기서 올라왔다
[장연욱 서울대 악보 사건, 주작 아님. 인증샷 있음.]
-학생증 보이지? 서울대에서 음악 하고 있는데, 이번에 추천글 올라간 거 주작 아니야. 우리 학교에서 그 악보 모르는 사람 없음. 심지어 음악 쪽 아닌 사람들도 알고 있더라. 교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니. 이게 주작이 아니라고? ㅋㅋㅋ
-시발 뭘 어떻게 하면 5시간 만에 협주곡 악보를 만드냐? 거기다 서울대에서 인정할 정도면 진짜 잘 뽑혔다는 거잖아.
주작글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그 악보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내가 피아노로 조금 쳐봤는데, 진짜 잘 만든 악보임. 그리고 다섯 시간 만에 만들었다는 게 맞는 말 같기도 함. 그 자리에서 휘갈겨 쓴 다음 다듬지도 않고 보낸 게 티가 남. 그런데도 이런 곡이 뽑혔다는 건 그냥 사람이 아니라는 거임
-악보 좀 보여 주면 안 돼?
-궁금하다. 악보 사진이라도 올려줘
-나도 진짜 궁금함. 파일 좀 올려 봐.
-장연욱 SNS가서 요청해 보셈. 우리가 마음대로 올리면 저작권 때문에 걸릴 수도 있음.
열렬한 성화에 악보를 보여 달라는 요청글이 SNS에 쇄도하자 연욱은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별도로 파일을 올려 주었다.
-여기 사이트에는 파일 올릴 수가 없어서 링크 남김. 한번 봐보셈. 장연욱이 SNS로 직접 올려 준 파일이다.
-오 ㄱㅅㄱㅅ
-악보 볼 줄 모르지만, 일단 다운 받는다.
-ㅋㅋㅋ악보 코인 탑승
악보가 인터넷상으로 퍼져 나가면서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감평을 내놓기 시작했다.
[장연욱이 쓴 악보 평가 한 줄 요약]
[오늘부로 음악 접는다.]
-ㅋㅋㅋㅋㅋㅋ
-그 정도임? ㅋㅋㅋㅋㅋ
-그냥 자괴감 듬. 중학생이 대충 휘갈겨도 저런 악보가 나오는데 나는······.
-앗! 아아···.
[난 악보 별로던데?]
-사실 악보 볼 줄 모름
-야이 ㅋㅋㅋ
-나도 방금 봤는데, 진짜 잘 뽑았더라. 영화 OST에 써도 될 듯
커뮤니티에서 퍼져 나간 악보는 음악 방송을 하는 스트리머들에게도 넘어갔다.
그들은 누가 먼저 영상을 올리기 전에 빠르게 리뷰를 했다.
“제가 대충 피아노로 들려드릴게요. 들어보시면 알 겁니다. 진짜 잘 만든 곡이에요.”
“오늘은 인터넷에서 화제 중인 악보를 하나 들려드릴까 합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플롯 등등.
여러 BJ들이 다양한 악기들로 악보를 연주해 영상을 올리는 등, 뉴튜브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그렇게 잠깐 화제가 되다 사람들 기억 속에 사라지나 싶었는데, 어느 날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이 다시 한번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었다.
[커뮤니티에서 화제된 장연욱의 협주곡, 서울대에서 정식 공연하기로 결정!]
[장연욱 이번에는 지휘자 도전?]
[중학생이 지휘를? 서울대의 과감한 결정.]
* * *
“으하하! 이놈은 진짜 귀신 같은 놈이라니깐? 조금이라도 식었다 싶으면 어떻게든 다시 대중의 관심을 끌어와요.”
오늘 하루도 강 대표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냥 감평만 받으려 한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네요.”
“이게 다 스타성이라는 거지. 뭘 해도 반짝이는 사람이 있잖냐. 그런데 그거 진짜야?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앨범 녹음에 쓰겠다는 거.”
“아직 제대로 결정한 일은 아니에요. 일단 한번 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데려오려고요.”
무작정 그들을 앨범 녹음에 쓸 생각은 없다.
나와 합이 잘 맞고, 그들의 실력이 내 기준에 충족하면 그때 데려와 쓸 것이다.
거기다 이번 일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대중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
만약 삐긋 실수라도 해서 공연을 엉망으로 만들면 저들의 감탄과 찬사가 곧 날카로운 비난의 화살이 되어 날아오게 될 것이다.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근데 혜나도 같이 가냐?”
“우리 동생이 지휘하는 거 보고 싶어서요. 엄청 멋있을 거 같기도 하고, 궁금하잖아요.”
“음-. 가끔 보면 혜나가 꼭 연욱이의 광팬 같단 말이지.”
“호호. 제가 아니면 누가 동생을 챙기겠어요.”
“좋아. 둘이 같이 다녀와. 매니저가 데려다줄 거야.”
소속사에 잠깐 들려서 강 대표를 만난 뒤에 우린 서울 대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누나는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신이 난 모양이다.
“나 서울대는 처음 와 봐.”
“누나. 솔직히 말해 봐. 그냥 서울대 구경이 하고 싶었던 거지?”
“응.”
누나는 솔직하게 대답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교잖아. 당연히 구경하고 싶었지. 그리고 네가 지휘하는 것도 보고 싶었고.”
“분위기가 안 좋을 수도 있어. 어쩌면 단원들이 한 명도 안 올 수도 있고.”
“응? 왜?”
“누나가 입장 바꿔서 생각해봐. 중학생밖에 안 되는 놈이 지휘자랍시고 온다면 누가 반겨 주겠어? 누가 봐도 그 사람들이 나보다 배운 게 더 많을 텐데 말이야.”
“그럼 어떡해?”
“만약 단원들이 전부 보이콧해 버리면 이건 그냥 엎는 거지.”
최악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음?”
그런데 강당 위에는 30명의 단원이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미리 인원 몇 명이 나올 거라는 얘기는 듣긴 했지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자리를 채운 것이다.
“왔냐?”
기다리고 있던 이창호 교수가 내게 다가왔다.
난 귓속말로 말했다.
“다 모인 거예요?”
“그래. 다 모였어. 아니. 더 모인 거지. 원래는 30명만 모이기로 했는데 10명이 더 추가됐다. 총 40명이야. 다들 여기 오케스트라 들어오고 싶다고 난리다. 그중에서 추려서 10명만 더 넣은 거고.”
이것이 인터넷의 힘인가.
나는 찬찬히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모이긴 했지만, 모두가 날 반기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어디 한번 네 실력 좀 보자는 눈빛이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도 그다지 유한 눈길은 아니었다.
첫날부터 팽팽한 기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