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97화
-아오 떨려.
-괜히 오자고 했나.
-태우가 저 정도로 까일 정도면 대체 난 얼마나 까여야 한다는 거야?
강의실에 모여 이창호 교수의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은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이 교수의 피드백 강도가 높아 보였다.
작곡과에서 항상 다른 교수들에게 칭찬만 받던 최태우가 저렇게 박살이 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로 인해 장내 분위기가 냉엄해지고, 모두 눈치를 보기 바빴다.
아예 겁을 먹고 도망가는 학생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창호 교수는 장난기를 뺀 눈으로 가차 없이 학생들을 채찍질했다.
저 험악하고 감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이창호 교수가 갑자기 컴퓨터 화면을 보며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되었을까.
피드백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학생이 참다못해 그를 불렀다.
“저 교수님.”
“음? 아- 미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창호 교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스크린에 화면을 띄워 학생들에게 악보를 보여 주었다.
“피드백은 잠깐 여기서 중단하고, 다들 이거 한번 봐 볼까?”
빼곡하게 음표가 적혀 있는 악보.
오케스트라 협주곡이었다.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바순, 플루트 등등. 악보만 무려 수십 장이야.”
악기마다 맞춰진 악보이다 보니 이것들을 한꺼번에 스크린으로 보여 주는 건 무리가 있었다.
“이렇게 하지. 지금 다들 나한테 메일 주소 보내. 이 악보들 싹 보내 줄 테니까. 다들 테블릿 하나씩은 들고 다니잖아?”
대다수 학생들이 테블릿을 들고 다니는 시대다.
워낙 편리한 기능이 많다 보니, 필수적으로 갖고 다니고 있다.
요즘에는 학생할인이 끼어있는 프로모션이 많아 대부분의 학생이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
이창호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장연욱이 보낸 악보를 오늘 모인 학생들에게 뿌렸다.
“다들 악보를 보고 짧게 감상평을 내놓아 봐. 분명 이 안에서 배울 게 있을 거야.”
갑작스러운 감평 지시에 당황하기도 하고 불만도 있었지만, 악보를 본 순간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과감한 도입부와 휘몰아치는 중반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마무리하는 후반부의 반전 같은 역습.
다른 음대생들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재능과 교육을 받고 있던 서울대 학생들은 이 악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교수님. 혹시 어디 영화에 쓰이는 협주곡인가요?”
“아니.”
“그러면 교수님이 작곡하신 건가요?”
“왜? 내가 작곡한 거 같나? 내가 아니라 너희랑 똑같은 학생이 작곡한 걸 수도 있잖아.”
“그렇다고 보기에는 악보가 너무 수준급이라서요. 저희도 오케스트라 협주곡 하나 만들라고 하면 몇 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어야 할 정도인데······.”
저 말이 맞다.
일반 솔로곡이라면 혼자서 대충 만들 수 있지만, 협주곡으로 넘어가는 순간 일이 복잡해진다.
협주곡은 말 그대로 여러 악기가 협주해야 하는 것이라, 각 악기에 맞춘 악보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져 제대로 된 연주가 힘들어지게 된다.
작곡에서는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이 재능 넘치는 젊은이들이 협주곡은 아직 혼자 만들기 어렵다고 조를 짜서 작업하겠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만든 곡이 아니야. 그리고 유명 작곡가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럼 누가······.”
“그것까지는 알 필요 없어. 너희들이 이 악보를 보고 느낀 점을 듣고 싶은데? 솔직하게 말해 봐.”
솔직한 감평이라.
“좀 급하게 만든 감이 없지 않아 있네요.”
“그래?”
“네. 막 뽑아낸 곡을 다듬지 않고 날로 보낸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평을 하던 학생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든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의 곡입니다. 정말 잘 만들어졌어요. 아이디어도 매우 좋고요.”
아마 이 곡을 졸업 작품에 냈으면 모든 교수가 만장일치로 합격점을 줬을 것이다.
그만큼 잘 빠진 곡이었다.
“사실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이긴 합니다만, 곡 자체가 훌륭해서 그냥 다듬지 않고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왠지 이 곡을 보고 나니, 제 곡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학생들도 이창호 교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곡이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그걸 차치하고도 잘 만들어진 곡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부를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표정과 어투를 보니 그런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교수님. 이 악보를 가져가서 공부해도 되겠습니까?”
“저도 참고해 보고 싶은데요.”
학생들의 반응이 뜨겁자 이창호 교수도 당황했다.
“아. 내가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한데, 아마 그쪽에서도 오케이할 거야. 그러니까 배울 게 있으면 그 악보를 보고 배워 오도록 해.”
이쯤 되면 그들도 슬슬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교수님. 대체 누가 만든 곡이기에 그렇습니까?”
“다른 곳에 공개된 곡은 정말 아니라는 거죠?”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신적 충격이 장난 아닐 텐데.
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마주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 아니던가.
이창호 교수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 제자가 만든 거야.”
“네?”
“다들 알잖아. 장연욱이라고. 아까 나한테 보냈더라고. 자기가 5시간 정도 공들여서 만든 곡이라면서.”
긴 적막이 강의실 안에 가득했다.
모두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이창호 교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반응이 왜들 그래?”
“교, 교수님. 이걸 정말 교수님 제자가 만들었다고요?”
“그렇다니깐?”
“이걸 중학생이 만들어요? 거기다 5시간? 이건 너무 거짓말이 심하신 거 같은······.”
“야.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희들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
어지간히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오 단단히 해. 음악의 세계는 이처럼 녹록지 않아. 세계에는 이보다 더한 괴물들로 넘쳐난다. 너희들이 정말 큰 꿈을 품고 있다면 그런 놈들이랑 경쟁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더 노력해서 본인의 기량을 뛰어넘도록.”
학생들 낯빛을 보니 오늘 피드백을 주기에는 그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을 놔두고 강의실을 나와 교수실로 향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다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계에는 이보다 더한 괴물들이 넘쳐난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만한 개소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아마 세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재능의 크기가 한국에 있는 것은 아닐까?
* * *
이창호 교수에게 메일을 보낸 지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아직 별다른 말이 없기에 그냥 씹은 건지, 아니면 너무 형편없어서 뭐라 욕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지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마지막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삼촌이 있는 작업실로 가려 했다.
딱히 삼촌이랑 협업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내 집처럼 편안한 곳이 되어 버렸다.
이거 단단히 삼촌한테 코가 꿰인 거 같은데.
“연욱아. 오늘 마지막 촬영인데,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지 그래?”
“아니요. 괜찮아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정성우 배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조만간 촬영 종료 기념으로 회식을 한다는데, 딱히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형. 삼촌······ 아니. 이용재 작곡가님 작업실로 갈게요.”
“응. 그래. 근데 요즘 작업실 자주 가네? 혹시 차기 앨범 준비?”
“이제 슬슬 준비해야죠.”
“오~ 기대되는데. 생각해 둔 곡들은 있고?”
“전 항상 음악 생각을 많이 해요. 때때로 영감이 들면 노트에 적어 놓기도 하고요. 이미 대충 작곡해 놓은 곡만 50개가 넘어요.”
매니저 형은 기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50곡이지, 사실 거기서 몇 개나 건질지는 모르겠다.
엄마 아빠한테 조금 들려줬을 때는 다 마음에 든다고 하셨지만 내 귀에 만족스럽지 않으면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해도 대중에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 완벽주의가 된 느낌?
이러면 인생이 참 피곤할 텐데 말이다.
“음?”
그때 온 전화.
이창호 교수였다.
이 양반이 오늘 드디어 나한테 욕을 한 바가지 날릴 셈인가.
“네, 교수님.”
- 지금 어디냐?
“작업실 가고 있어요. 차기 앨범 준비해야 할 거 같아서.”
- 음. 그래?
이창호 교수답지 않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 아니.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게 사실이긴 하죠.”
- 야!
소리를 한번 버럭 지르다가도 다시 목소리의 힘이 약해졌다.
- 흠흠. 저기 거······ 뭐냐. 네가 저번에 나한테 보낸 곡 있잖아?
“네. 완전 별로였나 봐요.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신 줄 알았어요.”
- 뭐? 별로? 그걸 별로라고 하면 내 눈이 옹이구멍인 거지.
“그래요? 괜찮았어요?”
- 그래. 근데 그거 정말 5시간 만에 쓴 거냐?
“네.”
- 음. 그래. 그렇구나······. 그랬던 거였어.
자꾸만 말을 질질 끄는 것이 이상했다.
“교수님. 왜 그러시는데요? 말씀을 해 보세요.”
그러자 이창호 교수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후- 그래. 내가 사실 네가 보낸 악보를 학생들한테 보여줬거든.
“네?! 아니. 쪽팔리게 제 악보를 왜······.”
서울대 학생들과 같은 재능러들에게 내 악보를?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도 그냥 교육 목적으로 보여 준 거야. 네가 워낙 잘 만들기도 해서. 미리 허락 못 구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이게 학생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교수들에게까지 악보가 들어갔나 봐.”
“그게 대체 왜 퍼져요?”
“내가 말했잖아. 잘 만든 곡이라고. 또 워낙 신선하기도 했어. 귀를 확 사로잡는 도입부도 그렇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후반부도 그렇고. 거기다 아직 중학생에 불과한 내 제자가 만들었다는 게 또 다른 포인트였겠지. 아마 너나 나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한 사람도 있을 테고, 순수하게 감상하려고 구한 사람도 있겠지.”
어차피 감평 받으려고 보낸 악보이니, 이창호 교수가 그걸 어떻게 쓰든 상관은 없었다. 내 기준으로는 딱히 잘 만들어진 곡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악보가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 퍼져나가 다른 교수들 손에도 들어갔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뭐, 거기까진 괜찮았어. 다들 평이 좋더라고. 어떻게 중학생 머리에서 이런 곡이 나왔냐면서. 그런데 어떤 교수가 이상한 제안을 하는 바람에······.”
“네?”
“학생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곡이고, 교수들도 평가가 좋으니 이번에 있는 학교 축제에서 써도 괜찮냐고 그러더라고.”
“설마 오케이하신 건 아니죠? 음대 축제에서 쓰이는 곡은 사실상 평가에도 들어가는 거잖아요.”
음악 대학에서 축제 때 학생들끼리 오케스트라를 꾸려 여러 곡을 무대에 올린다.
말이 행사지, 사실상 평가였다.
학기 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평가하는. 축제를 가장한 시험이라는 것이다.
“나도 안 된다고 하려고 했지. 그런데 총장님이 악보를 보더니 어떤 음색이 뽑힐지 궁금하다면서 추진해 보자고 하셔서······.”
반쯤 장난으로 보낸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