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96화
“음······.”
이용재는 아까부터 심각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다 악보를 끄적이는 장연욱에게 슬쩍 다가가 보았다.
악보에 휘갈긴 것들을 보니, 흔한 대중음악을 만들어내는 것 같진 않았다.
“무슨 곡 쓰는 거냐?”
“교향곡이요.”
“아~ 교향······ 뭐, 뭘 쓴다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협주곡 같은 거요.”
당연히 이용재도 그게 뭔지는 알고 있다.
“갑자기 클래식을 작곡한다고?”
“말이 교향곡이지, 오케스트라 협주곡은 지금도 많이 나오잖아요. 영화 ost 제작할 때도 그렇고, 드라마 ost 제작할 때도 가끔 나오고요. 게임에서도 제일 많이 나오는 게 오케스트라 곡인데요?”
클래식은 올드하고 더 이상 발전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 클래식처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웅장한 음악은 지금도 끊임없이 나오는 중이었다.
이용재도 한때 그러한 류의 곡에 도전장을 내민 적이 있었으나, 대중음악과는 달리 만드는 과정이 복잡해 결국 포기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이 꼬마 녀석이 그 어려운 걸 해내려 하고 있다.
자신조차 중간에 백기를 들고 포기를 해 버린 일을 말이다.
“그래서 연습 삼아 한번 만들어 보고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쌓다 보면 다음 앨범 작업할 때 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거 같아서요.”
“좋은 경험이 되긴 하겠다만, 쉽진 않을걸.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고?”
“대충은요. 근데 삼촌은 그런 느낌 아세요? 눈을 감으면 악기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까부터 눈을 감고 뭘 하고 있나 했더니,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또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을 감으면 악기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정신병이 아니냐고 조롱할지 모르겠지만, 이용재처럼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닿고 싶은, 아니. 그저 상상으로 치부한 음악적 경지일지 모르겠다.
악기들에 생명을 부여해 마음대로 음악을 뽑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직접 악기를 연주하거나, 다른 전문가를 시켜 연주하는 것을 지켜보며 영감을 얻곤 한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러한 단계를 한번에 건너뛰어 본인의 상상만으로 여러 악기의 소리를 뽑아내고 있는 듯 보였다.
이용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작업임은 틀림없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1분 단위로 힐끗거리며 장연욱이 곡을 만들어내는 것을 관찰했지만, 연욱은 이용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무관심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곡을 써 내려가는 데에 몰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으으-”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들고 있던 펜을 던져두고 연욱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응? 오늘은 그만하게?”
“네. 이 정도면 될 거 같아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다시 이어서 한다는 건 줄로만 알았다.
“컴퓨터에 옮겨 적어서 이창호 교수님한테 메일을 보내놓으려고요.”
“설마, 곡을 다 썼다고? 그 짧은 시간에?”
“5시간 정도 매달린 거 같은데요?”
“야. 오케스트라 협주곡이 5시간 만에 어떻게 뚝딱 나와? 너무 대충 쓴 거 아니야?”
“그런가······. 한번 봐주실래요?”
장연욱이 수북한 종이 뭉텅이를 건넸다.
뭔가 끄적이는 것 같더니, 어느새 이렇게 많은 악보를 만들어냈다.
“총 7가지의 악기들이 나오는 거라서 각자 맞는 악보들을 만들어 봤어요”
이제 바로 협주곡의 어려운 점이다.
대중음악은 악보 하나로 정리가 되지만, 협주곡은 각 악기에 맞는 악보를 준비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보를 보다 헷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제 이 많은 걸 다 썼대.”
대충 휘갈겨 쓴 것처럼 보이는 악보들.
아마 미완성인 듯하다.
이용재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펴보았다.
그런데-
“······?”
악보에 적힌 음표를 따라 머릿속에서 음을 재생시키고 있던 이용재의 미간이 조금씩 좁혀졌다. 그냥 대충 끄적인 악보라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는 또렷하게 음악이 들어오고 있었다.
감미로운 바이올린에 이어 플롯이 그 뒤를 치고 들어온다. 바순이 전체적인 무게를 잡아주고 모두가 잠시 소리를 막아 둘 때 피아노가 남은 공간을 채워 넣는다.
선명하게 악보 전체의 연주를 상상하긴 어렵지만, 곡의 웅장함이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때요?”
이용재는 허탈한 얼굴로 악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욱과 눈을 마주쳤다.
참 보면 볼수록 사람을 놀라게 하고 동시에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재능이다.
누가 신은 공평하다고 했는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거대한 벽을 황망하게 바라만 보게 될 것이다.
“이걸 오늘 만든 거라고?”
“네. 시험 삼아 만들어 봤어요. 좀 많이 부족하죠?”
부족하다고?
물론, 전체적으로 다듬어야 하겠지만 고작 다섯 시간 만에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줄곧 생각만 해 오다가 이제야 악보에 적어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이걸 교수님한테 보낸다고?”
“네. 좀 더 다듬어서 보낼까요?”
“아니야. 그냥 한번 보내 봐. 다섯 시간 동안 매달려서 만들었다는 얘기도 빼놓지 말고.”
계속 헛웃음만 나오는 이용재였다.
중학생이 이걸 만들었다는 걸 알면 다들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그냥 보내 보라고 한 것이었다.
이창호 교수라는 양반이 과연 이걸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 * *
“여기는 네가 봐도 너무 오바한 거 같지 않냐?”
“죄, 죄송합니다.”
“저번에도 똑같은 얘기를 한 거 같은데.”
푸근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저렇게 눈을 치켜뜨면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창호 교수의 피드백을 받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쾅쾅 때린다고 해서 곡이 웅장해지는 게 아니야. 그냥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지. 기본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면서 어느 한 포인트에 강점을 줘야지, 이렇게 빌드업도 없이 때리기만 하는 건 그냥 네가 곡을 만드는 공식 자체를 모르는 거야.”
“네, 죄송합니다.”
“저번에도 죄송하다는 말 백 번 하다가 결국 또 도돌이표 됐잖아. 이럴 거면 나한테 피드백 받지 말고 다른 교수 찾아 가. 네 담당 교수도 있을 거 아니냐?”
담당 교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드백을 구하는 학생들을 쳐내지 않는 것이 이창호 교수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소프트하게 피드백을 주지 않았다.
문제점이 있으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장점이 있으면 칭찬을 해주는 것이 이창호 교수의 교육 방법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것처럼, 이런 이창호 교수의 교육론이 싫으면 그냥 피드백을 받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많은 학생이 그에게 피드백 요청을 하며 끊임없이 교수실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받는 날카로운 조언이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계속 이런 식이면 두 번 다시 안 볼 줄 알아.”
“네, 다음에는 꼭 잘해 오겠습니다.”
피드백이 끝난 학생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창호 교수가 피드백을 주는 방법이 좀 특이하긴 했는데, 하도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다 보니, 이창호 교수는 아예 강의실 하나를 빌려 오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시간을 정해 놓고 피드백을 주고 있었다.
“자, 다음.”
양파처럼 까이면서 피드백을 받는 친구를 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급하락해 강의실을 나가 버리는 학생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강의실을 빌려 피드백을 원하는 학생들을 한곳에 모으는 건 어지간한 강심장 아니면 도전하지도 말라는 이창호 교수의 경고이기도 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학생들이 가져오는 악보를 살펴보기도 하고, 혹은 피아노 연주를 듣기도 하던 이창호 교수는 의외의 번호로 온 문자에 잠시 하던 일을 멈췄다.
“이놈이 웬일이지?”
하늘 같은 스승님에게 문자는커녕 전화도 잘 하지 않는 놈이 오늘은 무슨 일인지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스승님.]
첫 문단의 시작은 스승님.
장연욱 이놈이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쓰는 호칭이다.
[오케스트라 협주곡을 만들어 메일로 보내 놓았습니다.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제자는 이만 물러갑니다.]
“뜬금없이 협주곡?”
저번에 학생들이 연주하는 것을 보고 영감이라도 생겼나?
보통 때라면 나중에 확인을 했겠지만, 문자를 준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이창호 교수는 이 호기심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미안한데, 잠깐만. 내가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는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일함을 확인해 보았다.
[5시간 동안 열심히 만든 악보입니다. 간단하게 피드백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시간? 이놈이 놀리는 건가.
5시간이면 그냥 발로 만든 수준 아닌가?
여기 학생들도 촉박한 과제 기한을 맞추기 위해 하루 남겨두고 곡을 휘갈겨 쓸 때가 많다. 그런 걸 두고 발로 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런데 솔로곡도 아니고 협주곡을 5시간밖에 소요하지 않았다?
아직 협주곡 작곡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대중 가요처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갑자기 흥미가 팍 식어 버리는 기분이다.
“이상하게 만들기만 했어 봐라. 오늘 찾아가서 가만 안 놔둔다.”
협주곡 작곡에 대한 A부터 Z까지 자리에 앉혀 놓고 가르쳐 놓을 생각이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강제로 버티는 장연욱의 괴로운 표정을 떠올리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는 악보 파일을 열고 나열된 음표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음- 시작 부분은 나쁘지 않아.”
대중 가요를 만들어 온 짬이 있어서 그런지 시작 부분은 과감했다. 하지만 과감함만 내세워 모험하기에는 협주곡이 만만치 않다.
보통 이렇게 과감한 시작을 넣게 되면 중반에 가서 곡 전체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음음. 중반 부터는 아마 엉망······ 이 아니잖아?”
그런데 초반에 과감하기 짝이 없는 스타트에 이어 중반부터는 음표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강한 리듬감에 동반되어 있는 음표가 빈 곳 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
부정적인 시선으로 악보를 보고 있던 이창호 교수는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줘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하-!”
후반부에 가서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초반에 과감함이 중반부에는 빠르게 휘몰아치는 리듬으로 변했고, 후반에는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잔잔한 음이 깔렸다.
보통 잔잔한 음이 초반부에 나와 중반부의 힘을 실어 줘야 하는 게 맞다. 그래야 곡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곡은 그런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대관절 어떤 마법을 썼기에 이런 곡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거기다 5시간?
“어디서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이창호 교수는 지금이라도 장연욱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스승과 제자의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