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94화
시건방지고 개념도 없으며 음악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쏟아부은 노력에 대해 티끌만큼도 모를 놈.
단연코 이건 석태훈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판을 깔아 놓은 것이 이창호 교수라고는 하지만, 뻔뻔하게 그 판 위에서 부유하고 있는 건 오롯이 저놈의 의지였다.
치기가 올라오고, 부아가 치밀어 올라 애써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자꾸 일그러지다 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 어디 한번 지껄여 봐라.
네 알량한 음악적 지식만 드러날 뿐이니 말이다.
여기 학생들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기보다는, 궁금한 것이 있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끝없이 교수를 괴롭히듯 질문을 던진다.
학창 시절 괴짜라고 불리는 것들만 한데 모아 둔 곳이니, 너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순간 이들의 날카로운 이빨이 자비 없이 물어뜯을 것이다.
“그리고 제 기준으로 38초쯤. 악보를 보니······ 음. 15번째 마디네요. 이곳 역시 화음이 서로 맞지 않고 엇나가는 게 들렸습니다. 아마 그 문제는 바이올린의 문제일 텐데-”
그런데 석태훈은 아직까지 한 마디의 반박도 못 하고 있었다.
놈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대며 감히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했다.
망설임 따위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 단호함.
“두 분의 연습이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기량의 차이인 건지······. 저는 연습량의 차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분명 10명의 바이올린 연주자분 중 제가 말하는 두 분이 누군지 스스로 잘 아실 거라 봅니다.”
말투도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저런 모욕을 듣고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당연할 만큼 말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적을 받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움찔거리며 은연중에 범인 찾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눈에 띄게 얼굴이 붉어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장연욱이 말한 그 범인들 같았다.
“하지만 비록 연습이 부족했다고 해도 여기서 충분히 다듬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가리키는 부분만 다시 연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 처음 연주했을 때보다는 조금 느린 템포로 해 주시고, 제가 앞서 언급했던 두 분은 악보를 똑바로 보고 연주해 주시길 바랍니다.”
얼떨결에 단원들 모두 악기를 들었다.
잠시 내려 두었던 지휘봉을 무의식적으로 드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석태훈은 허탈한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어느새 저놈이 주도권을 확 잡아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단원들이 전부 저놈 손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들은 뭔가에 홀린 듯, 장연욱이 가리키는 마디를 연주해 보았다.
“······?”
달라져봤자 크게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느냐 싶었는데, 석태훈은 방금 전 연주를 듣고 몸을 들썩였다.
달라졌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다고는 콕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나, 첫 연주 때보다 훨씬 더 정돈된 연주가 나왔다.
모두가 어리둥절할 때 장연욱이 말했다.
“연주자들은 각자의 버릇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고스란히 악보에 묻어 나오는 것이죠. 만약 솔로로 연주를 하는 거였다면 그 버릇이 악보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졌을 겁니다. 조금 더··· 아름다운 음색을 냈을 테고요.”
연주자의 버릇.
장연욱은 그렇게 표현을 했지만, 음대생들과 현재 무대에서 뛰고 있는 연주자들은 그것이 본인만의 해석이라고 풀이한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이 연주하고 똑같은 음색을 낸다면 음악이 이렇게 발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각자의 플레이 스타일이 존재하고, 그것이 곧 곡에 대한 해석으로 전염되기 때문에 다채로운 연주자들이 세상에 등장하게 됐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솔로가 아닙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이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개인의 버릇, 그러니까 개인의 해석이 이곳에 담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직 본인의 해석을 담을 수 있는 건 지휘자뿐입니다.”
단원들 모두 침묵을 지킨 채 장연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목소리와 풍겨 나오는 위압적인 무언가가 귀와 눈을 동시에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연주가 처음 것과 달라진 이유는 제 말을 의식하며 악보를 똑바로 보고 그 악보가 요구한 대로, 지휘자가 원하는 대로 연주했기 때문입니다.”
석태훈도 본의 아니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게 되었다.
음색이 달라지게 된 건 어찌 보면 하찮기 그지없는 원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사소한 것을 놓치기 쉽다.
일전에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천재는 그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는다고 말이다.
“아마 이건 연습을 하는 내내 고질적으로 다가올 겁니다. 그래서 유능한 지휘자는 해당 부분을 고치고자 의도적으로 같은 마디만 맹연습을 시킨다고 들었습니다.”
석태훈은 거기서 한 번 더 뜨끔했다.
이건 자기한테 하는 말이지 않은가.
“자, 그럼 이 부분은 넘어가고 이제 악보 다음 장을 보시면-.”
그 외에도 장연욱은 거침없이 악보를 넘겨 가며 문제가 됐던 부분을 하나씩 짚어 주었다.
신랄하게 비판하기보다는, 어떤 악기가 무슨 문제점을 일으켰는지를 정확히 지적해 주었으며, 거기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악보가 한 장씩 계속해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단원들은 의문이 생겼다.
“저기 잠깐만요.”
“네?”
“저희가 연주하는 걸 딱 한 번만 들으셨잖아요.”
나이가 한참 어리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 공손한 존대가 절로 나왔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고작 한번 들은 걸로 괜찮으세요?”
“네.”
“설마 딱 한 번 듣고 다 외웠다는 거예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장연욱을 보고 단원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사람인가, 아니면 괴물인가 싶어 하는 눈동자도 섞여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듣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연주는 일정하지가 않아요. 회차를 거듭할수록 달라진다는 것이죠. 오케스트라에 있어서 굉장히 안 좋은 점입니다. 물론, 아직 완성 단계에 이르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제라도 문제점을 알았으니 일정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하셔야 할 겁니다.”
모두를 숙연해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특히 석태훈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
화가 나서?
아니다.
화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다.
지금은 부끄러움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뭐, 저보다는 여러분이 사실 그 문제점을 더 잘 알고 있으셨겠지만.”
일반 대학이 아닌, 대한민국에서는 최고라 자부하는 서울 음악 대학의 학생들이다.
어릴 때부터 온갖 음악 교육을 받으며 각자의 꿈을 품고 올라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중학생도 알고 있는 문제점을 몰랐을까?
아니.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고치지 않은 건 그냥 쉬쉬하며 대충대충 넘어가려 했었기 때문이다.
매너리즘.
그 어떤 직종이든 누구나 빠질 수밖에 없는 그 지독한 구렁텅이.
이들도 그 안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음악에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의 마음가짐 아닐까요? 진지하게 그 음악에 임하느냐, 아니냐가 연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교수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저 어린놈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과도한 과제와 전공과목들 속에 피로함이 쌓이면 사람은 자연스레 의욕을 잃게 된다.
그것이 연주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
더군다나 이건 오케스트라다.
여기 있는 모든 단원이 똑같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무기력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면 그나마 열정의 불씨가 남아 있던 사람도 지칠 수밖에 없다.
“제가 문제점을 제시하는 건 결국 형식상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여러분의 실력이라면 무엇이 문제인지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전 그냥 여러분이 못 본 척하는 걸 강제로 끌어올 뿐입니다.”
말을 끝내고 장연욱은 묵묵히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에 따라 단원들도 진지하게 뒤를 따라 주었다.
***
석태훈은 슬쩍 단원들을 살펴보았다.
장연욱이 입을 열기 전까지 모두 적의가 가득한 눈동자였다. 또한 이창호 교수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저들 눈에 적개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
매너리즘에 빠져 잃고 있었던 의욕이 일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부끄러웠다.
지휘자로서 마땅히 단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무기력한 그들을 이끌어와 다시금 열정적으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지휘자라는 사람이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나태함을 보였으니, 스스로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러려고 원대한 꿈을 품고 이 학교까지 왔던가.
이곳에 발을 들이면서 바라보았던 그 목표.
언제부터인가 그 목표가 흐릿해져 더는 바라보는 것도 그만둔 듯했다.
“주제 넘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저도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감히 여러분의 연주에 토를 달고 지적질을 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꾹 참고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신없이 피드백을 듣다 보니 시간이 1시간이나 흘렀다.
단원들은 장연욱이 건네는 정중한 사과를 들으며 양심에 가책까지 느껴졌다.
사과를 해야 하는 건 장연욱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음. 고생했다. 먼저 교수실에 가 있을래?”
“네.”
이창호 교수는 장연욱이 강당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공부가 좀 됐나? 아니. 자네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나?”
“······.”
“내 제자 자랑하려고 데려온 거 아니야. 세상 사람들 모두 저놈 잘났다는 거 다 알고 있는데, 굳이 여기 와서 자랑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난 자네들에게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창호 교수가 보여 주려던 현실.
그것이 뭔지 단원들도 뼈저리게 느꼈다.
“세상은 넓다. 그리고 너희들의 상상을 벗어나는 괴물들도 많다. 난 너희들이 정확히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세계 무대를 목표로 한다면 연욱이 정도의 괴물들이 차고 넘친다는 걸 알아야 해.”
그러면서 이창호 교수는 생각했다.
장연욱만큼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놈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라고.
하지만 지금은 단원들의 열의를 불태울 때다. 아무렴 어떤가?
“너희 그릇을 깨달으라는 소리가 아니야. 그릇이 작은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이 학교로 오지도 못했어. 너희는 성장 가능성이 엄청나기 때문에 여길 들어올 수 있었던 거야. 방금 연욱이가 그랬지? 너희들의 문제점은 너희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그것을 그냥 무시하는 것뿐이라고. 즉, 중요한 건 너희들의 의지뿐이다.”
이창호 교수도 할 말을 마치고 강당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끝없이 노력해. 어차피 길은 열려 있고, 남들에게 없는 재능도 너희들에게 있어. 그런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멈춰 있기만 하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