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92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게 다냐?”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이창호 교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집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말초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거 얼마 안 되는 겁니다만, 제가 1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벌어온······.”
그러자 이창호 교수가 조소를 날렸다.
“뇌물?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장난을.”
“뇌물이 아니라 레슨비죠.”
“시끄러워.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는 거 다 알아.”
“아닌데요?”
난 주머니에 있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의 두께를 보고 이창호 교수가 그제야 내 등을 찰싹 때렸다.
“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누가 그딴 돈 받는데?!”
“장난이에요, 장난! 그냥 천원짜리만 잔뜩 넣어 둔 거예요.”
“뭐? 장난? 그럼 더 맞아야지. 지고하고 하나밖에 없는 스승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그따위 장난을 감히!”
말은 천원짜리라고 했지만, 사실은 오만원짜리가 가득 들어 있는 진짜 봉투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랫동안 스승의 부름을 연예 활동이라는 이유로 무시한 사과와 동시에 지금까지 무상으로 나를 교육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가끔 저 양반이 진짜 교수가 맞긴 한 건가- 싶은 행동을 할 때가 있지만, 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교수였다.
나는 혹시라도 이창호 교수가 봉투 속 내용물을 확인할까 봐 얼른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다소곳하게 자세를 잡았다.
“스승님. 그동안의 화를 푸시지요.”
“허어- 화를 풀어라? 지 볼일 다 봤다고 스승을 냅다 갖다 버린 놈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와?”
이창호 교수가 주로 수업을 여는 강의실.
난 그의 강의가 끝날 때를 맞춰 찾아왔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던 대학생들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강의실 밖에서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제가 그래도 종종 전화로 안부 인사도 드리지 않았습니까?”
“뻔뻔한 놈.”
“저번 명절에 선물을 보내드린 기억도 있는데······.”
“여전히 낯짝이 두껍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 큰절 한번 올리겠습니다. 제자의 큰절 받으시지요.”
내가 진짜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하자 이창호 교수는 주변에 깔린 날카로운 시선 때문에 마지못해 나를 일으켰다.
주로 여학생들의 원망 섞인 시선들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건 여전하네. 노렸냐?”
“먹힌 거 같은데요?”
“에휴. 그럼 그렇지.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돌아가는 놈이지 네가.”
더 이상 문전박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날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터.
내가 얼굴을 보이자마자 기뻐하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애써 숨기려 했지만, 의외로 표정 관리를 잘 못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창호 교수의 개인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봐왔던 교수실과는 사뭇 다른 내부 모습이었다. 거의 총장실만큼 크다고 해야 하나.
“그래. 대관절 네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냐? 진짜 내 안부나 묻자고 온 건 아닐 테고.”
“스승님이 그리웠다고 하면 안 믿으시겠죠?”
“쫓아내기 전에 얼른 말해, 인마.”
나는 심호흡 한번 하고 말했다.
“피아노, 제대로 쳐 볼까 합······.”
내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이창호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진짜야? 진짜? 피아노를? 네가? 오만하고 뻔뻔하면서 게으른 네놈이?”
간신히 불을 붙여 놓은 피아노에 대한 열망이 이창호 교수의 반응에 팍 식어 버리려 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 자식. 그래! 원래 사람은 자기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런 재능을 갖고도 피아노를 내팽개친다면 그건 사람 새끼가 아니고 짐승이지. 그렇고말고.”
저 광적인 교육열은 여전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일까.
기분 좋게 웃고 있던 것도 잠시.
이창호 교수가 목소리를 다시 내리깔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뭐가요?”
“피아노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놈이 갑자기 피아노를 치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이상하지. 안 이상하냐?”
“하나도 안 이상합니다. 교수님 말대로 운명에 순응하려나 보죠.”
“빙빙 돌리지 말고 얼른 말해. 뭐야?”
나는 지연이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흠. 그러니까 그 지연이라는 얘가 너랑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목표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뭐 이런 얘기냐?”
“네.”
“허- 허허-”
이창호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들어도 황당한 이유이긴 했다.
“근데 그뿐만은 아니에요.”
“그럼?”
“저도 정체되어 있고 싶지 않아서요.”
여러 노래를 작곡하고, 프로듀서들과 작업을 할 때마다 나는 내 실력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습득 속도와 음악을 이해하고 번뜩이는 영감으로 새로운 곡을 창조해내는 기술.
이건 가히 천부적인 재능,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도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전생의 장연욱에게 아득한 벽이 존재했던 것처럼, 두 번째 생의 장연욱에게도 벽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정체되어 있고 싶지 않다?”
내게도 벽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여러 작곡가를 보며 알았다.
삼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 하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강용형 작곡가는 재능 갈취를 택했다.
아마 대다수가 후자를 선택해 스스로의 명예와 안위를 챙겼으리라.
그리고 그들 안에서 내 미래의 모습을 엿보았다.
나도 언젠가 시대에 뒤처져 썩어 문드러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어두운 과거 말이다.
“교수님은 항상 제게 그러셨잖아요. 100년에 한 번, 아니. 어쩌면 5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라고.”
“그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옥석을 가리는 능력은 탁월하거든. 그러니까 별 같잖은 실력으로 여기서 교수질을 하고 있지 않냐.”
“하지만 그 재능이 과연 무한할까요?”
이창호 교수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상념에 젖은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 15살, 아니지. 이제 16살이지?”
“네.”
“근데 16살 맞냐?”
몸은 어리지만, 정신은 삼십 대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털어놓을 순 없는 일이다.
“뭔 중학생 짜리가 벌써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 혹시 벌써 벽이 느껴지는 거냐?”
“아니요. 아직은요.”
“아직은?”
“예. 하지만 흐릿하게나마 그 벽이 존재한다는 게 느껴집니다.”
“허-”
그는 허탈하게 탄성을 흘린 뒤 말을 이었다.
“자고로 천재란 나태하고 만사를 귀찮아하며 무엇이든 포기하기가 쉬운 놈들이다.”
“고정관념 아닌가요?”
“아니. 천재는 남들과 보는 시야가 다르거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본인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계 또한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이지. 또한 열심히 노력해봤자 넘지 못할 벽이라고 생각해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이창호 교수의 말에 뼈가 있었다.
어디서 들은 얘기를 한 데 뭉그러뜨려 말해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랄까.
경험에 의한 조언처럼 느껴졌다.
“그런 놈들은 그냥 잠깐 주목받았다가 사라지는 거다. 대부분의 천재가 그렇게 사라지지. 하지만 너처럼 높이 서 있는 벽을 깨닫고, 그것을 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천재 이상의 존재를 만들어내지. 하지만-”
그는 뒷말에 힘을 주었다.
“너는 너무 그 벽을 빨리 봤다. 아니. 정확히는 저 어디에 있을 거라고 예측만 하는 거지.”
“그럼 안 되나요?”
“아직 넌 네 재능의 반의 반도 못 펼쳤어. 그런데 벌써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벽을 걱정한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혹시 막히는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런 건 아직 없어요.”
눈을 감고 심상화를 하며 작곡에 몰입할 때면 나는 매번 샘솟는 영감과 스파크 튀듯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악상에 감탄을 터트리곤 한다. 슬슬 적응될 때가 되었는데도 이놈의 재능은 매번 날 놀라게 만든다.
“그럼 겁을 먹기보다는 그냥 무식하게 돌진해라. 마음껏 써. 네가 가진 재능을.”
“그러다 정말 벽을 만나면요?”
“뭐··· 그땐 좆 됐구나 생각해야지.”
“······?”
“농담이고, 그땐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미리 걱정해봤자 달라질 게 없어. 왜냐하면 넌 그 벽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높이인지 지금 당장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걱정도 사서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재능이란 건 자고로 발전을 거듭해야 하는 법. 벽이라는 건 네가 새로운 교육을 받고 그것을 흡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도 전혀 발전이 없을 때를 뜻하는 거야.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오늘부터 다시 교육 시작이다.”
오늘따라 이창호 교수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오랜만에 그가 진짜 교수님처럼 보였다.
***
강용형 작곡가는 요즘 흘러가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번 파티에서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다.
그날의 수모를 잊지 않고 소속사까지 이용해 놈의 앞길을 막았지만······.
“뭐? 그 드라마 OST는 내가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그 드라마 작가가 한사코 GN 엔터테이먼트에 맡겨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렸답니다.”
강용형은 알고 있다.
지금 이 직원이 좋게 돌려 말한 것을 말이다.
GN 엔터테이먼트로 하겠다는 건 결국 내가 아니라 장연욱에게 맡기겠다는 뜻 아닌가?
“이 새끼들은 대가리가 비었나. 감히 나를 차고 그 어린 새끼한테 붙어?”
한 번이면 족한 일이었다.
그냥 그 새끼가 큰 실수를 하는 거라면서 소속사를 이용해 소심한 복수를 해주면 될 일. 그러나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예정되었던 프로젝트 5개가 벌써 아작났다.
놀랍게도 그 프로젝트 5개 모두 장연욱 쪽으로 흘러갔다. 거기다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도 함께 퍼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GN 엔터테이먼트에서 아무래도 언론사를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가십 거리를 뿌리는 거죠. 일부러 작곡가님의 위상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로······.”
“커뮤니티에 있는 글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렇게 떠들어대다 결국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번에 뉴튜브에서 작곡가님에 대한 폭로 영상이 올라왔는데 곧 삭제될 겁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다행히 대형 기획사라는 방패가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타는 맞지 않았으나, 조금씩 조금씩 저놈들이 그동안 쌓아온 탑을 갉아 먹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감히···!”
이런 소문들이 겹겹이 쌓여 두꺼운 층을 만들어낸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무엇으로?
본인의 실력으로 이 모든 의문을 잠재우면 될 일이다.
“씨발. 누가 못 해서 안 하는 줄 아나.”
오랜만에 강용형은 자리에 앉아 작곡에 몰두했다.
자신이 내놓는 어마어마한 히트곡이 곧 장연욱이란 이름을 이 바닥에서 지워 버리는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