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88화
“와아-. 눈이다.”
서울에 첫 눈이 왔다.
그것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에 말이다.
연인들이 그토록 원한다던 화이트 크리스마스.
하지만 난 딱히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눈이 오는 것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눈이 녹으면서 질퍽거리는 것도 싫었고, 군대에서 하도 눈을 많이 치운 기억이 있는 터라 트라우마가 깊게 박혀 있을 정도였다.
“너무 좋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하지만 누나와 같이 눈을 맞으며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는 건 썩 나쁘지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눈이 고맙게 느껴졌다.
“너 크리스마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왜 그런 거야? 여자친구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응?”
“크리스마스 끝나면 우리 정산날이잖아.”
“······.”
나는 펑펑 오는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돈다발이 내 머리 위로 펑펑 쏟아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이도 어린 게 벌써부터 돈 타령이야.”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누나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누나.”
“뭐, 뭐야. 갑자기.”
“기억해. 가족 다음으로 중요한 게 돈이라는 거. 100년이 지나도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건 돈이라는 걸 꼭 알아야 돼. 알겠지?”
돈을 밝히면 속물이라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행복은 통장 액수에 비례한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돈 많이 벌어서 어디다 쓰려고?”
“이번에 돈이 얼마나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 차부터 바꿔 드리려고. 차가 너무 오래됐어. 혹시 사고라도 나면 위험하잖아. 차라리 차체 튼튼한 걸로 사서 만약 사고가 나도 크게 다치지 않으시게 할 거야.”
방금까지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누나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역시 장연욱. 이 누나를 실망시키지 않네.”
“왜?”
“나는 뭐 다른 연예인들처럼 플렉스하면서 너 꾸미기에 바쁜 줄 알았지.”
“난 나 꾸미는 거에 관심 없어.”
“넌 너 꾸미는 거에 조금 관심을 가져야 돼. 너~무 관심이 없어.”
대신 누나를 꾸미는 데에는 관심이 있었다.
“이제 가자.”
“어디를?”
“모처럼 나왔는데, 백화점이라도 가야지.”
“엥? 백화점을?”
나는 누나를 데리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크리스마스라서 그런지 백화점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길 왜 왔어?”
“왜긴. 누나 선물 사주려고. 나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우리 둘 다 선물 사줄 애인이 없잖아. 이럴 땐 남매끼리 상부상조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전에 봐 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괜찮아. 뭔 선물이야. 그냥 맛있는 거만 먹어도 돼. 아직 정산도 안 받았잖아.”
“정산 안 받았다고 우리가 돈이 없어? 누나 선물 사줄 정도의 돈은 있거든?”
용돈을 꼬박꼬박 모은 것도 있고, 부모님이 나와 혜나 누나가 벌어온 돈 일부를 따로 통장에 넣어 주셔서 아주 넉넉한 편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돈 쓸 일이 거의 없어서 이참에 그동안 쓰지 못했던 걸 한꺼번에 써 볼 작정이었다.
“자~ 어디 보자.”
나와 누나가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제일 아래층에 있는 명품샵이었다.
이곳은 세계 유명한 브랜드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곳인데, 그중에서 예전부터 눈여겨봐 왔던 곳을 들어갔다.
[이데올]
지금은 다른 명품샵들에 비해 그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곳이지만, 조만간 이 회사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단숨에 유명 명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데올의 마케팅 전략은 학교 수업에서도 들었던 내용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유명 연예인들을 대거 포섭해 각종 미디어에 브랜드를 노출시켜 인지도를 얻는 것인데, 홍보 비용에만 수백억이 들어갔다고 한다.
회사의 명운을 걸 정도의 베팅이었고, 그 베팅은 성공적으로 끝나 수십 배의 이익을 챙겼다.
“이데올? 여긴 처음 보는 브랜드네.”
“누나도 명품에 대해서 좀 아는구나.”
“많이 아는 건 아니야. 그냥 언니들이 몇 번 이런 곳에 데려온 적이 있어서 요즘 사람들이 어떤 브랜드를 좋아하는지만 대충 알고 있어.”
“여기 브랜드가 누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더라고. 그래서 와 본 거야.”
“잠깐만. 설마 여기서 뭘 사겠다고?”
“응. 그러니까 딴소리하지 말고 따라 들어와.”
다른 연예인들이 자주 입는 브랜드 옷을 사줄 수도 있다. 하지만 혜나 누나는 그들과 다르지 않던가.
그들을 따라 입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난 혜나 누나에게 딱 맞는 것을 입히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브랜드를 뒤져 본 결과, 이데올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아 온 것이었다.
“여긴 손님이 아예 없네.”
다른 브랜드샵에는 손님이 많은데, 유독 이곳에만 손님이 없어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아직 이데올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이지 않던가.
조만간 이곳은 발 디딜 틈 없이 손님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 여유롭게 쇼핑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서 오세······.”
이곳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인사를 하다 멈칫거렸다.
그녀는 빠르게 우리의 위아래를 스캔했다.
혹시 우리가 너무 학생처럼 보여서 그런 건가?
우리가 연예인이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모자도 쓰고 마스크도 낀 상태였다.
“저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네? 아, 죄송해요. 두 분 너무 비율이 좋으셔서 제가 깜짝 놀랐거든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우리가 옷을 대충 입고 나와서 무시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듯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추천을 좀 드려도 될까요? 두 분에게 딱 어울리는 상품들이 있어서요.”
“네. 한번 보여 주세요.”
누나는 나를 꼬집으며 귓속말을 했다.
“야. 진짜 여기서 사려고?”
“말했잖아. 누나한테 어울리는 게 여기 있다고.”
“근데 엄청 비쌀 거 같은······.”
난 누나 말을 무시하고 팔을 잡아 땡겼다. 그리고 직원의 뒤를 따라 제품을 하나씩 구경해 보았다.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보내시라고 준비한 니트 스웨터입니다. 색상은 주황색, 검은색, 보라색, 그리고 저희 이데올의 대표 색깔인 핑크색이 있습니다.”
내가 이데올을 고른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색감에 있다.
혜나 누나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분홍색.
워낙 핑크색 계열을 좋아해서 핸드폰부터 필기도구까지 분홍색이 꼭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특히 이데올은 대표 색깔이 핑크라, 이쪽 계열 색깔을 아주 영롱하게 잘 뽑아낸다.
“와~ 예쁘다.”
방금 전까지 이런 비싼 곳에서 뭘 살 순 없다던 누나의 눈빛이 달라졌다.
핑크 스웨터에 1차로 눈이 돌아간 것이었다.
“그다음으로는 패딩입니다. 저희의 예쁜 로고가 너무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들어가 있습니다. 100% 거위털/구스다운으로 구성이 되어 있죠. 색상도 방금 전 보여 드린 스웨터와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핑크빛 패딩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일 때마다 혜나 누나의 입이 조금씩 커져 갔다.
저걸 꼭 사고 싶다는 욕망이 얼굴에 선명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저 패딩은 내가 미리 점 찍어 놓은 것 중 하나였다.
“다음으로는 백팩이 있습니다. 학생도 쓸 수 있고, 직장인들도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백팩이죠. 코튼, 린넨 안감을 사용했고, 친환경 소재의 가죽입니다. 또한 저희 이데올 본사가 있는 이태리에서 직접 제작했고요.”
백팩은 원래 리스트에 없었는데, 이걸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 회사는 참 디자인을 잘 뽑아낸다.
다른 유명 명품 브랜드들을 보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비싼 돈 주고 사는 걸까? 라고 자주 생각했지만, 여기 회사 제품들은 그런 생각이 거의 나지가 않는다.
“누나. 어때?”
“아, 응. 예, 예쁘네.”
누나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귓속말로 말했다.
“야. 패딩 가격 봤어? 고작 패딩 하나가 200만 원이야.”
예전의 나였다면 어떻게 패딩 하나가 200만 원이나 하냐며 오두방정을 떨었겠지만, 지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만큼의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하도 대단한 분들이랑 작업을 많이 해 봐서 그런지 돈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정도면 싼 거야.”
“뭐?”
“다른 명품 브랜드샵 누나도 자주 가봤잖아. 200만 원은 진짜 싼 거라니까?”
삼촌이 작업할 때 신고 오던 슬리퍼 하나가 500만 원이라는 걸 들은 이후부터 200만 원 패딩은 내 눈에 비싸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건 내가 아니라 누나가 입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입는 거였다면 저렇게 비싼 옷을 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
누나에게는 200만 원이든 2,000만 원이든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 옷을 입고 나서 얼마나 광채가 날지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진다.
“일단 저 패딩은 꼭 사자. 그리고 이 백팩 좀 봐.”
누나는 슬쩍 백팩의 가격표를 확인하고는 입을 떡 벌렸다.
“네가 미쳤구나.”
“흐흐. 크리스마스에는 좀 미쳐도 괜찮지. 근데 누나도 사실 마음에 들잖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내가 너무 비싼 거 입어도 될까? 엄마 아빠는 평생 이런 거 한번 안 입어 봤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내가 부모님 선물도 미리 골라놨어.”
부모님 선물도 미리 봐 둔 것들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새로운 백을, 아버지에게는 지갑과 양복을.
그리고 두 분이 편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타실 수 있는 차량도 리스트를 만들어 둔 상태였다.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점장은 패딩과 백팩을 꺼내 누나에게 입혀 주었다.
다 입히고 나서 나와 점장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와아~”
누나가 핑크색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유독 저 색깔과 합이 잘 맞는다.
점장도 가식적으로 탄성을 지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제가 이런 말씀을 잘 드리진 않는데, 원래 패딩이랑 백팩이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거든요. 근데 손님은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세요? 몸의 비율이 너무 남다르시다.”
“그래요?”
누나는 흐뭇하게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나도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이거 두 개로 주세요.”
“아, 네! 그런데 혹시······.”
점장은 우물쭈물거리다 우리에게 물었다.
“JJ 그룹 아니세요?”
“아······ 알아보셨구나. 어떻게 알았어요?”
“어머! 맞죠? 안 그래도 딱 들어오셨을 때부터 어디서 많이 본 실루엣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다 마스크랑 모자도 쓰고 계셔서 눈치를 챘죠. 제가 두 분 공연하는 걸 본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좀 더 쉽게 알아봤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와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괜찮으시다면 사진 한번만 찍어도 될까요? 제가 너무 팬이라서요. 대신 점장 권한으로 할인을 팍팍 해 드릴게요.”
“사진 찍는 거야 괜찮죠.”
그녀는 너무나도 기쁘게 촬영을 이어 갔다.
셋이서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혜나 누나와 내 단독샷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최대한 할인율을 끌고 와 비교적 싼 가격에 옷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꼭! 꼭 들러주세요!”
“고마워요, 언니~”
혜나 누나는 어느새 점장을 언니라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콧노래가 가득해진 것을 보아 기분이 많이 좋은 듯보였다.
“고마워 연욱아.”
“응?”
“오늘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어. 그리고 나도 준비한 선물 있다? 물론··· 이것처럼 비싼 건 아니지만.”
누나가 주는 선물이라면 어떤 거든 좋았다.
그렇게 부모님 선물을 사고 백화점을 나올 때였다.
“아참. 회사에서 들었어. 너 어떤 감독님 명함을 가지고 와서 강 대표님한테 보여줬다며?”
“응. 아직 데뷔 작품도 없는 분이야.”
“그런데 왜 받아온 거야? 원래 그런 거 관심 있었어?”
“날 위해서가 아니라 누나를 위해서야.”
“뭐?”
누나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를 것이다.
“차차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