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87화
더블 출연료에 오케이를 외치면서 나는 곧바로 기획사에 계약서 전문을 보냈다.
계약 조건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가 마음대로 계약을 맺을 순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성년자라서 부모님 동의 없이는 사인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연욱아. 내가 법무팀이랑 계약서 내용을 확인해 봤거든.”
“네.”
“근데 출연료가 왜 이렇게 높아? 너 주연급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조연 아니었어? 이건 거의 주연급 출연료인데?”
“제가 더블로 안 주면 안 하겠다고 했더니, 김 감독님이 주겠다고 하시던데요?”
“뭐, 뭐야? 하하하!”
내가 직접적으로 더블로 달라는 말은 안 했지만, 은연중에 그런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바닥에서 수십 년을 구른 김 감독이 그걸 놓쳤을 리 없을 터.
“이것만큼 좋은 계약 조건도 없다. 바로 도장 찍자.”
계약이 성사되면서 김 감독은 곧바로 스케쥴부터 보냈다.
급하긴 급했던 모양인지 촬영은 바로 내일이었다.
“알다시피 지금 한창 진행 중인 드라마라서 빠르게 찍지 않으면 편집할 시간도 없어. 부탁 좀 할게.”
“네. 이미 계약까지 한 마당에 당연히 해 드려야죠.”
거의 주연급으로 출연료가 들어오는데, 힘든 스케쥴이라고 마다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죽음의 신, 장연욱. 특별 출연에서 정식 캐스팅됐다.]
[최악의 캐릭터 1위에서 최고의 캐릭터로 부상한 죽음의 신. 재출연한다.]
[장연욱 전속 출연 확정!]
계약을 맺자마자 김 감독은 기사를 뿌렸다.
그래야 시청자들이 기대감을 갖고 드라마를 봐줄 게 아닌가.
“진짜야? 진짜 계약했어?”
집에 돌아오니 누나는 침대 위에서 방방 뛰고 있었다.
내가 드라마에 계속 나온다는 게 기쁜 모양이다.
“그렇게 좋아?”
“당연히 좋지! 그 캐릭터 너무 매력 있었단 말이야.”
“저번에는 최악이라고 욕하지 않았어? 확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야! 그건 네가 나오기 전이잖아. 누가 그렇게 후광을 뿜어내면서 나올 줄 알았나. 그리고 너 평소에 꾸미고 다녀. 아주 몰라 보겠더라.”
나는 거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게 그렇게 달랐나?
분장이라고 해 봤자 딱히 없었는데.
양복 하나 걸치고 분칠 조금 하는 거 정도?
“요즘 남자들도 화장 다 하고 다녀. 메이크업은 여자만 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니깐?”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
“어휴. 진짜 이런 애들이 자기 얼굴만 믿고 다른 건 아예 안 한다니깐? 따라와 봐.”
누나는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세면대 물을 틀었다.
“씻어.”
“응? 갑자기?”
“그래.”
“누나가 나가야 씻지.”
“야. 내가 언제 샤워하래? 세수를 하라고. 얼굴을 씻어야 내가 뭘 해 줄 거 아니야.”
얼떨결에 나는 세수를 하고 다시 누나 손에 이끌려 화장대 앞에 앉았다.
“여자 화장품은 안 바르는 게 좋아. 요즘은 남자 전용 화장품이 많이 나오거든. 내가 이럴 줄 알고 몇 개 사놨지.”
“진짜?”
누나가 서랍장을 열자 그곳에 남성 전용 화장품들이 들어 있었다.
‘음···? 원래 여자들은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건가?’
“호호. 이런 거 꼭 해 보고 싶었는데.”
덕지덕지 뭔가를 바르고 또 그 위에 뭔가를 덮어씌우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혜나 누나는 계속해서 내 얼굴 위에 무언가를 쌓아 놓았다.
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근데 누나.”
“응?”
“누나도 원래 화장 많이 하나?”
“나? 거의 안 해. 이 나이에 무슨 화장이니?”
“······.”
갑자기 불안해졌다.
생각해 보니 누나는 화장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내 얼굴을 맡겼으니 분명 그 결과는······.
“어때?”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참하게 망가질 줄 알았는데,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 절묘했다.
분명 이것저것 많이 발랐을 텐데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거울만 보면 정말 가볍게 메이크업을 해 준 느낌이랄까. 그러나 한층 더 외모가 빛이 나는 듯해 보였다.
“누나. 혹시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뉴튜브에서 조금씩 배웠지. 직접 해 보는 건 처음이고. 마음에 들어?”
“스타일리스트들이 해 주는 것보다 더 잘해 준 거 같은데?”
“그럼 내일 촬영장 가기 전에 누나한테 와. 내가 메이크업 쫙 해줄게. 머리도 좀 만져 주고.”
누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었다니.
볼 때마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그냥 가서 다 씹어 먹고 와. 주연이건 뭐건 네가 주인공처럼 보이도록. 알겠지?”
누나가 갑자기 왜 내게 메이크업을 해줬는지 알 거 같다.
조금이라도 내게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혜나 누나가 해 주는 메이크업으로 내일 촬영장에 나가면 평소보다 더 자신감이 넘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다음날, 나는 아침에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미 촬영장에는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다.
“이번에 정식 출연을 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루머 기사가 아닌 건 확실하죠?”
“출연료 협상은 어떻게 됐나요?”
“죽음의 신이 앞으로도 자주 나오는 캐릭터가 되는 건가요? 그럼 모든 스토리를 다시 쓰는 겁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에 대한 건 드라마를 통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감독이 미리 내게 언질을 줬다.
드라마 내용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발설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대답만 하고 촬영장 안에 들어왔다.
“오~ 왔어?”
“네. 제가 늦게 온 건가요?”
“아니야. 딱 시간에 맞춰서 왔네. 그런데 미리 메이크업을 받고 온 건가?”
누나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화장을 시켜 주고 머리까지 만져 주었다.
“네. 괜찮나요?”
“좋은 스타일리스트를 쓰나 보네. 별도로 할 필요가 없겠어. 인물이 확 살아.”
보조 감독들도 내 상태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나무랄 곳이 없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메이크업할 시간도 아까웠는데, 덕분에 시간 절약하겠네요.”
김 감독은 내게 대본을 건넸다.
대본치고는 많이 얇았다.
“미안. 우리가 급하게 추가 촬영을 하게 되면서 준비된 대본이 많이 없어. 그거 쪽대본이야.”
말로만 듣던 쪽대본을 이렇게 보게 된다.
보통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스토리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촬영했던 걸 전부 다 폐기해 버리고 재촬영에 들어가면 이렇게 대본이 쪽대본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물론, 쪽대본일수록 드라마 퀄리티가 떨어지기 때문에 감독들이 기피하는 일이기도 했다.
“대본 외우는 시간은 따로 줄게. 1~2시간 정도면 되겠지?”
나는 대본을 쭉 훑어본 뒤 고개를 저었다.
“5분만 주세요.”
“응? 5분?”
“그 정도면 충분해요.”
대본은 방금 전 다 외웠다.
내가 5분을 달라고 한 이유는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할지, 어떻게 감정을 잡아야 할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 5분이면 돼?”
“네. 촬영 준비하시고 끝나면 불러 주세요.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황당해하는 김 감독과 보조 감독들을 놔두고 아무 방에 들어가 대본을 보며 맹연습에 들어갔다.
***
“나이스~! 컷! 아주 좋아.”
오늘 촬영은 사실상 나 혼자만 찍는 거였다.
다른 주연들은 등장하지 않고 몇몇 엑스트라만 나오는 건데, 항상 위에서 방관만 하고 있던 죽음의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직접적인 관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뀐 드라마 내용이었다.
그리고 촬영은 1시간도 안 돼서 끝이 났다.
“오늘 적어도 5시간은 찍을 거라고 각오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네. 근데 연욱이 너 따로 연기 학원 다닌 건 아니지? 아니면 소속사에서 교육을 받는다던가.”
“저는 배우가 아니라 가수인데요?”
“그건 나도 알지. 그런데 웬만한 배우들 뺨칠 정도로 연기를 잘하니까 하는 말이야. 연습도 따로 안 하는데 이 정도라는 건 그냥 재능이 남다르다는 거네.”
별로 촬영이 힘들진 않았다.
드라마 시청률이 매번 최고점을 찍고 있어서 그런지 촬영장 분위기도 매우 좋았고, 덕분에 나도 재밌게 촬영했다.
매일 이런 식으로 촬영을 한다면 그 많은 출연료를 받은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어느 남성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선배님. 오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아! 그래. 오늘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하다. 보다시피 지금 정신이 없어서.”
“아닙니다. 뒤에서 쭉 지켜보면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습니다.”
김 감독은 내게 그를 가볍게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박태중 감독이라고 내 학교 후배야.”
“감독이라니요. 아직 데뷔 작품도 없는 놈입니다.”
박태중? 박태중 감독?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름이었다.
“반갑습니다. 박태중이라고 합니다. 노래도 요즘 잘 듣고 있습니다. 노래도 큰 성공을 거두시고 연기에서도 이렇게 호평을 받으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그와 악수를 나눴다.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 거 같았는데.
“그래. 그렇지 않아도 얘기는 들었다. 요즘 시나리오 들고 다니면서 투자처 찾고 다닌다며?”
“네. 그런데 쉽지가 않네요. 아직 데뷔도 못 한 햇병아리에게 투자금을 던져 줄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 제목이 뭐라고 했지?”
“아직 제대로 정해지진 않았습니다만······ 일단 가제는 ‘문라이트’입니다.”
거기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라마 문라이트.
케이블 방송사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게 되는 엄청난 드라마다.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았던 나조차도 챙겨 봤을 정도로 흥행력이 대단했다.
“그 문라이트라는 드라마, 혹시 줄거리가 어떻게 되죠?”
“아, 크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대단한 건 아니라고 하면서 벌써부터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는 게 보였다.
“달빛이 내리쬐는 밤에만 나타나는 호텔이 있는데, 그 호텔은 산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자의 영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여주인공은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이고요. 그러다 우연찮은 기회에 남주인공이 그 안에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해서 시작되는······.”
그 뒤 내용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문라이트 드라마가 맞기 때문이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횡설수설 떠들어 대기만 했죠?”
그제서야 이 감독의 이름이 떠올랐다.
박태중 감독.
첫 데뷔작 문라이트로 초대박을 터트린 뒤 그다음 작품도 연달아 홈런을 때려 버린다.
원래 그 해마다 잘나가는 감독들이 있기 마련이지 않던가.
박태중 감독은 향후 몇 년 동안 쭉 탑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야말로 드라마계의 히트 제조기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 나중에는 드라마판을 떠나 영화 쪽으로 진출을 하게 된다.
“스토리는 정말로 재밌네요. 진심입니다.”
“정말입니까?”
“네. 어디에서 투자를 받으실진 모르겠지만, 먼저 투자하는 곳이 큰 행운이겠는데요?”
드라마 문라이트가 어디서 투자를 받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반드시 성공한다는 건 알고 있다.
왠지 손이 근질거린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다른 곳에 떠나도록 놔두는 느낌이랄까.
“저기 박 감독님.”
“네?”
“명함 있으시면 혹시 주실 수 있으세요?”
거위의 꿈.
그것이 오늘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