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85화
지연이가 피아노를 죽을 만큼 싫어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어쩌면 이대로 그녀가 음악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지연은 국제 콩쿨에서 우승하는 아시아 첫 여성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피아노를 포기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린 음악의 여신을 잃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지연이가 입국 수속을 밟는 그 시간까지 혼자 고민했었다.
무엇이 그녀를 지탱해 줄 수 있을까?
쭉 생각하다 지연이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냅다 저질러버렸다.
“근데 더 이상 콩쿨은 안 나갈 거라고 하지 않았어? 재미없다며.”
“내가 콩쿨에 나갈 거라고 하면 지연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연습하지 않을까?”
한마디로 난 지연이에게 목표를 심어 준 것이다.
몇 년 동안 외국으로 나가 있는 동안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을 동기.
그것이 꺼져 있던 지연이의 열정을 다시 되살려 줄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고 내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문제는 내가 콩쿨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지.”
앞으로 3년.
길면 긴 시간이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다.
특히 국제 콩쿨 같은 건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교육을 받기 때문에 고작 3년 준비해서 그 문턱을 넘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미 약속은 해버린 상태였다.
“그깟 국제 콩쿨, 한번 우승해 보지 뭐.”
왠지 난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드라마 수호자가 마침내 방영을 시작했다.
든든한 라인업 덕분에 첫 화의 시청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와 김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졌다.
-유월 너무 잘생겼다.
-정성우 진짜 다 가진 거 아니냐?
-연예계에서도 인성 끝판왕이라고 알려져 있다던데.
-드라마 꿀잼이네 ㅠㅠ 유월이 혼자 다 하는 듯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정성우의 짠내 나는 연기도 색다르다는 평도 많았다.
-그런데 ost가 너무 좋지 않아요?
-안 그래도 나 벌써 ost 중독됨
-작곡가가 누군가 했더니, JJ 였네?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는구먼.
-그럼 노래 작곡은 연욱이가 하고 부른 건 혜나 맞죠? 어째 멜로디랑 목소리가 너무 좋더라.
드라마가 잘 되니, ost 반응도 좋았다.
현재 공개된 ost는 3곡.
모두 다 좋다고는 말하지만,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건 혜나 누나가 부른 곡이었다.
“벌써부터 혜나 다음 곡 언제 나오냐는 말이 있더라.”
삼촌은 치킨 다리를 뜯고 난 뒤 맥주 한 캔을 쭉 들이켰다.
저번 생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는 맥주다.
나도 모르게 군침이 절로 삼켜졌지만, 이 아쉬움을 콜라로 달랬다.
“그쪽이랑은 이미 계약 끝났잖아요. 만들어 달라는 ost는 다 만들어줬으니까요.”
혜나 누나가 부른 노래가 벌써 음원 차트를 뚫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 정도 기세라면 1위를 차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드라마 ost가 1위를 먹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야. 근데 이번에는 어쩌면 가능할 수도? 네가 노래를 그만큼 잘 뽑긴 했어.”
멜로디가 좋은 건 맞다.
특히 도입부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내 ost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전부 도입부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도입부가 좋다고 해서 곡을 끝까지, 계속 듣는 것이 아니다.
곡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 주는 건 역시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혜나 누나의 목소리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다 누나 덕분이죠 뭐.”
일등공신은 혜나 누나라는 것이다.
“너랑 혜나는 참 남매 같지 않단 말이야.”
“그래요?”
“내가 이제까지 동생이 누나를, 혹은 누나가 동생을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근데 너희 둘은 어쩜 서로를 못 위해줘서 안달이 난 건지 모르겠다니깐? 아무튼 평범한 남매가 아니야.”
“그러니까 가수 하는 거겠죠.”
“하긴. 둘이 사이 안 좋았으면 가수고 뭐고 다 때려쳤겠지.”
우리 남매 사이는 안 좋은 적이 없었다.
다른 남매들처럼 살벌하게 싸운 적도 없었고, 소소한 싸움이 가끔 있긴 하지만 한 시간도 안 돼서 다 풀린다.
내가 잘하는 것도 있고, 누나가 내게 잘해 주는 것도 있기 때문에 이 사이가 좋게 유지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두 번째 삶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누나의 성공과 행복을 위함이지 않던가.
이번 드라마 ost 프로젝트도 누나의 또 다른 성공적인 커리어가 되었다. 그뿐인가?
더 이상 누나는 무명 가수가 아니다.
길거리 어디를 가도 누나를 모두 알아보고, 또 가수들이 모여 있는 음악 무대 대기실을 가도 모두가 우리를 우습게 보지 못한다.
인기가 곧 그 사람의 위치라는 것이 연예계의 법칙이다.
그중에서 누나는 상위권에 안착했다.
“그런데 네 장면은 언제 나오냐?”
“네?”
“너도 드라마 찍었잖아. 네 얼굴은 언제 나오냐고.”
그러고 보니 나도 드라마를 조금 찍긴 했구나.
별로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잠깐 흘러가는 등장인물이고, 아마 1분 안팎으로 나오는 게 전부일 것이다.
아마 내가 나왔다는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까?
* * *
“엄마!! 수호자 지금 방송해?”
“아직 광고 중이야. 일단 씻고 와.”
“안 돼! 지금 딱 시작하려고 하잖아.”
학원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딸을 보고 미영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러나 지금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송이지 않던가.
원래 드라마를 잘 챙겨보지 않던 미영도 이번만큼은 본방 사수를 하고 있었다.
“에휴. 둘 다 드라마에 빠졌네, 빠졌어.”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도 은근슬쩍 소파에 앉았다.
드라마에 별로 관심도 없고 매일 뉴스만 보던 사람이 수호자가 할 땐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좀처럼 모이지 않는 가족이 수요일, 목요일 저녁만 되면 tv 앞에 옹기종기 모이게 되었다.
“오. 시작한다.”
드라마 인기가 많다는 증거가 바로 광고다.
긴 광고 끝에 마침내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정성우 배우가 아련하게 멀리서 여주인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너무 잘생겼다.”
요즘 10대들의 우상이라는 정성우.
미영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비주얼이었다.
그에 반해 남편은 여주인공인 김다혜가 나올 때마다 잇몸이 만개했다.
“엄마. 엄마 사위로 정성우 어때?”
“네 얼굴로는 어림도 없어 기지배야.”
“나도 김다혜처럼 얼굴 좀 만지면 장난 아니거든?”
“호호. 넌 얼굴 아빠 닮아서 안 돼. 원판 불변의 법칙 모르니?”
“우리 딸이 어때서? 지금도 얼마나 예쁜데.”
서로 투닥거리는 것도 잠시.
드라마의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면서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여주인공을 지키려는 남주인공.
하지만 신의 계약으로 절대 둘은 가까워질 수 없었다. 만약 그 약속을 깬다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험하다.
“짜증나. 자기가 뭔데 계약을 걸고 난리야. 그냥 둘이 행복하게 살게 해 주면 안 돼?”
드라마에 몰입한 딸아이의 투덜거림에 미영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놈의 작가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어지간히 사람 마음을 애태운다.
남주인공이 멀리 지나가는 여주인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때마다 자신의 마음도 먹먹해져만 갔다.
“일부러 욕 많이 먹을까 봐 얼굴 공개는 안 하는 거겠지?”
주인공과 계약한 죽음의 신은 아직 목소리만 나왔을 뿐, 얼굴이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드라마 회차가 이어질 때마다 죽음의 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욕 한 바가지를 쏟아붓기 때문에 일부러 공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
“뭐야. 죽음의 신이 나온다고?”
뒤에 숨어 목소리만 찔끔찔끔 내보낼 줄로만 알았던 죽음의 신이 검은 연기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이어지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음악 소리와 더불어 슬로우 모션으로 그 얼굴이 서서히 나타났다.
도대체 어떤 놈인지 면상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미영은 죽음의 신의 얼굴이 딱 클로즈업 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건 딸아이도 마찬가지였는지, 둘 다 입을 쩍 벌린 채 TV 화면을 꽉 채운 저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어리석은 계약자여.”
첫 시작을 압도적인 비주얼로 시작했다면, 두 번째는 귀를 자극하는 목소리로 공격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저 목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너와 내가 맺은 계약을 잊지 마라. 그 여자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 한다면 지체없이 목숨을 빼앗아 버릴 것이다. 물론 네가 보는 앞에서 말이다.”
대사는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죽음의 신에게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게임이지 않았을까?
그저 주인공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기 위해 계약을 한 것이 아닐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 입장에선 죽일 놈이었다.
음성 대사만 나왔을 때도 그 많은 욕을 먹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땐 목소리가 변조된 탓에 누가 죽음의 신 연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목소리가 변조되지 않고 저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대로 방송을 탔다면 평가가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기억해라. 난 네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다. 네가 원하는 또 하나의 고통을 선사해줬을 뿐. 계약을 어기면 그녀는 다시 내 밧줄에 묶이게 될 것이고, 넌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 죽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신은 다시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저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 하고 소리칠 만도 한데, 미영은 왠지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말이 나왔다.
“딸.”
“응?”
“너 정성우 말고 저 남자랑 결혼하면 안 되냐?”
* * *
부르르르-!
어제저녁 일찍 잠에 들었는데, 쉴새 없이 전화가 울려댔다.
원래 자고 있는 시간에는 전화를 받지 않아서 진동으로 해놓았다가 아침이 돼서도 사그라들지가 않아 결국 잠에서 깨고 말았다.
“대체 누구야?”
부재중 전화만 150통.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일단 강 대표한테 온 전화가 10통.
삼촌과 이창호 교수한테 온 전화도 10통이 넘고 그 외 참 다양한 번호들로 전화가 왔었다. 또한 문자 메시지도 900통이 넘게 와 있었는데, 대형 기획사는 물론 광고 업체에서 문의가 폭주했다. 또한 수호자 드라마 김 감독으로부터도 여러 번 전화가 와 있었다.
“대체 뭐지?”
“연욱아!!”
그때 누나가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누나. 노크 몰라?”
“아. 미안. 나도 인터넷 보고 놀라서 들어온 거야. 혹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니?”
“······됐고. 무슨 일인데.”
“야. 너 완전 난리 났어.
“뭐가?”
“드라마 수호자!”
내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누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 설마 그 드라마 안 봐?”
“누나는 봐?”
“난 하루 지나서 사이트에 올라오면 다시 보기로 보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인터넷부터 봐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터넷을 살피러 들어갔다.
부재중 전화가 쌓인 것도 그렇고 누나가 호들갑을 떠는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 정말 생기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간 순간 나도 모르게 기함이 터져 나왔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