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80화
“여보. 내일 지연이 친구 오는 거 알죠?”
“응? 지연이 친구가 집으로 놀러온 적이 있었나?”
서류를 보고 있던 손재호는 아내, 한인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까지 한번도 딸아이가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지연이가 친구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아니. 딸아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당신 지연이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
“당신도 알잖아. 요즘 너무 바쁜 거. 그래도 당신이 지연이를 예쁘게 잘 키워주고 있잖아? 나라고 지연이랑 안 놀고 싶겠어? 그리고 내가 지금 열심히 일하는 게 전부 다 지연이를 위한 일이야.”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남편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적어졌고,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절대 밖에서 허튼짓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니기에 바가지를 긁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이 곧 자식을 위한 일이라는 걸 합리화 시키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당신은 왜 지연이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모르지?”
“그거야······ 잠깐 쉬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
“어휴. 말을 말자. 아무튼, 내일 지연이가 데려오는 친구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요. 당신도 아는 사람이니깐.”
“내가?”
“당신이 요즘 좋아하는 노래 있잖아요. 그 노래 부른 사람이 내일 와요.”
재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손뼉을 탁 쳤다.
“혹시 JJ?”
“아주 귀가 닳을 정도로 요즘 그 그룹 노래만 듣고 있지 않아요?.”
“설마 우리 딸이 JJ랑 친구라고?”
“그 장연욱이란 남자애랑 친구인가 봐요. 예전에 우리도 봤었잖아. 콩쿠르에서.”
“콩쿠르? 그랬던 적이 있던가.”
“우리 지연이가 고작 2등한 콩쿠르! 당신은 그것도 기억 못 해요? 지금까지 1등만 하던 얘가 거기서 유일하게 2등을 했는데. 그때 우승자가 연욱이잖아.”
“아- 기억나네. 그게 연욱이었어? 참 기묘한 인연이네.”
인혜는 남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그냥 아는 척만 하는 거겠지.
그렇다고 남편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
갑작스럽게 회사가 번창하면서 도저히 다른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 덕분에 이렇게 좋은 집과 날이 갈수록 높이 쌓이는 부를 얻지 않았던가.
그래도 예전에는 지연이와 아내인 자신한테 관심이 아주 많았는데, 요즘은 일이 더 우선인 것 같아 조금은 섭섭한 기분이었다.
“근데 그 연욱이랑은 어떻게 친해진 거지? 지연이가 싫어할 법도 한데.”
“그 얼굴을 봐요. 안 싫어하게 생겼나. 그리고 나도 좋아서 그 애를 지연이랑 놀게 해 주는 거 같아? 워낙 지연이한테 걸맞은 친구가 없어서 그 애라도 만나게 해 주는 거지.”
아내의 말에 재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지연이가 이제껏 제대로 친구를 사귀지 못 한 게 아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 너무 빡빡하게 구는 거 아니야? 지연이도 한창 놀 나이잖아.”
“여보. 지연이는 세계 정상급 피아니스트가 될 아이에요. 레슨 시켜주는 교수들도 하나 같이 입을 모아서 말하잖아요. 지연이 정도의 재능이라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고. 다른 곳에 허비할 시간이 없어요.”
더는 재호도 그 일에 터치하지 않았다.
지연이에 대한 교육은 모두 아내에게 맡겼으니 말이다. 지금 와서 교육권을 빼앗는다고 해도 나아질 것은 없었다.
“그런데 지연이 곧 다시 외국 들어간다면서?”
“일단 그럴 계획이에요. 지연이만 준비되면······.”
“준비되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내일은 잠깐이라도 지연이랑 인사하고 친구 오는 것도 보고 가요.”
아내가 방을 나가고 나서 재호는 잠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이내 서류에 다시 파묻혔다.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지금 해야 일이 너무 많았다.
***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대문 앞에 섰다.
꼭 미디어에서 재벌집 주택가를 보여 줄 때 이런 큼지막한 대문이 나와 있지 않던가.
왜 문을 크게 만들어 놓는가 했더니, 집 앞에서부터 기선 제압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누구냐고 묻는 말도 없이 문이 열렸다.
나는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 또다시 문 앞에 섰다.
이번에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아도 문이 열려 있었다.
“어서 오렴.”
지연이 어머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적이고 젊어 보이는 외모였다.
그 옆에는 장난기 많은 얼굴에 안경을 끼고 있는 지연이 아버님이 계셨다.
“오~ 네가 연욱이구나. 그동안 지연이한테 말은 참 많이 들었다. 그리고 TV에서도 나오는 것도 봤고. 내가 사실 JJ의 팬······.”
“여보.”
지연이 어머니가 팔꿈치로 치자 아버님은 하던 말을 끊었다.
지연이는 밝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연욱아. 와줘서 고마워.”
“우리 딸이 너 온다고 얼마나 예쁘게 차려입던지 원······.”
“아, 아빠!”
“그래. 둘이 이제 올라가서 놀아. 엄마가 간식도 챙겨 먹으라고 가져다줄 거야. 그런데 연욱이 너 정말 15살 맞니? 누가 보면 고등학생인 줄 알겠다. 키가 엄청 크네.”
“그런 말 종종 들어요.”
“그러니까 연예인도 하는 거겠지. 아무튼 난 나가 봐야 해서, 우리 또 만나자? 아참. 나중에 사인도 좀 해 주라.”
“네.”
아버님은 익살스럽게 인사를 건넨 뒤 먼저 밖으로 나갔다.
지연이는 나와 같이 위층 방으로 올라가면서 말했다.
“아빠는 일이 많이 바쁘셔서 집에 잘 안 계셔.”
“사업하시나 보네?”
“응. 우리나라에도 회사가 있고 외국에도 있어. 그래서 항상 바빠서 나랑 잘 놀아주지도 않아.”
뒷말을 흐리는 것을 보니, 아빠한테 섭섭한 모양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모든 걸 채워줘도 지연이가 원하는 건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인 것 같았다.
“친구한테 내 방 보여주는 건 처음이라서 너무 떨리네.”
2층에 있는 지연이 방은 예상했던 대로 넓었다.
보통 가정집만 한 크기의 방을 자랑했지만, 안을 채우고 있는 건 온통 음악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피아노부터 음악 서적들, 클래식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기기와 소파.
여자애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혜나 누나의 방과는 완전히 딴판이라고 해야 할까.
음악에 완전히 빠져 사는 덕후라면 여기가 천국이겠지만, 그냥 보통 사람에게는 처음에 신기할지 몰라도 나중 가면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을 참 잘 꾸몄네. 피아노도 엄청 좋아 보인다.”
나는 피아노 건반을 몇 번 두드려 보았다.
튜닝도 잘 되어 있고 소리도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매일 청소해 주는 건지 가벼운 먼지나 때 하나 묻지 않았다.
“쳐봐도 돼?”
“물론이지.”
나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해 보았다.
삼촌 작업실에 있는 피아노도 워낙 비싼 거라 소리의 깊이가 달랐는데, 이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것만 같았다.
역시 좋은 악기일수록 나오는 소리가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일정 가격 이상의 피아노부터는 다 비슷한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음악가는 역시 장비가 좋아야 한다. 그래야 이 환희로 가득 찬 음색을 귀에 가득 채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연주를 끝내자 지연이가 옆에서 박수를 쳐 주었다.
“잘 친다.”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이제 네가 쳐 줄래?”
“응? 내가?”
“아무거나. 혹시 지금 연습하는 거 있으면 그거 쳐줘.”
지연이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아직 연습 중인 곡이라서 많이 틀릴 수도 있어.”
“괜찮아.”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주가 시작되었다.
강한 터치와 눈으로 차마 쫓아가기 힘들 만큼 빠른 손놀림.
난 첫 음을 듣자마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쇼팽의 ‘혁명’.
쉴 틈 없이 여러 건반을 한꺼번에 눌러야 하고 마치 왕벌의 비행마냥 곡이 빠른 리듬으로 이어진다.
혁명이란 곡은 나도 어려워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곡인데, 지연이는 피나는 노력으로 곡을 익힌 것 같았다.
피아니스트들도 기피한다는 곡이 바로 ‘혁명’이지 않던가.
다 치고 나서도 손이 얼얼해 잠깐 쉬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나는 버릇처럼 눈을 감고 지연이의 노래를 감상하려다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고 노래보다는 지연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번의 미스터치가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곡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
그냥 보면 온통 피아노에 집중한 듯 보이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삼촌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따라라란-!
여기서 더 빨라져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곡의 속도가 더 올라가고 있었다.
약 3분 정도 되는 연주 시간 동안 나는 지연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숨 막힐 듯이 쏟아지던 혁명의 노래가 끝이 났다.
지연이는 후련한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에는 땀이 한 방울 맺힌 게 보였다.
“으- 나 너무 못 쳤지.”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아직 미완성된 연주였다. 하지만 이제 15살밖에 불과한 아이가 만들어낸 연주다. 아마 음악 평론가들도 지연이의 이곳에서 직접 봤다면 모두 박수 쳐주었을 것이다.
부족함 안에 있는 완벽함이라고 해야 할까.
쇼팽의 혁명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연욱아?”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지연이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그래? 내가 너무 못 쳐서 실망했어?”
“아니. 방금 그걸 듣고 실망했다고 하면 맞아야지. 연주는 아주 좋았어.”
“휴. 다행이다.”
“그런데······.”
난 솔직하게 지연에게 말했다.
“평소라면 네 연주에 집중했겠지만, 오늘은 네 얼굴만 봤어.”
“······어? 어어?”
“그래서 사실 연주는 제대로 듣지 못했어. 미안해.”
지연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내, 내 얼굴만 봤다고? 왜? 혹시 뭐 묻었어?”
“아니. 그냥 네 얼굴만 보고 싶어서.”
그러자 이번에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행동했다.
“연욱아. 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저번에 삼촌한테 들은 말이 있거든. 그래서 오늘 그걸 확인했던 거야. 정말 삼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보려고.”
“삼촌?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지연이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지연아. 나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응? 뭐, 뭔데?”
“너······.”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어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하지만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지연이가 먼저 소리를 쳤다.
“자, 잠깐만. 나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마음의 준비?”
“정말 잠깐이면 돼.”
지연이는 고개를 숙이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 이제 말해도 돼.”
거기서 난 지연이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내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닌데 말이다.
지금이라도 화제를 다른 걸로 돌려야 할까?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 더 멍청한 일이었다.
난 지연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