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59화 >
“감독님. 혜나랑 연욱이 오늘 집에 안 간데요?”
“응? 무슨 소리야. 걔네 간 거 아니었어?”
“아니에요. 작업실 불 아직 켜져 있던데? 거기 그 남매만 쓰는 곳이라면서요.”
회사 직원의 말에 이은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바깥이 어둑어둑해진 시간이다.
그런데 아직도 집에 안 갔다고?
몇 시간 전에 진작 간 줄 알았는데.
“요놈들 불도 안 끄고 간 거 아니야?”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업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과연 직원 말대로 작업실 불이 켜져 있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
“응? 뭐야. 진짜 안 간 거였어?”
혜나랑 연욱이는 아직도 작업실에 남아 있었다.
“얘들아, 집에 가야지.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그런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들어가서 보니 둘 다 각자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혜나는 새근새근 졸고 있었고 연욱이는 꼭 명상하는 듯이 보였다.
“혜나야? 장혜나.”
왠지 연욱이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먼저 혜나부터 깨웠다.
“으아-! 내 아이템!”
“······?”
혜나는 벌떡 일어나 뭐라 소리를 질러댔다.
악몽을 꿨던 건지,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이은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혜나야?”
“휴-. 꿈이구나.”
“악몽 꿨어?”
“네, 제가 키우던 계정이 갑자기 삭제되는 끔찍한 악몽이요.”
“······.”
그녀는 이제 연욱이를 깨우려 했다. 그러자 혜나가 나서서 막았다.
“언니. 연욱이는 그냥 놔두세요.”
“응?”
“5시간 전부터 저 자세였어요.”
“엥? 5시간이 넘도록 저렇게 있었다고?”
“네. 무슨 도 닦는 사람처럼 계속 저러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방해 안 하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봐요.”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오랜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연욱이 원래 이러니? 뭐 하나 집중하면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못 들어?”
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럴 땐 그냥 놔두는 게 베스트에요.”
“음······.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부모님 걱정하실 거 아니야.”
“이미 늦는다고 연락해 놨어요. 그리고 매니저 오빠가 이따 데려다준다고 했고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난 너희들이 불도 안 끄고 집에 간 줄 알았잖아.”
이은지는 작업실을 나서면서 한 번 더 연욱이를 바라보았다.
자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기에는 너무 정자세였다.
사람이 집중하면 저렇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여러모로 미스테리한 아이였다.
***
힘을 빼자.
최대한 힘을 빼자.
애써 붙잡으려 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 강물처럼 내버려 두자.
나는 몇 번이나 되뇌며 생각을 통제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여러 생각들이 모차르트의 변주곡처럼 통통 튀기 시작했다.
음악과는 전혀 관련 없는 별의별 장면들이 다 지나갔지만 좀처럼 음률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혜나 누나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왜 불교에서 명상할 때 머리가 번잡하면 마라의 짓이라고 하는지 알겠다.
번뇌를 이겨내고 상념을 접어둘 때야 비로소 도를 깨우친다고 했던가.
지금 내가 작곡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도를 닦는 건지 모르겠다.
“······.”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치달았을 때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뛰던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누나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는데,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다.
그 순간 난 직감했다.
이것이 내 머릿속이 만들어낸 새로운 음률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세히 듣고자 애를 쓰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노래가 끊기고 멀리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악기 대신 잔디밭에서 아름다운 음색을 들려주는 반딧불과 노래의 리듬을 결정해 주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하모니를 이뤄내는 누나의 목소리는 유독 내 귀를 간질였다.
한 곡이 끝나면 또 다른 곡이 나오고, 그렇게 벌써 몇 곡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완벽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곡들은 아니었지만 각 곡이 갖는 성질은 비슷했다.
나와 이은지 디렉터가 원했던 스타일의 노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아니. 내 머릿속에서 들리는 이 악상을 하나로 합치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손이 근질거렸다.
어느 곳에라도 지금 듣고 느낀 이 악상을 적어 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몰입했던 탓일까.
눈꺼풀이 무거워 쉽사리 떠지지 않는다.
나는 이를 꽉 다문 채 이 정교한 심상화에서 빠져나오고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은 넘게 몸부림을 쳤을까.
“장연욱! 연욱아!”
“헉-!”
누나가 내 몸을 흔들어 깨우면서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누, 누나.”
혜나 누나는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휴지로 닦아 주면서 말했다.
“괜찮아? 땀 흘리는 것 좀 봐. 갑자기 네가 경련 일으키길래 바로 깨웠어.”
“바로 깨운 거야? 몇 시간은 몸부림친 거 같았는데.”
“뭐래. 10초도 안 됐을걸?”
10초밖에 안 됐다고?
거짓말이 아니라 체감상 1시간은 넘게 깨어나고자 몸부림을 쳤던 것 같았다.
“5시간 넘게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있던 놈이 갑자기 죽을 것처럼 신음을 내길래 깜짝 놀랐네.”
“미안······. 그런데 잠깐만. 5시간?”
“응, 엉덩이 안 아프냐? 너 5시간 동안 똑같은 자세로 있었어. 무슨 기인 대전 하는 줄.”
처음에는 누나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정말 5시간 넘게 심상화에 빠져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뒤늦게 후폭풍이 몰려왔다.
“윽! 허리 아파. 목도 아프고. 엉덩이는 더 아파.”
“이그,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가만있어 봐.”
누나는 내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오늘만 특별히 해 주는 거야.”
잊지 않고 허리도 주먹으로 툭툭 치면서 뭉친 걸 조금이나마 풀어줬다.
“어때? 괜찮아?”
“으, 좀만 더 왼쪽.”
“오케이.”
누나 덕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릿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근데 누나. 내가 이러는 동안 혼자 뭐 했어?”
“뭐하긴. 네 앞에 앉아서 조용히 기다렸지.”
“5시간을?!”
“응, 게임하면 괜히 방해될 거 같아서 그냥 앉아만 있었어. 그러다 졸기도 했고. 아참! 아까 은지 언지도 왔었어.”
안마는 내가 받을 게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깨우지 그랬어.”
“너 원래 한번 그렇게 집중하면 옆에서 총을 쏴도 안 일어나잖아.”
“내가? 내가 언제? 이런 건 오늘 처음인데.”
“······아무튼,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괜히 미안해지네.”
가만있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몇 시간 동안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앉아 있었을 걸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괜찮아. 누나가 원래 기다리는 건 참 잘하잖아. 그래서 어때? 수확은 있었어? 힘 쭉 빼고 하니까 조금 나아?”
“응, 훨씬. 이럴 때 보면 누나가 진짜 내 누나구나 싶다니깐? 확실히 힘을 빼고 하니깐 더 잘 되더라. 대체 어떻게 안 거야?”
“후후. 이 누님이 모르는 게 없지. 네가 내 동생이고, 내가 네 누나잖아. 너에 대한 건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지.”
혜나 누나는 에헴- 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늘은 태클 걸지 않고 다 받아 주어야겠다.
조언은 조언대로 해 주고 고생은 고생대로 시켰으니 말이다.
나는 얼른 집에 갈 준비부터 했다.
“늦었으니까 집에 갈까?”
“너 방금 잘했다면서. 그럼 곡도 떠올렸다는 거 아니야? 잊기 전에 어디라도 적어 놓고 가야지.”
“그렇긴 한데, 너무 시간이 늦었잖아.”
“괜찮아. 어차피 주말인데, 뭐. 그딴 거 신경 쓰지 말고 여기 악보에 다 적어 놔. 나도 보면서 연습 좀 하게. 엄마 아빠한테는 미리 연락해놨어.”
이 말이 맞다. 사실 나도 잊어버리기 전에 여기서 심상화를 통해 본 악상들을 전부 악보에 옮겨 놓고 싶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그렇다니깐~ 나도 이제 노래 좀 불러 보자.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누나는 평소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들을 리스트로 뽑아 놓고 녹음실 안에 들어갔다.
“야, 여기서 노래 부르니까 쩔어.”
나는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녹음실 안에 있는 누나에게 말했다.
“좀 놀고 있어. 난 악보부터 만들어 놓을 테니까.”
이렇게 하니까 꼭 누나는 가수, 나는 프로듀서가 된 것 같았다.
그래.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포지션이다.
앞으로 누나가 부를 모든 노래는 내 머리와 손에서 나오게 될 테니까.
* * *
다음 날 오후, 이은지 디렉터는 우리 둘을 작업실에 앉혀 두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희들 어제 엄청 늦게 들어갔다면서? 연습도 좋지만, 밤늦게까지 있으면 안 돼. 부모님 걱정은 둘째치고, 누가 신고라도 하면 우리 대표님 노동청에 잡혀 들어간다? 뭐, 휴가 삼아 좀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을 거 같긴 하지만.”
나와 혜나 누나는 어제 새벽까지 녹음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악보를 만드는 동안 누나는 여러 노래를 불렀는데, 나중에는 나도 합세해서 노래방에 온 것마냥 빽빽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서, 곡은 좀 만들어 봤어? 새벽까지 그냥 놀기만 한 건 아니지?”
“아, 몇 개 좀 만들어 보긴 했어요.”
“응? 몇 개? 하나가 아니고?”
“네, 한 열 개 정도?”
“여, 열 개라고?”
나는 챙겨온 악보들을 이 감독에게 넘겨주었다.
“아직 다 미완성이에요. 그래도 이것들을 하나로 합치면 좋은 노래가 나올 것 같아서 다 가져왔어요.”
그녀는 하나씩 악보를 확인해 보면서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거 미완성인 거 맞아? 곡은 끝까지 쓴 거 같은데?”
“좀 두서가 없는 곡들이에요. 중간중간 음도 이상한 곳이 많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진 않아요.”
베토벤도 떠오르는 악상을 마구잡이로 휘갈겨 수십 장의 악보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걸 그대로 연주해 보면 괴이하기 짝이 없지만, 그중에서 좋은 것들만 골라내 한곳에 합치면 그제서야 우리가 아는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이었다.
감히 베토벤에 비교할 순 없지만, 이 악보들도 그와 비슷했다.
내가 머릿속에서 보고, 듣고, 직접 느낀 것들을 악보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다.
최대한 기억력을 발휘해 있는 그대로를 써 놓은 것들이라 당연히 하나씩 보면 나사가 몇 개씩 빠진 것처럼 보였다.
“결국 이 10개가 통째로 합쳐져야 곡 하나가 나온다는 거지?”
“아뇨.”
“응?”
“전 고작 10개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감독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적어도 수십 개, 많으면 100개도 각오하고 써야죠.”
어제 하루만 10개의 악보를 썼다.
아니. 단 몇 시간 만에 10개를 쓴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심상화를 통해 계속해서 악상을 떠올린다면 차곡차곡 악보가 모이게 될 테고, 그 안에서 가장 적합한 것들만 골라 쓸 수 있을 터.
곡 하나를 위해 너무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난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와 누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앨범이다.
모든 걸 쏟아부어 후회 없는 곡들을 만들고 싶었다.
잠깐이나마 머릿속에서 본 우리의 찬란한 무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