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55화 >
‘이거 완전 똥 밟은 거 같은데.’
이번 스타 탤런트의 마지막 무대는 황 PD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갔다.
적당히 좋은 그림을 뽑아냈고, 이제 편집자들과 함께 저 아이를 띄어 주는 문구만 영상에 집어넣으면 됐다.
원래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예쁘고 잘생긴 사람과 천부적인 재능을 아낌없이 보여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
연욱이가 그 두 가지 조건에 딱 부합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미리 짜놓은 대본에 따라 프로그램 진행을 완벽하게 이어 나갔는데, 하필이면 저 양반이 초를 치고 말았다.
이용재 작곡가.
연예계에서, 특히 음악 쪽에서는 입김이 상당한 인물이다.
이제 한물간 퇴물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의 영향력을 연예계에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용재 작곡가를 이번 무대의 마무리 투수로 내보낸 것이었다.
그가 몇 마디 해 주는 것만으로도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시청자들이 더 큰 만족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여기까지 와서 무대를 망쳐 놓을 줄은 몰랐다.
‘중간에 확 끊어 버릴 수도 없고······. 곤란하네.’
연예계에서는 대선배이기도 한 사람이라 무작정 커트를 해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걸 알기에 저 다혈질인 강대웅 MC도 이용재를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강대웅은 황 PD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을 정도였다.
‘믿어 보는 수밖에 없겠지?’
한 가지 다행스럽고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면 연욱이가 의연하게 상황을 대처했다는 것이다. 총괄 PD와 MC가 당황하고 있는 가운데, 저 아이는 마치 이걸 예상했다는 듯 침착했다.
그 침착함에 황 PD도, 그리고 강대웅 MC도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겼다. 오히려 이용재의 돌발 행동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그래서 이용재 작곡가를 만류하려던 것을 멈추고 황 PD는 카메라를 연욱이에게 집중시켰다.
‘어디 한번 보여줘 봐라.’
지금부터는 대본이 아닌, 순수 버라이어티였다.
“음, 내가 아무 곡이나 쳐 볼 테니까. 한번 따라 쳐볼래?”
이용재는 클래식 곡 하나를 즉석에서 연주해 보였다.
쇼팽의 녹턴 Op 9-2.
환상의 클래식이라고도 불리는 곡으로, 피아노의 긴박한 표현력과 밀도 높은 정수가 담겨 있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쇼팽의 독창성이 응집된 곡이기 때문에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치고 넘어가게 된다.
“어때? 따라 칠 수 있겠니?”
“네.”
연욱은 이용재가 연주한 녹턴을 똑같이 따라쳤다.
돌발 상황에 잠깐 머뭇거리고 있던 강대웅 MC는 얼른 멘트를 날렸다.
“이야, 선배님이 치신 노래랑 똑같이 연욱이가 치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용재는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당연하죠. 피아노 치는 사람이라면 녹턴을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용재의 대답에 또 한 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강대웅이었다.
이놈이 높디높은 선배만 아니었으면 진작 녹화를 엎어 버렸을 것이다.
“이건 준비 운동에 불과하죠. 제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들려드리는 건 저 이용재만의 해석이 들어간 연주입니다.”
또 한번 연주가 시작된 녹턴.
그러나 이번 녹턴은 박자가 조금 달라지고 중간중간 새로운 음표가 추가된 이용재만의 곡이었다. 지금 저걸 듣고 똑같이 따라 하라는 건가?
처음 들려주었던 녹턴보다 훨씬 박자가 빨라지고 새롭게 편곡이 된 녹턴을? 딱 한 번만 듣고?
‘도대체 이 양반은 왜 이러는 거야?’
아주 자기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이용재를 강대웅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황 PD가 흥미로운 얼굴로 계속 진행하자는 사인을 보내자 섣불리 나서질 못했다.
“어때? 칠 수 있겠니?”
약 2분 동안 연주를 한 이용재는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상대를 깔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강대웅 MC는 여기서 끝이라 생각했다.
대관절 저걸 어떻게 따라 치란 말인가.
피아노에 대해 문외한인 강대웅이지만, 방금 전 곡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저 아이를 짓밟아 버리기 위해 심술을 부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녹화를 계속 진행시키는 건 MC 자격 박탈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저기 슨배님.”
이제 중학교 1학년밖에 안 된 얘한테 히스테리를 부리는 이용재에게 단단히 화가 난 강대웅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런데 그가 판을 엎어 버리려는 찰나에 갑자기 연욱이가 연주를 시작했다.
“······!?”
그 연주를 듣고 강대웅은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눈이 점점 커져가는 이용재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건 패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똑같다.
방금 전 이용재가 들려준 그만의 녹턴이 연욱이의 손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용재의 속마음이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중이었다.
강렬한 템포와 갑작스레 빨라진 리듬을 커버하기 위해 추가된 음표들.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하게 똑같은 연주였다.
눈을 가리고 있었다면 누군가가 녹음한 걸 들려주는 거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설마 진짜 외운 거라고? 딱 한 번 들려준 게 전부인데?’
아니. 아닐 것이다.
한번 들었다고 전부 다 노래를 외워 버리는 게 정녕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물론, 절대음감 중에서 유별나게 뛰어난 놈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즉석에서 들려준 어려운 곡을 똑같이 따라 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을 눈앞에 있는 이 아이가 해내고 있었다.
마치 이건 별로 어렵지도 않다는 것을 과시하듯 말이다.
“다 쳤습니다. 똑같았나요?”
“······.”
천진난만한 얼굴로 묻고 있는 연욱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용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녹턴이란 곡을 이미 알고 있기에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이 칠 수 있을까?
“흠흠. 그, 그럼 이번에는 이걸 한번 쳐볼래?”
이용재는 자신이 최근 매달리고 있던 곡 하나를 연주해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빠른 템포의 곡이었다.
“어때?”
그것만으로도 딱 한 번만 듣고 따라 치기 어려운데, 여러 피아노 기교까지 섞여 들어가 있는 터라 이용재는 이번만큼은 절대 따라 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자신만만한 눈동자를 가려 버리듯, 연욱이는 잠깐 눈을 감더니 이내 피아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시작된 연주에 이용재는 천천히 입을 벌려야만 했다.
‘말도 안 돼. 이걸 어떻게 한번 듣고 칠 수 있는 거지?’
오늘 처음 듣는 완전히 새로운 연주였을 텐데, 저 아이는 미세한 부분까지 따라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열심히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럼 그렇지 하며 이용재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왜 멈춘 거지? 곡을 까먹은 거야? 하긴. 한번 듣고 따라 칠 만한 곡이 아니긴 하지.”
생각처럼 아주 재능이 없는 놈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용재도 여기서 그만 끝을 내려 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그의 피를 거꾸로 솟게 만들었다
“아니요, 다 외우긴 외웠는데요. 중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있어서요.”
“뭐, 뭐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곳?”
“네, 곡이랑 좀 매치가 안 되는 부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연주하기가 썩 내키지 않네요.”
이 건방진 놈이 감히 내 곡을 무시하는 건가?
“그 말은 내가 작곡한 곡이 잘못되었다는 거냐?”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했다.
작곡가에게, 그것도 명성 높은 사람에게 네 곡은 잘못되었다고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만큼 아찔한 것이 또 있을까.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황 PD도 이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얼른 녹화를 중지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연욱이의 대답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곡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아주 잘 만들어진 곡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조금만 더 다듬으면 충분히 더 좋은 곡이 될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
이용재는 아이의 당돌한 모습에 왠지 오기가 들었다.
“그 말은 네가 더 나은 곡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거야?”
“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치면 더 좋지 않을까-하는 의견은 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 좋아. 그럼 어디 한번 쳐봐.”
“네, 먼저 여기 세 번째 마디부터 들려드릴게요.”
“잠깐만. 세 번째 마디? 방금 전 내가 친 곡을 듣고 다 외웠다는 거야?”
“네, 다 외웠습니다. 이제 쳐도 될까요?”
“그, 그래.”
어느샌가 이용재는 뭔가에 홀린 듯이 주도권을 연욱이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는 높은 장조보다 차라리 낮은 단조로 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째서?”
“선생님께서 이 곡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요.”
“내가 하고 싶은 말? 그게 뭔데?”
“저 밑바닥까지 추락한 한 사람이 다시 한번 위로 올라가면서 용기와 희망을 품는······. 그런 스토리가 담긴 곡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번에도 이용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의미의 웃음이었다.
이 곡은 이용재 본인의 신세 한탄이 담겨 있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다시 한번 정상으로 가고자 하는 그의 이야기가 담긴 노래라는 것이다.
“그걸 고작 한 번만 듣고 파악했다고?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글쎄요. 전 그냥 들리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이용재는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놀라움을 넘어 공포마저 느끼게 하는 재능이란 것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이 얼마나 하찮고 옹이구멍 같은 건지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런 위대한 재능을 품은 아이를 보고 그저 방송국에서 만들어낸 가짜 천재라고 생각했다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다음은 어떻게 고쳤으면 하는데?”
이용재는 진지하게 연욱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누군가를 뭉개버리겠다는 불순한 의도는 없어진 지 오래다.
“음, 이 부분에서는 말이죠······.”
장연욱은 상대의 처음 의도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진심이 담긴 피드백을 해 주었다.
원래 쉬지 않고 멘트를 날려야 할 MC와 패널들은 왠지 두 사람 주변에 아우라가 흐르는 것 같아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황 PD 역시 이 광경이 매우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훈훈함을 넘어 정말 열성 높은 예술가 두 명이 합심하여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기, 선생님.”
이러다가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피드백만 듣다가 방송이 끝날 것 같아 강대웅 MC가 나섰다.
“아, 미안합니다. 이게 방송이라는 걸 잠깐 까먹을 정도로 몰입해 있었네.”
녹화를 시작하고 나서 줄곧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용재의 얼굴이 지금은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강대웅 MC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번 더 멘트를 던져 보았다.
“어떻습니까? 선생님은 오늘 우리의 마지막 참가자가 정말 천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용재는 아직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연욱이를 힐끔 바라보다 다시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아니요.”
“네?”
“아까 그러셨죠? 우리나라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전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양반이 끝까지 초를 치는구나.
강대웅 MC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질 때쯤이었다.
이용재가 한 층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는 단순히 우리나라에서만의 천재가 아닙니다. 분명 세계를 놀라게 할, 아니. 세계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음악 천재가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