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54화 >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새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방송국의 배려로 대기실에 있으면서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가 있었는데, 가지각색의 재능을 가진 참가자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무대를 만들어나갔다.
“원래 이 중에서 1/3은 잘려 나간다며?”
“으-. 애써 나왔는데 통편집되면 진짜 짜증 나겠다.”
나는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조금 엿들을 수 있었다.
재미가 없거나, 혹은 방송에 문제가 되는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편집해 버리는 모양이다. 여기서 몇 시간 동안 죽치고 앉아 있다가 겨우 카메라 앞에 섰는데 막상 방송에는 나오지도 않으면 많이 섭섭할 거 같긴 하다.
“근데 저기 앉아 있는 사람, 아까 강대웅이랑 한참 얘기하던데.”
“혹시 아는 사람인가?”
“PD랑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얼굴 진짜 잘생겼다. 혹시 무명 연예인 뭐 그런 건가? 아직 많이 어려 보이는데.”
뒤에서 참가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금 들려왔다.
나는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걸러 들으며 방송 화면에 집중했다.
촬영 날짜가 잡히고 나서부터 스타 탤런트를 몇 개 돌려보며 모니터링도 했었다.
대충 어떤 분위기로 흘러가는지 파악하고자 했고, 고정 패널들의 성향도 함께 분석했다. 그래야 그들이 던지는 멘트에 잘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방송용으로 편집된 것과 직접 녹화하는 걸 보는 건 차원이 달랐다.
중간중간 마음에 들지 않는 멘트가 나오면 강대웅 MC가 바로 커트를 해 버리고, 가끔씩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상황도 연출됐다.
“잠깐만요. 방금 전 장면은 없던 걸로 편집할 거니까, 다시 멘트 쳐 주세요.”
그럴 땐 PD가 갑자기 끼어들어 다시 한번 상황을 연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저렇게 한 번씩 조절을 해 주면 MC와 패널들은 마치 없었던 일인 것마냥 반응하고 움직였다. 그러자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들은 저마다 탄식을 터트렸다.
“와, 저거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네.”
“완전 짜고 치는 건 아니지만, PD가 중간에 녹화 중단하고 다시 연출하게 하는 건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들도 내심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방송에서 봤을 땐 그냥 버라이어티처럼 상황이 흘러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방송에 100% 버라이어티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방송이 중구난방 흩뜨려질 게 뻔하기 때문에 그냥 상황이 알아서 흘러가게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씁쓸하네.’
저런 장면을 한번 보고 나니, 갑자기 패널들의 리액션이 전부 과대포장 된 거짓으로 보였다. 방송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좀 찝찝한 기분이랄까.
내가 저기 무대에 올라가봤자 어차피 저들은 놀랍지도 않으면서 놀란 척을 하며 과한 리액션을 보여 줄 것이다. 또 그거에 맞춰 나도 미소를 날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질없는 짓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발을 담그고 살아야 하는 세계다.
어쩌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저번 생처럼 후회 가득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은 행복한 나날만 보내며 최대한 즐기고 싶었다.
이번 방송도 똑같다.
날조든, 저들의 리액션이 거짓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난 최선을 다해 보여 줄 걸 전부 보여 주고 즐기면서 방송을 마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붙잡고 나니 기분이 괜찮아졌다.
정말 순수하게 방송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다음 차례가 마지막이니까, 다들 15분 동안 휴식하겠습니다.”
긴 대기 시간 끝에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재밌는 장면들이 꽤 많이 나와서 그리 지루한 대기 시간은 아니었다.
“장연욱 씨. 이제 준비할게요.”
패널들이 휴식을 취할 동안 나는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기 위해 준비에 돌입했다.
거창하게는 아니더라도 조금 메이크업을 받고 다시 한번 동선을 숙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벌써 15분이 후딱 지나갔다.
“자! 아쉽게도 마지막 참가자입니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나서 제자리로 돌아온 강대웅 MC의 멘트에 패널들은 아쉬움을 드러내는 리액션을 보여 주었다.
“여러분. 음악 천재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모차르트!”
“베토벤이요!”
“여기 이용재 선배님도 계십니다!”
짜여진 대본 대로 대답하자 강대웅 MC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이제 그 이름을 대신할 참가자가 오늘 스타 탤런트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오~!”
“소개합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환생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천재 피아니스트!”
사방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웅장한 음악이 함께 흘러나왔다.
뭔가 낯 뜨거운 등장이 아닐 수 없었지만,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무대로 나갔다.
“와아~!”
환호성으로 나를 반겨주는 패널들과 방청객들이었다.
“잘생겼다~!”
“와, 진짜네? 엄청 잘생겼잖아.”
“음악 천재가 아니라 얼굴 천재로 나온 거 아니에요?”
나는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경서중학교 1학년 장연욱이라고 합니다.”
“중학교 1학년?”
“벌써부터 방송에서 나이 속이면 안 돼~”
술렁이는 패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강대웅이 나섰다.
“여러분, 요즘 학생들은 성장이 엄청 빠르다잖습니까. 저 강대웅도 중학생 땐 엄청 작았습니더. 난 아직도 자라고 있다니까요?”
“그거 매일 밤에 라면 먹어서 자란 살 아닙니까?”
“하하.”
원래 예능이란 게 쓸데없는 얘기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지만, 생긴 걸로 하루 종일 떠들 기세였다.
PD가 얼른 진행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강대웅 MC는 농담을 멈추고 방송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자, 방송에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이번 참가자가 음악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미리 짜여진 동선을 따라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여러 악보를 섞은 곡을 쳐 나가면서 피아노 기교를 몇 가지 보여 주었다.
“오~”
“잘 친다.”
“인물이 멋있으니까 피아노 듣는 맛이 더 나는 거 같아.”
나는 더 반응을 끌어올리고자 준비한 안대를 꺼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패널들을 향해 말했다.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어머, 눈을 가린 채로?”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 가능하겠어요?”
한 명씩 듣고 싶어 하는 곡을 말하고, 나는 짧게 연주해 주며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당연히 패널들은 과한 리액션을 보여 주며 사방에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강대웅 MC는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는지 녹화장 전체가 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눈 감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사실 식상합니다. 그것만으로 천재라고 할 수 없죠. 하지만 우리 참가자는 그 어떤 노래를 한 번만 듣고도 다 외우고, 심지어 그걸 연주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진짜요?”
“에이- 설마.”
“정말입니다. 여러분. 괜히 대한민국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감히 소개했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제대로 보여······.”
강대웅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줄곧 굳은 얼굴로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이용재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제가 테스트 해 봐도 됩니까?”
순간 강대웅 MC가 당황한 게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이미 리허설을 통해 누가 어디서 멘트를 치고 또 참가자가 언제 무엇을 보여 줄지 정해 놓았다. 그런데 방금 전 이용재의 발언은 대본에 없던 것이었다.
“어······. 이용재 작곡가님께서요?”
강대웅 MC는 힐끔 PD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황 PD도 갑작스러운 이재용 작곡가의 돌발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는다면서요. 그런 천부적인 재능이 정말로 있다면 제가 검증해 봐도 괜찮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우리나라 음악 발전을 위해서 말이죠.”
“흠흠. 그, 그렇죠. 이용재 작곡가님께서는 많은 히트곡을 내신 분이 아닙니까. 여러 악기도 자유자재로 다루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래서 오늘 더더욱 이번 참가자에게 눈길이 가는군요. 꼭 한번 장연욱 군의 음악 재능을 이 자리에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강대웅 MC는 재차 황 PD에게 눈길을 보냈다.
이걸 잘라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진행을 해야 할지 서로 신호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황 PD는 시선을 내게 옮겼다.
마치 내 결정에 따르겠다는 듯한 눈동자였다.
이용재 작곡가라.
원래는 가수였다가 아예 작곡의 길로 빠져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대한민국에 손꼽히는 작곡가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트렌드에는 맞지 않는 작곡 성향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도 많지만 그래도 톱급 작곡가인 건 부정 못 할 사실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뭐가 아니꼬웠던 건지 태클을 걸어왔다.
“저야 영광입니다.”
나는 PD에게 신호를 보내는 대신, 직접 이용재 작곡가에게 대답했다.
그는 힐끗 웃으며 내가 앉아 있는 피아노 쪽으로 다가왔다.
“그럼 내가 연주 하나 해 볼 테니까, 그걸 듣고 한번 따라 쳐 볼래요?”
뭔가 꿍꿍이가 있는 음흉한 눈빛이었다.
***
‘대체 사람들이 왜 이딴 프로를 보는지 모르겠군.’
이용재 작곡가는 오늘 녹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녹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별로였다.
전혀 인연도 없는 PD가 갑자기 스타 탤런트에 나와 달라며 섭외 요청을 넣었는데, 미팅을 해 보니 그 이유가 우습게도 어떤 어린놈 하나를 띄어주기 위함이었다.
즉, 들러리를 세우기 위해 불렀다는 건데 그런 PD의 생각이 괘씸하기도 하고 또 감히 음악 천재라는 타이틀로 나오는 놈의 면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자는 마음에 출연을 수락했다.
“그냥 참 잘한다, 대단하다라는 말로 칭찬만 해 주시면 됩니다.”
“뭐, 칭찬할 게 있어야 칭찬을 할 텐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입니다. 직접 보시면 아실 거예요.”
녹화 전 미팅을 통해 만난 황 PD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린 이용재는 녹화장에 와서 참가자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남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저놈이 그놈이라는 걸 알아챘다.
“얼굴은 봐줄 만하네.”
찌푸려진 미간이 절로 풀려질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지만, 이용재 눈에는 그저 괘씸한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트렌트에 맞지 않는 곡만 낸다며 대중들의 비난이 거세졌다. 그래서 자연스레 은퇴 수순을 밟고 있는 스스로가 못마땅하고 그냥 세상이 다 싫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런 와중에 황 PD가 들러리를 시키려고 프로그램에 초청을 했으니, 어떻게 저 아이를 곱게 볼 수 있을까.
‘그냥은 못 돌아가지.’
황 PD는 칭찬 몇 마디 해 주면 알아서 편집자들이 잘 포장해 줄 거라고 했지만, 그런 꼴을 보자고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천재랍시고 소속사를 등에 업고 나타난 놈의 높은 콧대를 뭉개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적절한 때가 오기를 말이다.
그리고 기다리던 그때가 왔다.
“제가 한번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PD와 MC, 둘 다 모두 크게 당황했지만, 섣불리 거절하진 못했다.
작곡가이기는 하나, 연예계에서도 사실상 대선배였기 때문에 면전에서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걸 이용재도 알고 있기에 의표를 찌른 것이었다.
“저야 영광이죠.”
이대로 PD나 MC가 어떻게든 수습을 할 수 있었지만, 저 건방진 놈이 순순히 도발을 받아들였다. 전혀 대본에도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더욱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고작 14살밖에 안 된 놈에게 이러는 꼴이 우습기도 했지만, 꼬랑지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이빨을 드러내는 놈 앞에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이용재는 이제 곧 박살이 나 버릴 어린놈의 멀끔한 면상을 눈에 각인시킨 뒤 피아노에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