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44화 (44/200)

<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44화 >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로 뽑히는 유명한 대회다.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 성악.

이렇게 4가지의 부문으로 진행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없이 도전했지만, 성악과 작곡 부문을 제외하고는 1위한 적이 없다.

하지만 20살이란 나이에 손지연은 당당히 피아노 부문 1위를 달성하게 되며 그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된다.

“저번에 초콜릿 준 거 잘 먹었어.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네.”

그런 유명하신, 아니. 유명해지실 분이지만 지금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다.

“난 지연이라고 해. 넌 연욱이지?”

“어떻게 알았어? 명찰 보고 알았나?”

“아니, 주변에서 네 이야기를 많이 해서 자연스레 알게 됐어. 나 레슨해 주시는 교수님도 그렇고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네 얘기 몇 번 하는 걸 들었어.”

그러면서 손지연은 슬쩍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피아노 배운지 3년도 안 됐다면서? 정말이야?”

“응, 아직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지. 근데 혹시 몇 살이니?”

유교 사상이 깊히 뿌리 박혀 있는 나로서는 감히 연장자에게 대뜸 반말을 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너랑 똑같이 12살이야.”

손지연이 나랑 동갑이었나?

시간을 계산해 보면 얼추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여기 너무 조용하지 않아?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

“혹시 오늘 무슨 곡 준비했어?”

“이따 본선 끝나면 뭐 할 거야?”

“이번 콩쿠르 끝나면 다른 콩쿠르도 나갈 생각이야?”

저번 생에서 영상을 통해 손지연을 접했을 땐 그냥 우아한 공주를 보는 것만 같았다.

피아노를 치는 모습도 왠지 고급스러워 보였고 말을 걸어도 잘 대답해 주지 않을 것만 같은 차가운 매력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별명도 아름다운 얼음 공주라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완전히 반대였다.

“나는 오늘 베토벤 곡을 준비했어. 연습도 엄청 오래 했던 거 있지? 우리 교수님은 되게 엄하시거든. 부모님도 내가 피아노 안 치고 노는 걸 싫어하셔서······.”

손지연은 연습 벌레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원해서 연습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변에서 강제로 시키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표정을 보면 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만 해주다 침울해 있는 손지연에게 물었다.

“그래서 힘들어?”

“응? 힘들긴 해도 피아노 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다행이네. 하지만 어느 날 피아노 치는 게 너무 힘들면 부모님한테 꼭 말해야 돼.”

“어떻게?”

“뭐?”

“힘들 때 어떻게 부모님한테 말해야 하는데?”

“그거야······. 피아노 치는 거 더럽게 힘드니까 그만 좀 시키라고?”

어린애한테 너무 직설적이었나.

하지만 손지연은 풉 웃으며 반응을 보였다.

“정말 그렇게 말해도 돼?”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야지. 그런데도 너한테 피아노를 강요한다면 그건 부모님의 문제고. 힘들다는 걸 숨기는 건 멍청한 짓이야.”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괜한 말해준 건가 싶었지만, 저 예쁜 얼굴로 슬픈 표정을 지으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자, 다음은 손지연 참가자? 준비해 주세요.”

“어! 내 차례다. 나 먼저 하고 올게, 연욱아.”

“잘하고 와. 파이팅.”

“고마워.”

응원 한 마디 곁들어주자 손지연은 배시시 웃으며 스태프의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옆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대던 손지연이 사라지자 거짓말같이 무거운 적막함이 찾아왔다. 그리고 왠지 주변에서 나를 노려보는 남자아이들의 시선이 한층 더 따가워진 것만 같았다.

***

내 본선 순번은 중간이었다.

앞에 있던 아이들이 어떤 곡을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준비한 곡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이번 콩쿠르 본선은 곡 선정이 자유로웠지만, 대다수 비슷한 곡을 가져와 치기 일쑤였다.

아이들이 치기에 어렵지 않고 여러 테크닉을 선보일 수 있는 곡들을 가져오는 건 일반적인데, 이창호 교수는 이런 일반화를 깨뜨리고 남들이 콩쿠르에서 잘 치지 않는 곡을 연습시켰다.

“오, 이 곡은······.”

‘반짝반짝 작은 별’로 잘 알려진 모차르트의 ‘아! 어머님께 말씀드리죠’ 12번 변주곡이다.

누구나 들으면 아는 곡이고, 무척 쉬울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악보를 보면 기겁부터 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곡은 워낙 많은 기교가 섞여 있고 템포도 빠르기 때문에 9분이라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양손을 움직여야만 한다.

물론, 콩쿠르 특성상 본무대인 본선 2차가 아닌 이상, 3~5분 정도에 커트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치진 않을 것 같았다.

“아는 노래가 나오니까 잠이 확 깨네.”

“음, 이 곡은 되게 오랜만에 들어보는데?”

“원래 콩쿠르에서 저런 곡이 나왔던 적이 있었나?”

청중들이 조금 웅성거리면서 내 곡을 감상했다.

심사위원들도 내 선곡이 의외였는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곡이 중반 정도에 다다랐을 때였다.

끝에 갈수록 더 많은 기교를 모차르트가 섞어 놓은 터라 곡이 한층 더 빨라진 느낌을 주었다.

잠깐 천천히 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금세 빠른 템포로 돌아갔다.

이 정도 쳤으면 심사위원들이 알아서 연주를 멈추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9분 동안 쉬지 않고 연주를 했고, 끝까지 치고서야 무대를 마칠 수 있었다.

곡의 끝을 알리는 듯 마지막 부분을 세게 치며 손을 떼자 멍하니 내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청중들이 박수를 보냈다.

“브라보!”

그중에는 개인 연주회에서나 들을 법한 브라보 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들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심사위원 중 하나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장연욱 참가자. 그 곡을 콩쿠르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잘 들었습니다.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대 위를 내려왔다.

결과야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지만, 저기 어딘가에 앉아 있을 부모님이 오늘 내 연주를 보고 뿌듯한 마음을 가지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

“저 아이죠?”

“네, 이창호 교수가 키우고 있다는 그 아이가 맞습니다.”

연욱의 무대가 끝나고 나서 심사위원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참 그 양반도 대단하네요. 어디서 저런 보석을 데리고 왔는지.”

“저도 이창호 교수가 콩쿠르에 초등학생 하나를 데려왔다는 얘기를 듣고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번 예선 때도 그렇고 오늘 본선 1차 무대를 보니 알겠네요.”

“피아노 배운지 3년도 안 됐다는 얘기가 있던데, 저게 과연 고작 3년 만에 이뤄낼 수 있는 기교인지······.”

“아니겠죠. 적어도 10년 가까이 쳤을 거예요.”

그들 중 한 명은 완전히 장연욱에게 빠져든 듯해 보였다.

“이런 말 하기 좀 뭐하긴 하지만, 참 잘생기지 않았어요? 영화에서 나오는 거 보고 정말 크게 될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모든 활동을 멈춰서 많이 아쉬웠거든요. 그런데 설마 콩쿠르에서 저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음, 확실히 연주도 뛰어나고 전체적인 비율도 훌륭해서 그런지 더 연주가 맛깔나게 들리는 것도 있었어요.”

“듣는 귀도 있지만, 보는 눈도 즐겁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군요. 하지만 심사를 맡은 이상, 귀로만 평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귀로도 만족도가 매우 높았으니 하는 말이죠. 설마 콩쿠르에서 모차르트 12번 변주곡을 가져올 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모로 심사위원들에게 충격을 준 무대였음은 확실했다.

이미 예선 무대에서부터 빛을 발한 참가자들이 몇몇 있다. 그런 그들이 본선에서 어떤 무대를 보여 줄까 기대가 매우 컸는데, 그들은 벌써 2명을 따로 표시해 두었다.

“이 두 참가자가 다른 참가자들보다 월등하지 않습니까?”

“동감합니다.”

장연욱, 그리고 손지연.

심사위원들은 이번 콩쿠르가 이 둘을 위한 무대가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벌써 이 둘의 마지막 무대가 기대됐다.

***

“연욱아~!”

내가 나오기를 줄곧 기다리셨던 가족들을 향해 뛰어갔다.

“너무 고생 많았어.”

“그래, 진짜 잘 치더라. 당신도 들었지? 청중들이 막 연욱이한테 박수 치고 브라보 외치는 거.”

청중들의 반응은 나도 의외였다.

본선 1차까지는 청중들이 대다수 참가자 부모님들이기 때문에 남의 연주를 칭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맞아. 처음에는 다들 무섭게 노려만 보더니, 연주 끝나니까 박수 쳐 주는 거 보고 소름 돋았잖아. 이게 다 우리 아들이 연주를 잘했기 때문이지. 호호.”

어머니에 이어 혜나 누나가 내 목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그냥 네가 제일 잘했어.”

“그래?”

“웅, 우리 동생처럼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니?”

끝으로 이창호 교수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오늘 본선 결과는 보나마나야.”

“김칫국 마셔도 되는 거예요?”

“하하. 그냥 통째로 드링킹해도 돼! 이걸 떨어뜨리면 심사위원들 귀가 다 똥인 게지. 아니면 무슨 비리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걱정할 필요 없을 거 같다. 무조건 통과일 테니까. 내일부터 착실하게 마지막 무대 준비하자.”

결과는 오늘 당장 나오지 않고 이틀 후에 나온다고 들었다.

심사위원들이 오늘 본선 무대를 녹화한 영상을 다시 보고 채점해야 할 테니까.

“아버님, 어머님. 저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가족들끼리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어머. 교수님.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

“오늘 다른 교수들이랑 식사하기로 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우리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교수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이창호 교수를 보며 나와 혜나 누나가 귓속말을 나누었다.

“뻥 같지?”

“응, 분명 또 교수님들이 도망갈 거 같은데.”

갑자기 초라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저러다 오늘 혼자 청승맞게 깡소주를 까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갈까?”

“우리 아들 뭐 먹고 싶어? 다 말해 봐.”

어떤 맛있는 걸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지 행복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연욱아~”

그때 누군가가 나를 다급하게 부르며 우다다 뛰어오는 게 보였다.

다름 아닌 손지연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 그 아이네. 아까 당신이 엄청 잘 친다고 칭찬했던······.”

“맞네. 근데 연욱이랑 아는 사이인 거 같은데?”

부모님은 인사를 하는 손지연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기묘한 눈빛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응, 이거.”

손지연이 건넨 건 핸드폰이었다.

“아까 물어보려 했는데 갑자기 무대로 올라가느라 못 물어봤어. 번호 좀 줄래?”

“음... 그래.”

난 대수롭지 않게 번호를 주었다.

나중에 국제 콩쿠르까지 우승하는 우리나라 여성 최고의 피아니스트와 친분을 쌓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마워. 오늘 무대 봤는데, 엄청 잘하더라.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응, 너도 잘하더라.”

사실 오늘 손지연이 연주하는 무대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잘했을 거 같았다.

손지연은 그 외에도 이런저런 말을 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부모님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응? 호호. 아니야. 괜찮아.”

“연욱아. 내가 또 연락할게. 잘 가~!”

우다다 달려와서는 다시 우다다 왔던 길로 돌아가는 손지연이었다.

부모님은 그 모습이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다.

“얘가 엄청 귀엽네.”

“그치? 얼굴도 예쁘고. 말하는 것도 참 예의 바르네. 거기다 피아노도 잘 치는데 나중에 진짜 유명한 피아니스트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 거기다 우리 연욱이한테 관심이 참 많은 거 같아 보이고.”

부모님이 나누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넘기며 나는 그만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헉.”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나서 나는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혜나 누나가 무섭게 치켜뜬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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