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43화 >
“둘 다 오늘 고생 많았어. 진짜 안 데려다줘도 돼?”
“괜찮아요. 저희 아까 왔던 대로 버스나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우린 집까지 태워 주겠다는 걸 정중히 사양하고 기획사 건물에서 나왔다.
혜나 누나는 테헤란로를 구경하면서 지나가듯 물었다.
“오늘 잘한 거 같지?”
잘하다마다.
거기 사람들 표정을 혜나 누나가 봤어야 했는데.
“응, 엄청 잘했어.”
“근데 어째 나보다 네가 더 잘한 거 같다.”
“내가?”
“그 이은지 감독님 있잖아. 너한테 완전 푹 빠진 거 같던데?”
“음, 내가 좀 여심을 울리는 스타일이긴 하지.”
“······에취!”
갑자기 혜나 누나가 연신 재채기를 터트리며 말했다.
“미안, 내가 개소리 알러지가 있어서.”
누나 말대로 이은지 디렉터가 내게 유독 관심을 보이긴 했다.
악보를 만지면서 내가 거슬리는 구간을 하나씩 수정해 나갈 때마다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니 말이다.
“이러다 그쪽에서 계약하자고 너한테 달려드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은 가수를 키우려는 거 같던데.”
“왜~? 너처럼 재능 있는 작곡가를 키우려는 것일 수도 있지.”
글쎄. 거기서 원하는 건 혜나 누나와 같이 재능 있는 가수를 원하는 것 같았다.
과연 그쪽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할까?
* * *
“이 감독. 어때? 괜찮았어?”
아이들을 배웅하고 나서 녹음실로 돌아온 강 대표의 눈빛은 기대 만발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방금 보여 준 남매의 퍼포먼스는 기대 이상이었으니까.
이은지 디렉터는 펜으로 상을 톡톡 두드리다 말했다.
“감독님. 감독님은 혜나 혼자만 데려오려는 거죠?”
“응? 그거야 혜나가 나중에 좀 더 커서 솔로 가수로 데뷔하면 그 특색 있는 목소리로 뜰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연욱이는 뭔가······ 배우 쪽에 맞다고 해야 하나? 어마어마하게 잘생기긴 했잖아. 근데 그 애는 소속사에 들어가서 배우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이더라고. 들어 보니까 콩쿠르 준비 중이라던데? 서울대 교수님한테 레슨도 받고 있고.”
“서울대 교수? 누구요?”
“이창······ 무슨 교수님이었던 거 같은데.”
“이창호 교수님!”
“오! 맞아. 어떻게 알았어?”
“피아노 전공한 사람 중에 이창호 교수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이은지 디렉터였다. 몇 번 신호음이 가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 갑자기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변했다.
“응~ 대호야. 나 은지야.”
- 엥? 네가 전화를 다 걸고 무슨 일이냐? 뭔 일 났냐?
“뭐긴 뭐야. 그냥 안부 전화지.”
- 어이구, 네가 잘도 안부 전화를 하겠다. 무슨 일인데?
대충 신변잡기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은지 디렉터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이창호 교수님이 초등학생 하나 키우고 계시니?”
- 어떻게 알았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한동안 난리였어.
“난리? 무슨 난리?”
- 이번에 신영 주니어 콩쿠르 하고 있거든. 어린애는 키우지도 않던 양반이 갑자기 거기에 초등학생 하나를 떡하니 데려온 거 있지?
오랜 친구인 이은지와 간만에 통화를 하면서 양대호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주저리 떠들어댔다.
- 피아노 배운지 딱 2년밖에 안 된 초짜라면서 긴장할 필요 없다고 다른 교수들을 안심시키더니, 싹 다 뒤통수를 때리더라.
“뒤통수?”
- 응, 예선이긴 했는데, 그 애가 올라와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니까 다들 표정이 엄청 어두워지더라고. 나도 그때 들어봤는데, 절대 2년 배워서 나올 수 있는 짬이 아니었어. 이런 말 하기 좀 뭐하지만, 드럽게 잘 치더라고. 안심하고 있던 교수들만 새 된 거지.
흥미로운 얘기의 연속이었다.
연욱이라는 아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직감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업계에서 알려진 아이일 줄은 몰랐다.
“이창호 교수님이 괜히 데려다 키운 게 아니라는 거네?”
- 그치. 그 양반이 엄청 깐깐하잖아. 교수 레슨도 거의 안 하려고 하고. 최근에 키우는 제자도 없다고 했는데, 애들 노는 곳에 뜬금없이 나타나서 다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 버린 거지.
“이창호 교수님이 쑥대밭으로 만든 거겠니? 다 연욱이가 한 거지.”
- 연욱이?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냐. 혹시 너 그 애랑 아는 사이야?
“끊는다.”
- 야! 잠깐······.
둘의 통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강 대표는 이은지가 재빨리 전화를 끊어 버리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감독. 뭐 좀 알아냈어?”
“대표님.”
“응.”
“혜나랑은 계약하실 거죠?”
“해야지. 굴러온 복덩이를 차 버릴 순 없잖아? 비주얼도 합격이고 목소리도 합격인데.”
“그거 다되는 사람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요.”
이은지 디렉터 말이 맞다.
얼굴 예쁘고 노래 잘하는 놈들은 세상에 참 많다. 그러나 그중 모래알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만이 정상으로 올라갈 수가 있다.
“사람 띄우는 건 나한테 맡겨. 이 감독이랑 박 트레이너가 잘 키워서 보내주기만 하면 돼. 마케팅은 내 역할이니까.”
“좋아요. 그럼, 혜나는 저희가 잘 키워볼게요. 잘 키워서 광고도 적절하게 해주면 충분히 스타될 가능성이 높은 아이에요.”
혜나가 노래를 부르는 걸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미 합격이었다.
그 아이는 조금만 다듬어 주면 가수로써 큰 부각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이은지 디렉터의 관심사는 혜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 연욱이랑은 계약할 생각 없으세요?”
“응? 연욱이랑?”
“네. 그 아이도 꼭 한번 키워보고 싶은데.”
“하하, 진짜? 이 감독이 그 정도로 탐이 난단 말이지?”
“작곡할 때 피아노 잘 치면 좋은 거 아시죠? 거기다 연욱이는 작곡에 센스가 있어요. 제 예상이긴 하지만, 절대음감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거슬린다고 표현을 하는 거죠.”
“오~ 절대음감. 혹시 이 감독도?”
“전 상대음감이에요. 연욱이처럼 선천적 절대음감은 남들이 듣지 못하는 걸 듣는 세계가 있다고 들었어요. 거기다 음악적 센스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죠.”
무척 욕심이 나는 아이였다.
남에게는 잘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한 아이의 재능에 큰 관심이 생겼고 꼭 한번 키워보고 싶다는 열정도 생겨났다.
내가 원래 남을 가르치고 키우는 걸 좋아했던가? 라는 순수한 의문이 들 정도로 이은지 디렉터는 이런 자신의 마음이 익숙하지 않았다.
“최종 결정은 대표님이시니까요. 좋을 대로 결정하세요.”
“잠깐. 그거 협박 아니지? 연욱이를 같이 안 데려오면 혜나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는······.”
“안 그래요. 혜나도 옆에서 쭉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휴. 그럼 다행이고. 사실, 연욱이를 우리 기획사에 데려온다고 한들 이 감독은 그 애를 연예인으로 키우려는 게 아니잖아.”
“꼭 연예인이 되라는 법은 없죠. 하지만 회사를 위해서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비주얼도 끝내주고, 노래도 잘 부른다면서요? 잘 키워서 아이돌 그룹에 넣어도 괜찮잖아요. 그러면서 작곡도 틈틈이 하고. 얼마나 좋아요?”
연욱이를 아이돌 그룹에?
그럼 얘가 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때 줄곧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박성호 트레이너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이건 어때요?”
“뭐?”
“연욱이랑 혜나, 두 사람을 한 세트로 묶어서 데뷔를 시키는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한 세트라니.”
“그러니까 남매 그룹으로 가자는 거죠. 이 감독님은 연욱이가 작곡에 재능이 있다고 보는 거잖아요. 그럼 연욱이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작곡을 해주면 혜나는 그걸 따라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남매 그룹?
이제까지 남매 그룹이 나온 적은 몇 번 있지만, 큰 성공을 거둔 사례는 없었다.
잠깐 이슈를 끌다 사라지는 게 대부분이다.
“남매 그룹? 과연 먹힐까? 그리고 나는 애초에 혜나를 솔로로 데뷔시키려 했던 건데.”
“그렇게 따지면 솔로 여가수도 성공하긴 힘들잖아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혜나와 연욱이, 둘 다 얼굴이 미쳤잖아요. 그런데 저 두 얼굴이 남매라고 하면 사람들이 더 열광하지 않겠어요? 사실 대표님도 혜나가 얼굴이 되니까 솔로로 밀어 보려고 한 거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어떤 나라든 노래 실력만으로 성공하기 힘들다. 설사 성공했다고 해도 비주얼이 좋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또 흥행 차이가 나뉜다.
그래서 강 대표가 혜나를 솔로로 데뷔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저 비주얼에, 특색 있는 음색으로 밀고 나간다면 충분히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 전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옆에 연욱이가 낀다면?
“연욱이가 옆에서 기타 좀 쳐 주고 몇 번 화음도 같이 맞춰 주면 사실상 메인 보컬은 혜나라고 봐야겠죠. 남매 그룹으로 나오다가 생각보다 별로다 싶으면 대표님 원하는 대로 혜나 혼자 앨범을 내도 괜찮고요.”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 보자는 건가.
“남매 그룹이라······.”
굳이 아이돌로 데뷔시키는 게 아니라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남매 그룹을 진출시킨다면 연욱이가 많이 클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소한 중학생 때 데뷔를 시켜도 괜찮을 테니까.
“한번 생각은 해 보자. 좋은 아이디어 같으니까.”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남매 그룹.
잘만 하면 대한민국 연예계 역사상 전례 없는 스타 남매 그룹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연욱아, 떨 필요 없어. 알겠지?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알아서 잘 칠 수 있을 거라고 엄마는 믿어.”
“······.”
“우리 연욱이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정말이야. 긴장할 필요 없어.”
“엄마.”
“으응?”
“저보다 엄마가 더 떨고 있는 거 같은데요?”
“내, 내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어머니는 잘게 떨던 손을 감추며 한숨을 내쉬셨다.
“어휴.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어야 하나. 어떻게 내가 더 긴장을 하는 건지 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당신은 얘들 뮤지컬 할 때도 매번 벌벌 떨었잖아. 마지막 공연 때도 그러더라. 하하.”
뮤지컬 무대.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린 곳이다. 가끔 배우들한테 안부 전화가 오긴 하는데,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시며 말했다.
“우리 아들. 잘하고 와라.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아빠가 응원할게.”
그런 아버지의 등을 어머니가 살짝 때리셨다.
“당신은 이런 곳만 오면 졸잖아. 저번에 클래식 음악회 갔을 때도 음악 시작하자마자 쿨쿨 자더니.”
“흠흠. 그건 피곤해서 그런 거고. 오늘은 절대 안 졸아. 걱정 마.”
편히 쉬어야 할 주말에 아들 때문에 여기까지 나오시게 만든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래도 혼자 오는 것보다 부모님의 응원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이 한결 더 마음이 가벼웠다.
“연욱아. 잘하고 와. 혹시라도 긴장되면 이 누나의 예쁜 얼굴을 상상해 보렴. 아니면 내가 어제 잘 나온 셀카 몇 장 있는데, 그거라도 줄까?”
“됐어.”
하마터면 한번 줘봐 라는 말을 할 뻔했다.
뭐, 내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잘 나온 사진이 있으면 나한테 매번 보내주는 게 일상이긴 했다.
나는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이창호 교수는 오늘 특별 강의가 있어 조금 늦게 온다고 했다.
“10분 후에 시작하니까 모두 조용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스태프들은 혹시라도 아이들이 대기실 안에서 떠들며 돌아다닐까 봐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기 아이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아니다.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피아노 세계에 들어와 치열한 경쟁을 하며 전장을 뚫고 온 용사들이지 않은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당장이라도 맹수처럼 물어뜯을 듯이 날카로웠다.
에휴, 오늘도 이 답답한 공기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안녕?”
“응? 아. 그래. 안녕?”
저번에 내가 초콜릿을 건네준 내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오늘은 아이의 명찰에 쓰인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손지연.
훗날 우리나라에서 여성 최초로 국제 콩쿠르를 우승하게 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