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41화 >
“음-.”
이창호 교수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땐 내가 저번 삶에서 만나본 교수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한껏 진지한 얼굴로 내가 가져온 악보를 스윽 훑어보고는 그 자리에서 양파처럼 나를 사정없이 까 버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 생과 달랐다.
이창호 교수는 한참 동안 내 악보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작곡을 독학으로 배웠다고?”
“네, 그냥 인터넷이랑 책 보고······.”
“그럼 당연히 화성학도 공부를 했겠구나.”
화성학은 작곡의 기본이다.
화성학을 모르고 작곡을 할 수는 없는 일.
곡이라는 것도 결국 정해진 규칙에 따라 만들어져야 하는 창작이기에 화성학은 필수 과목이었다.
“네, 조금은요.”
“조금? 조금만으로는 이렇게 기본기 탄탄한 악보를 쓸 순 없을 텐데.”
그냥 저번 생에서 음악 할 때 배웠던 걸 고스란히 가져와 기본만 구겨 넣은 악보다.
음대생이라면 기본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하는 악보겠지만, 정식으로 작곡을 배운 적이 없는 초등학생이 하기에는 확실히 난도가 높았다.
“이거 참 고민되네.”
“어떤 거가요?”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말이야.”
날 어떻게 해?
“나는 널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한번 키워 보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작곡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고민을 했지. 피아니스트가 되기 싫다는 놈을 억지로 붙잡을 순 없지 않냐. 그래서 쿨하게 떠나보내려는 생각까지 했었어.”
이창호 교수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동안 가르친 정이 있어서 끝까지 옆에 끼고 다닐 줄 알았는데, 자신의 방향과 맞지 않으면 언제든 연을 끊을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래도 네가 독학으로 배웠다고 하니, 한번쯤은 곡 쓰는 걸 보자는 마음이었지. 그냥 떠나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우니까.”
“그래서요?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방금 내가 그랬지?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창호 교수는 푸념 하듯 중얼거렸다.
“내 살다 살다 이런 고민을 다 할 줄은 몰랐네. 넌 어떻게 된 게 못 하는 게 없는 거 같냐?”
“제가 좀 못 하는 게 없긴 해요.”
“쯧-.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것도 아주 수준급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이창호 교수는 다음 본선곡을 연습시켰다.
“오늘 5시간 스트레이트로 달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예? 그러다 사람 죽어요, 교수님.”
“괜찮아. 난 한창때 15시간도 쳐 봤어. 5시간은 금방이지, 금방.”
오늘 아무래도 잘못 걸린 듯싶다.
* * *
“연욱아. 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안녕히 계세요, 교수님.”
“허리 더 숙이고. 옳지. 허허. 잘 들어가라.”
이창호 교수는 뿌듯한 마음으로 오늘 레슨을 마쳤다.
그는 자기가 꺼낸 말을 지켰다.
연욱이는 5시간 동안 이창호 교수의 집요한 레슨을 받은 뒤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5시간이면 간지러운 수준이지.”
본선이 코앞이다.
그런데 고작 레슨을 5시간밖에 하지 않는다?
이건 떨어지라고 고사를 지내는 수준이었다. 적어도 이창호 교수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사실 이창호 교수는 한번 제자를 키우면 12시간 동안 피아노를 치게 만든다. 그리고 개인 레슨을 할 때 역시 12시간 이상 직접 옆에서 가르친 적도 많았다.
피아노를 치는 제자는 힘들겠지만, 그 옆에서 일일이 하나씩 지적을 해 가며 교정을 해주는 이창호 교수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제자를 가르치고 성장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때마다 큰 희열을 느꼈다. 이것이 교수만 느낄 수 있는 열정과 희열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연욱이 저놈은 조금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보통의 경우라면 12시간 동안 붙잡아 놓고 연습을 시켰을 텐데, 최고 5시간까지만 연습을 시키고 돌려보냈다. 어떨 때는 2시간도 안 돼서 레슨을 끝냈다.
“다른 놈들보다 몇 배는 더 성장이 빠르니, 오래 붙잡아 둘 수도 없고 원.”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봐주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생이라고 하루에 정해진 연습량이 있는지 아는가?
지금 다른 교수들 밑에 있는 학생들은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 빼고 전부 피아노에 투자한다. 그에 반해 연욱이는 그냥 기본 연습만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오랫동안 연습을 시키고 싶었지만, 그건 쓸데없는 연습에 불과했다.
효율을 누구보다도 중요시하는 이창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연욱이가 자신이 만든 악보를 봤을 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대체 저놈은 얼마나 괴물인 거야?”
피아노 치는 실력도, 기술을 흡수하는 능력도 다른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할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독학으로 배운 작곡 실력이 이 정도라고?
이창호 교수는 잠시 옆에 놓아두었던 연욱이의 악보를 들어 보았다.
언뜻 보면 음대생이거나, 혹은 음대를 준비하는 학생이 만든 악보처럼 보인다.
그만큼 기본기가 탄탄하게 들어간 악보라는 것이다.
특별할 건 없지만, 음악이라는 것은 자고로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기본기가 탄탄해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법.
그리고 연욱이는 이미 완벽하게 기본기를 익혀 두었다.
“그것도 독학으로 말이지······.”
피아노의 놀랄 만한 재능이 있기에 그것을 키워 한국을 넘어 세계를 놀래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작곡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면?
“될 놈은 뭘 시켜도 되다, 이건가?”
항상 생각의 틀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주장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 틀에 갇혀 있는 듯했다.
작곡? 좋다.
피아노를 하면서 작곡을 하지 못할 게 무에 있겠는가.
피아노로도 최고가 되고 작곡으로도 최고가 되면 그만이다.
아직 저 아이의 한계를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 끝을 찾아가는 것이 이창호 교수의 크나큰 기쁨이었다.
* * *
오늘은 혜나 누나가 GN 엔터테이먼트에 오디션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결국 뜻을 굽히시면서 GN 엔터테이먼트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건데, 계약을 하기 전 가볍게 솔로 오디션을 봐야만 했다.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 주거나, 작곡한 곡을 연습하는 데에 있어 서로 호흡이 잘 맞을지를 확인해야 하므로 필수적인 코스일 것이다.
“누나.”
“응?”
“긴장 돼?”
“아니, 저~언혀.”
다행히 누나는 하나도 긴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다.
“나는 오디션이 너무 좋아.”
“그래? 난 항상 오디션 같은 거 볼 때면 엄청 긴장되던데.”
“난 그냥 오디션이 편해. 왠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 혹시 실수라도 해서 떨어지면······.”
“괜찮아. 다시 도전하면 되지! 고작 14살이잖아. 기회는 엄청 많아.”
누나는 항상 쾌활하고 긍정적이다.
저런 성격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다.
그런데 저번 생에서는 저 쾌활하고 예쁜 모습을 소속사가 강제로 억눌러 버리는 바람에 비호감을 샀다.
이래서 소속사가 중요하다.
내가 줄고 가만히 있다가 어머니를 설득해 가면서까지 누나를 GN 엔터에 넣으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돈밖에 모르고 가수들을 그냥 소모성 물건으로 취급하는 놈들을 절대 만나선 안 된다.
그렇게 했다가는 또 다시 불행했던 전생을 반복해야만 하니까.
“넌 가서 피아노 연습이나 하라니까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 곧 있으면 본선이잖아.”
“지금 본선이 중요해? 누나가 오디션 잘 받는 게 더 중요하지. 그리고 부모님도 같이 못 오셨잖아. 보호자가 필요할 거 아니야?”
“오올-. 이제 좀 컸다고 누나 보호자를 하시겠다?”
“싫으면 말고.”
“에이, 왜 이래.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누나 옆에 있어줘야지.”
GN 엔터테이먼트 소속사는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해있다.
많은 기획사가 테헤란로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GN 엔터도 그중 하나였다.
“오~ 여기 건물 꽤 좋아 보여.”
5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
그곳 앞에서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나야. 여기야. 응? 연욱이도 같이 왔네?”
“네, 보호자로요.”
“하하. 그래?”
GN 엔터의 강세원 대표가 직접 우리 마중을 나왔다.
“오느라 고생 많았지? 얼른 들어가자.”
“네~”
“혜나는 오늘 기분 어때? 많이 긴장되는 건 아니지?”
“괜찮아요. 그런데 오디션은 어떻게 보는 거예요?”
“응, 가서 알려 줄게. 둘 다 따라와.”
강 대표는 우리 둘을 데리고 녹음실 안에 들어왔다.
두꺼운 방음 부스가 설치된 이곳에는 가수가 들어가서 녹음을 하는 곳과 디렉터가 가수에게 지시를 내리고 곡을 편집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아, 여기 인사해. 여긴 이은지 디렉터. 그리고 저쪽은 박성호 트레이너야.”
녹음실에서 우릴 기다리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작곡가, 다른 하나는 보컬 트레이너였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이름이 혜나라고 했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도 잘 부탁해.”
이은지 디렉터는 누나를 위아래로 살펴본 뒤 내게 시선을 돌리다 딱 멈춰 섰다. 그러고는 뒤에 서 있는 강 대표를 불렀다.
“대표님.”
“응?”
“이 남자애는······ 혹시 우리 아역 배우 키워요?”
“아니. 여기 혜나 동생이야. 그 뭐냐. 보호자로 따라왔대.”
그러자 옆에 있던 박성호 트레이너가 기함을 터트리며 말했다.
“동생이라고요? 와. 남매가 비주얼이 장난 아니구나. 잠깐. 근데 둘이 어디서 본 거 같은······.”
“난 딱 보자마자 알았는데. 그 영화 ‘악마’ 기억 안 나? 그래서 내가 대표님한테 물어본 거야. 혹시 배우 키우는 거냐고.”
그 얘기를 듣고 박성호 트레이너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네. 근데 그거 몇 년 된 영화 아니에요?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이 큰 거 같은데.”
“당연하지.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잖아. 둘이 정말 잘 컸네.”
“그러게요. 녹음실 안이 이렇게 훈훈하게 변한 걸 보면.”
혜나 누나와 저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썩 괜찮은 듯보였다.
“그런데 두 사람 배우 하는 거 아니었어? 그 영화 끝나고 활동도 전혀 안 했다면서.”
“네. 그동안 쭉 쉬었어요. 학교 공부도 하고요.”
“만약 정말 가수를 하려고 한다면 공부는 포기해야 할 걸? 우리가 정말 같이 갈지 안 갈지는 아직 결정된 게 아니긴 하지만.”
이은지 디렉터는 기가 매우 세 보이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매우 깐깐하기까지 해보여 한번 곡을 맡으면 완벽하게 뽑힐 때까지 가수를 굴릴 것만 같았다.
“대표님. 바로 시작해도 되죠?”
“응, 언제든지.”
“그럼 혜나야. 녹음실 한번 들어가 볼까? 저기 헤드셋 끼면 내 목소리가 들릴 거야.”
“네~”
혜나 누나는 총총걸음으로 녹음실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녹음실을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지 신기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대표님. 일단 비주얼은 완전 합격이에요. 마켓팅 팀은 좋겠네. 저 정도 얼굴이면 그냥 대충 사진만 찍어서 뿌려도 사람들이 몰려들걸요?”
“몰려들기만 해선 안 돼. 확실하게 팬덤을 만들어야지. 그 역할을 하는 건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방금 잠깐 대화 나눴을 땐 음색이 과연 특이할까? 라는 생각부터 들어서.”
“일단 한번 들어 봐. 그럼 진짜 생각이 달라질 거라니깐?”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강 대표가 어렵사리 설득해서 혜나 누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지만, 최종 관문은 저 이은지 디렉터를 넘어야 하는 것 같았다.
아마 이은지 디렉터가 이 소속사 최고의 음악 감독인 듯한데, 만약 그녀가 누나를 좋게 보지 않는다면 계약은 없던 일로 될 수도 있다.
“성호 씨도 옆에서 잘 들어. 혜나가 우리랑 코드가 잘 맞는다고 판단되면 열심히 트레이닝 시켜야 하니깐.”
“네, 저도 귀 쫑긋 세우고 있겠습니다.”
그들은 대표가 데리고 온 아이라고 해서 허투루 오디션을 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냥 대충 대화만 나눠 보고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허술한 곳이 아니라는 것.
물론, 나도 이런 이들의 정신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철저히 가려가면서 뽑는 거라면 앞으로도 세밀하게 케어해준다는 뜻이니까.
그저 걱정되는 건 깐깐해 보이는 이은지 디렉터가 혜나 누나를 좋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정도다.
“혜나야. 곡 하나 들려줄게. 가이드 보컬이 부른 노래거든? 그거 몇 번 듣고 준비되면 말해줘. 녹음 한번 해 보자.”
“네~!”
떨리는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나 누나는 아주 신나 보였다.
왠지 오디션은 누나가 아니라 내가 보는 것 같다. 긴장이란 긴장은 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