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36화 - (여기까지가 무료 연재분이었습니다) >
“음-.”
눈을 감고 내 연주를 감상하고 있던 교수님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곳이 있으면 가차 없이 중단시켰다.
“거기. 다시.”
지적한 부분을 다시 연주해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을 부라렸다.
“다시.”
“네.”
“다시!”
“네!”
어떻게든 완벽한 터치를 살려내겠다는 의지가 풀풀 느껴졌다.
1년 넘게 레슨을 받으면서 이 교수님의 스타일에 적응이 됐다.
자신이 가르치는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금방 파악해 내고 그것에 맞춰 트레이닝 스케쥴을 짠다.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단계까지 무리하게 연주를 시키지 않는다.
이건 내 뇌피셜이 아니라 이창호 교수가 내게 직접 해 준 말이었다.
그런데 왠지 나한테는 끝도 없이 완벽한 연주를 하도록 몰아붙였다.
“음~ 그 정도면 나이스해.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 봐.”
처음부터?
4~5분이면 다 칠 수 있는 곡을 한번 완곡 하는 데에 30분이나 걸렸다.
나는 참다 못 해 건반에서 손을 떼고 웃는 얼굴로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오늘은 몇 시까지 하실 거예요?”
“왜? 내가 얼른 갔으면 좋겠냐?”
“하하. 그럴 리가요. 오래 같이 있어 주시면 저야 좋죠.”
“그래. 내가 그런 기특한 네 마음을 알고 스케쥴을 싹 다 비우고 왔어. 오늘 어머니한테 전화부터 해 놓을래? 저녁 늦게까지 못 들어갈 거 같다고. 오늘 저녁밥은 교수님이 사줄게.”
“······.”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딱 한 번 이창호 교수님과 저녁을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내가 평생 들을 수 있는 아재 개그란 개그는 다 들은 것 같았다. 너무 억지로 웃기만 해서 안면 근육이 마비될 뻔한 건 덤이다.
아니다. 내색하면 안 된다.
저 양반이 저런 걸로 장난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어그로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끄는 분이 아니던가.
“예. 문자 넣어 놓을게요. 아마 교수님이랑 레슨 한다고 하면 걱정 안 하실 거예요.”
“그래. 꼬옥 말씀드려야 한다?”
진짜 저녁때까지 안 갈 생각인 건가.
아니. 오늘 누나랑 새로 산 보드게임 하기로 했는데.
내 얼굴에서 감정이 다 드러난 모양인지 이창호 교수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펼쳐 들었다.
“딱 3번.”
“네?”
“딱 3번만 내 마음에 쏙 드는 연주를 보여 준다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도 좋아. 클레멘티가 보통 5분 걸리는 곡이지? 빠르면 15분 만에 끝낼 수도 있겠네.”
그 말에 갑자기 팍 식었던 열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따란-!
“다 쳤어요.”
“으응? 버, 벌써?”
음악을 감상 중이었던 이창호 교수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러고는 괜히 핀잔을 주었다.
“짜식. 그렇게 나랑 레슨 하는 게 싫냐?”
“그럴 리가요. 하늘보다 높으신 스승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어떻게 싫겠습니까.”
항상 보면 말을 참 잘 골라서 한다.
초등학생이 어떻게 가려운 곳만 잘 긁어 주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어린놈이 말은 청산유수야. 너 혹시 스피치 학원 다니고 있냐?”
“아니요. 그런데 이제 가도 되는 건가요? 말씀하신 대로 3번 다 마음에 드신 것 같은데.”
“그건······.”
조금 골려 주려고 농담 한번 해 본 건데, 이놈은 필사적으로 연주를 해서 기어코 이창호 교수 마음에 쏙 드는 연주를 3번이나 보여 주었다.
이대로 최소 3시간은 붙잡아 놓으려고 했는데, 이 아이가 들려주는 곡을 듣고 차마 트집을 잡을 수가 없어 멍하니 있다가 금방 3번의 연주가 끝이 나 버렸다.
그냥 중간에 한 번 태클을 걸어 볼 걸 그랬나.
하지만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 과한 요구를 하거나, 심술을 부리는 건 옳지 못한 자세였다. 그렇기에 그냥 연욱이가 연주하는 걸 가만히 두고만 본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곳 하나 빈틈이 없어 보이는 연주에 이창호 교수는 만족했다.
“그래. 내가 졌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어림도 없을 줄 알아. 곧 있으면 콩쿨이잖아. 하루도 빼 먹지 말고 연습해야 한다!”
연욱이 바람처럼 쌩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이창호 교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연욱이 나이가 한창 놀기 좋아할 때이긴 하다.
“키울 맛이 나는 놈이란 말이지.”
2년 가까이 연욱이를 레슨 시키면서 이창호 교수는 매번 뿌듯함을 느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 셋을 깨우치는 아이다. 또한 막히는 곳이 있으면 독종같이 연습해 반드시 벽을 부수고야 만다.
보통 저렇게 재능 있는 녀석은 자만심에 빠져 연습을 게을리 하기 마련인데, 연욱이는 스스로가 가진 재능에 교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본인에게 냉정한 평가를 한다고 해야 할까.
가끔은 본인의 능력을 높이 살 만도 한 데,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마치 자기에게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 점에서 이창호 교수는 더욱 가르칠 맛이 났다.
재능이 있고, 노력도 하며, 될 때까지 하는 인내심도 있다.
어떻게 저런 아이를 놓칠 수 있을까.
그동안 과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별도로 키우는 제자가 없었는데, 저 아이를 가르치고 있으면 뜨겁게 피가 끓는 것을 느낀다.
“오빠. 벌써 레슨 끝났어? 연욱이 방금 나가던데?”
“아, 응.”
“일찍 끝났네? 이제 겨우 1시간 정도 된 거 같은데.”
“오늘은 좀 일찍 끝냈어. 오래 앉혀 놓고 가르친다고 해서 실력이 더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호호. 저번에는 아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몇 시간 동안 붙잡아 놓더니. 차라도 한잔할까?”
“좋지.”
이창호 교수는 원장실에서 연희가 내어 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짧은 시간밖에 레슨을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저놈은 조금만 자극을 줘도 곧장 안에 숨겨 둔 잠재력을 마음껏 폭발시킨다. 그 재능의 깊이가 어떨 때는 흥미롭고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연욱이 레슨은 어때? 잘 돼가?”
“문제없어. 예선이랑 본선은 무사히 통과하겠지. 그다음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 1위를 하는 건 힘들려나?”
“신영 주니어 콩쿨은 보통 무대가 아니니깐.”
우승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신영 콩쿨에는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음악 공부를 해 온 아이들이 대거 모이는 무대다. 거기서 모두를 다 꺾고 우승을 바라기란 아무래도 힘들 터. 하지만 시간을 들여 계속 연습하고 경험을 쌓다 보면 언젠가 분명히 좋은 피아니스트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 국제 콩쿨에 나가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능이 아주 출중한 놈이야. 생각하는 것도 아이답지 않고. 지금 당장은 우리나라 최고가 될 순 없지만, 내 장담한다. 나중에 우리나라 음악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될걸?”
“오빠가 그렇게 평가하는 거면 정확하겠지. 그런데 연욱이가 확실히 피아노 전공을 한다고 했어?”
“응?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 내가 저번에 연욱이한테 들었는데, 그 아이는 피아노보다 작곡에 관심이 있더라고.”
“자, 작곡?”
잠깐. 이게 무슨 소리람?
“응. 그래서 나중에 혹시 예고에 들어가게 되면 작곡과로 들어갈 거라는······.”
그 말을 듣고 이창호 교수는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갑자기 작곡이 웬 말이야?”
“진정해, 오빠.”
연희는 이창호 교수를 자리에 다시 앉히며 말을 이었다.
“연욱이 친누나 혜나라고 알지?”
“몇 번 봤지. 연욱이처럼 엄청 예쁜 여자애 맞지?”
“응. 혜나 꿈이 가수래. 그리고 연욱이는 그런 누나를 도와주고 싶은가 봐. 둘이 사이가 엄청 좋거든. 그래서 그런 건지 자기가 곡을 작곡해 주고 싶다고 얘기하더라.”
“허- 나참.”
뭔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지만,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 누나의 꿈을 이뤄 주고 싶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피아노 전공이 아니라 작곡과를 간다?
물론, 작곡과를 간다고 해서 피아노를 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콩쿨에 나가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릴 순 없다. 아니. 작곡과로 들어가는 순간 콩쿨과는 완전히 멀어져 버린다. 거기에서 콩쿨이란 그냥 경험을 삼는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음-.”
이창호 교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 중이지만, 작곡가를 키워낸 경험이 몇 번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욱이를 작곡가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저 아이에게 있는 피아노 재능을 이대로 썩혀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으니까.
그런데 만약 연욱이에게 피아노 못지 않은 작곡 능력이 있다면?
순간 소름이 쫙 돋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아이가 말도 안 되는 괴물일까 싶어, 이내 생각을 접었다.
그래도 한번 확인은 해 보는 게 좋겠지?
* * *
“아······. 아아!”
혜나 누나는 악을 쓰며 핸드폰을 연타하다 결국 앉아 있던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핸드폰 게임을 하다 캐릭터가 죽은 모양이다. 그러고는 책상에 앉아 있던 내게 달려와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히이잉. 연욱아. 이거 좀 깨줘.”
“쯧-. 이보세요. 누님. 지금 아우가 열심히 숙제하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어차피 너 공부 잘해서 금방 하잖아. 이번 스테이지가 진짜 안 깨진단 말이야.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현질 안 하면 못 깨게 만든 거 아닐까?”
“허허. 본인의 똥손을 탓하셔야지, 왜 가만있는 개발사를 건드리십니까. 누님.”
볼이 아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누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칫. 그래. 다 내 컨트롤이 똥이라서 그런 거지. 잘났어. 너 할 거나 해라.”
이미 숙제도 거의 다 끝난 터라 나는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알겠어. 가져와 봐.”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확 풀린 표정으로 누나가 다시 내게 달려왔다.
“깨 줄 거야?”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하지.”
나는 혜나 누나의 폰을 잡고 던전에 들어갔다.
누나 캐릭터들의 전투력이 조금 낮긴 했지만, 이 정도는 컨트롤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예전에 내 핸드폰으로 클리어를 했던 구간이라 그리 어렵지 않기도 했다.
아니. 근데 이 누나는 나랑 똑같이 게임을 시작했으면서 아직도 여기 머무르고 있었던 거야?
“자, 다 깼다.”
내가 첫 시도 만에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자 누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개발사 탓을 하지 말고 본인의 똥손을 탓하세요, 누님~.”
“하-, 자괴감 드네. 이거 게임을 지워, 말어?”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지우지 않고 열심히 할 게 뻔했다.
혜나 누나는 기세등등한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걸 보고 내가 한 마디 했다.
“아. 내가 못생긴 표정 하지 말랬지.”
그러자 혜나 누나도 내 표정을 지적했다.
“너야말로 그 표정 짓지 말랬지. 어휴. 재수 없어.”
“응?”
나는 짐짓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은 채 말이다.
“미안해. 누나. 내가 너무 다 잘하지? 공부면 공부, 게임이면 게임, 음악이면 음악. 이 잘난 재능을 어떡하면 좋을까? 흑흑.”
“에잇 꺼져!”
누나가 던진 베개를 살포시 피한 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느려.”
“······.”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누나가 갑자기 고개를 침대에 파묻으며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너무해. 맨날 놀리기나 하고.”
“응? 삐졌어?”
“됐어. 너 나가.”
“아니. 방주인보고 나가라고 하시면······.”
“으아앙!”
장난이 좀 지나쳤나 보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우는 거 같았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리얼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진짜 우는 것 같아서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우, 울어? 누나. 진짜 울어?”
“몰라. 저리 가.”
1절만 할걸.
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흐느끼고 있는 누나를 흔들어 일으키려 했다.
“누나. 내가 미안해. 응? 울지 마. 누나아~ 내가 다른 스테이지들도 다 깨줄게. 응? 누나 하는 숙제도 도와주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나가 왁! 큰 소리를 내며 두 팔을 높이 들었다.
“헉!”
“히히. 속았냐? 속았지? 바보. 맨날 속네. 그리고 분명 다른 스테이지들도 깨 주겠다고 약속했다? 숙제도 도와준다고 했어? 응?”
“······.”
속았다.
이 누나 연기력이 웬만한 배우 뺨치게 좋았었지.
나는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아니. 진짜 우는 줄 알았잖아!”
“내가 이런 걸로 왜 울어. 그런데 넌 꼭 잘 속더라.”
그야 당연히 누나가 울면 나도 갑자기 울어 버릴 것 같거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여튼 귀여워.”
누나는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 나가면서 말했다.
“이따 저녁 먹고 엄마 아빠랑 새로 산 보드게임이나 같이 하자. 이거 깨줘서 고마워~”
혜나 누나가 나가고 나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속지 않으려고 해도 저건 속을 수밖에 없다.
내가 가장 아끼는 가족이지 않은가.
어디가 아프거나, 혹은 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온종일 걱정이 돼서 뭐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다음에 두고 보자.”
피가 끓어올랐다.
받은 걸 반드시 돌려주려고 하는 건 아무래도 남매의 습성인 것 같았다.
이것 때문에 다른 남매들은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건가?
우리가 심하게 싸워본 적은 없지만, 한번 이렇게 당하고 나면 계속 생각이 난다.
다음에는 기필코 갚아 주리라 하면서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
그러나 난 알고 있다.
결국 매번 당하는 쪽은 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사, 우리가 싸운다면 결국 지는 쪽은 바로 나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