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35화 >
“누나. 여기야.”
“응~ 많이 기다렸어?”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이제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고 있는 혜나 누나가 내가 있는 곳으로 총총 달려왔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총총 뛰어오는 걸음걸이는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아참. 이거.”
“응?”
누나가 책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교과서 대신 사탕들만 가득 들어 있었다.
“오늘 화이트데이잖아. 너 챙겨 주려고 잔뜩 가져왔지.”
으레 있는 일이다.
빼빼로 데이,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등등.
그때만 되면 혜나 누나에게 남자 애들이 선물 공세를 펼쳐 그날 하루는 책상과 사물함이 터져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건 혜나 누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안 줘도 돼.”
나도 교과서 대신 사탕만 가득 들어 있는 가방을 누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 역시 화이트 데이만 되면 사탕으로 산을 쌓아 놓을 정도였다.
“오~ 우리 동생. 역시 인기 많아.”
“훗.”
난 짧게 웃으며 가방을 다시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누나가 가방을 붙잡더니 획 낚아채 가 버렸다.
“근데 이건 뭐야?”
누나는 사탕 위에 있는 여러 편지들을 꺼냈다.
“아- 그건······.”
“흠-.”
누나는 아무 편지 한 장을 펼쳐 보더니 눈쌀을 찌푸렸다.
“지연이라는 학생이 널 참 많이 좋아하나 봐. 아주 하트로 난사를 해 놓으셨네.”
“내, 내놔!”
그러거나 말거나 혜나 누나는 다음 편지를 펼쳐 들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수현이라는 여자애는 과감하네. 널 엄청 사랑한대. 이거 설마 삼각관계? 아니지. 여기 편지 숫자만 따져 보면 열 명은 우습게 넘길 거 같은데? 너 학교 생활은 가능해? 여자애들이 너 중간에 두고 막 싸우는 거 아니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누나는 꼭 아닌 것처럼 얘기하네?”
“응?”
“누나 책상에 있던 편지들을 내가 좀 읽어 봤지.”
“야! 누, 누가 그거 읽으랬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니, 나도 슬슬 재미가 붙었다.
“진영이라는 형이 누나를 그렇게 끔찍이 아끼는 줄 알았으면 내가 한번 만나볼 걸 그랬어. 그리고 저 뒤에 몰래 쫓아오시는 분들은 누구야?”
“뭐? 누가 쫓아온다고 그래?”
기둥 뒤에 숨어 나와 혜나 누나를 염탐하고 있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누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꼭 이 나이대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친해지려고 하기보다는 쓸데없는 장난을 쳐서 관심을 끌려고 하지 않던가.
“누나.”
“응?”
“저 새······ 아니. 저 형들이 괴롭히진 않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학교에서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누나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당연히 인기가 가장 많다.
그런데 누나 정도의 미모면 말을 걸기도 힘들 정도라 감히 장난을 치는 놈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일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한다면······.
“야. 어딜 그렇게 노려보고 있는 거야?”
“아냐. 얼른 가자. 버스 타야지.”
“잠깐만. 이거부터 받아.”
혜나 누나가 내게 편지들을 건네주었다.
“응? 이건 뭐야? 내 가방에서 가져간 것들?”
“아니거든. 내가 왜 가져가. 그건 내 친구들이 너한테 전해 주라고 해서.”
“엥?”
“내가 찢어 버리려다가 꾹 참았다. 어떻게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갑자기 배신감 확 드는 거 있지?”
“오~ 그렇단 말이지. 누나 친구들이 준 편지라니까 기대되네.”
그러자 누나는 내게 주려는 편지를 다시 빼앗아 가려고 했다.
“네 표정 보니까 갑자기 짜증 나. 안 되겠다. 다시 내놔.”
“흐흐. 어림도 없지.”
나중에 꼭 누나 앞에서 읽어 봐야겠다.
저런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으니까.
“나 말고 누나나 신경 써. 괜히 이상한 애한테 덜컥 고백받고 사귀어 주면 안 된다?”
“흐응. 내가 누굴 사귀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 그건······.”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누나 가수 되고 싶다며. 지금부터 조심해야지.”
“가수 되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무튼! 남자는 대학 가서 사귀면 돼. 아버지도 항상 누나한테 말씀하시잖아. 남자 새끼들은 다 늑대니까 가까이 접근도 하지 말라고.”
아버지의 마음을 난 백 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귀하게 키운 딸이 다른 놈과 손을 잡고 꽁냥 거리는 걸 절대 보고 싶지 않으시겠지.
아마 누나가 집에 남자를 데리고 오는 날에는 그놈은 나와 아빠의 숨 막히는 감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누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날에는 난 확신할 수 있다.
그날이 바로 그놈 제삿날이다.
“그럼. 이 누나는 세상에 남자는 우리 아빠랑 연욱이만 있으면 돼.”
혜나 누나는 내 목에 팔을 걸며 미소를 보였다.
우리 남매는 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너 콩쿨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응. 그럭저럭?”
“그럭저럭? 저번이랑은 다른 콩쿨이라면서. 그땐 지방에서 하는 작은 콩쿨이었지만, 이번에는 큰 무대라고 하지 않았어?”
국내에서 진행하는 콩쿨 중 나름 급이 있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신영 주니어 콩쿨 무대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 무대인데, 예선과 본선 1, 2차를 거쳐 결승 무대까지 이어진다.
“교수님이 좋은 경험이 될 거래.”
“그 말씀은 우승이 힘들다는 건가?”
“보통 그런 데는 걸음마 배울 때부터 피아노 치는 애들이 모이거든.”
신영 주니어 콩쿨 무대를 나올 정도면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교수 레슨을 받으며 실력을 키운 초등학생들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 피아노 콩쿨 무대에서 1위를 한 김우진 피아니스트도 초등학생 때 신영 주니어 콩쿨 무대를 나갔다가 떨어져, 다음 해에 이를 갈고 준비해 마침내 우승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천재라고 불리며 피아노를 배웠을 진짜배기들이 모이는 것이다. 하지만 잔인한 사실은 그중 99%는 자신들이 꿈꾸던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다. 오직 살아남은 1% 만이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 바닥은 끔찍할 만큼 냉정하다.
“곡이 뭐라고 했지?”
“클레멘티 소나티네 op.36 no.3.”
“으... 곡 이름이 복잡해서 맨날 까먹어.”
이 곡은 초등부 콩쿨에 예선곡으로 자주 쓰인다.
“예선을 보고 본선 1, 2차를 봐야 한다고 했지?”
“응.”
“잘 됐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가 엄청 좋아하실 거 같아.”
“나 몰라? 싹 다 부셔버리고 올게.”
허세를 부려 봤지만, 이래 놓고 예선도 통과 못 하면 당분간 누나 얼굴을 똑바로 못 쳐다볼 것 같다.
그러나 쫄 필요 없다.
난 음악 대학도 나온 사람이고, 1년 반 동안 열심히 준비도 해 왔다.
아- 그런데 진짜 예선에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런데 오늘 정류장에 사람이 많네?”
나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누나 말대로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다.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정류장에 잔뜩 모여 있었는데, 왠지 다들 우리 남매를 힐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어? 버스 왔다.”
그리고 버스가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타는 버스에 다 같이 올라타 순식간에 버스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힝. 앉을 자리가 없네.”
편하게 앉아서 가려고 했던 누나가 침울하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벌떡 일어났다.
“여, 여기 앉으세요.”
“네? 아뇨. 괜찮아요.”
“앉아 주세요. 전 곧 내려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혜나 누나는 내 등을 툭 치며 말했다.
“너 앉아, 연욱아.”
“아냐. 난 서 있는 게 편하니까 누나나 빨리 앉아.”
나는 히죽거리며 일어나는 남학생을 노려보다 누나를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한 정거장 정도를 지났을 때쯤이었다.
정류장에서부터 우리 남매를 힐끔 쳐다보기만 하던 남학생들의 시선이 계속 신경 쓰였다.
결국 참다 못 해 내가 먼저 말했다.
“저기요. 형들.”
“어··· 어?”
“혹시 저한테 할 말 있어요?”
“아니. 너한테 있는 게 아니라······.”
그중 하나가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혜나 누나에게 다가와 선물을 건넸다.
“나 1학년 3반 김기빈이야. 오늘 주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계속 못 줬어.”
“응? 나한테 주는 거야?”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갑자기 저마다 가방 속에 들고 다니던 선물을 꺼내 혜나 누나에게 건네기 시작했다.
“내, 내 거도 받아줘!”
“나도 준비했어, 혜나야!”
뜬금없이 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캔디 파티였다.
* * *
“이거 다 먹으면 이빨 썩겠다. 그치?”
“응. 안 썩어도 보통은 다 못 먹지.”
나와 혜나 누나는 집에 도착해 학교와 버스에서 받은 선물부터 정리했다.
버스에서 혜나 누나만 선물을 받는 줄 알았는데, 이게 왠 걸.
나한테도 선물을 주려 하는 여학생들이 있어 그걸 다 받고 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서 대 놓고 못 받겠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우린 그 많은 선물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아. 오늘 화이트데이지? 이번에도 많이 받아왔네.”
집에 계셨던 어머니는 우리 남매가 가지고 온 사탕들을 보고 이젠 적응이 되셨는지 그러려니 한 표정이었다.
이런 적이 사실 한두 번이 아니라서 부모님도 이제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셨다.
혜나 누나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품에 꼭 안겼다.
“엄마~ 집에 있었네?”
“응. 우리 토끼들 보려고 일찍 퇴근했지~. 너희들 학원 가기 전에 간식이라도 먹고 가. 엄마가 금방 해 줄게.”
어머니는 딸기잼과 햄, 치즈를 넣은 토스트를 해 주셨다.
우리 세 사람은 식탁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뭐, 수다라고 해 봐야 혜나 누나와 어머니의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아니. 글쎄 엄마. 연욱이가 편지를 받았는데,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아?”
“응?”
“연욱이를 어~엄청 사랑한대. 그것도 한 명만 그렇게 쓴 게 아니라 열 명이 넘게 다 그렇게 썼다니깐?”
“호호. 넌 또 그걸 봤니?”
“저렇게 잘난 동생을 어떻게 다른 여자한테 보내!”
“맞아. 엄마도 연욱이가 여자친구 데려오면 충격이 클 거 같긴 해.”
내 의사는 두 사람에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이 재잘재잘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8살이란 몸에 들어와 덜컥 가족이 생기고 어느새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신기하게도 저번 생은 불행으로 가득했는데, 요 4년 동안 단 한 번도 내가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수다를 떠는 모습만 봐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학원 가야지?”
“응? 벌써 시간이 저렇게 됐네.”
“연욱이 너도 오늘 교수님 레슨 있다며? 서둘러야겠다.”
그렇게 스낵 타임이 끝나고 나와 혜나 누나는 다시 나가려고 준비했다.
그때, 신발을 신고 있던 누나는 갑자기 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학원가면 또 선물 받겠지?”
저번 발렌타인데이 때도 한 보따리 싸 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 많은 걸 또 어떻게 다 가져오냐는 푸념이 배부른 자의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직접 겪어 보지 못하면 그 난감함을 이해할 수 없다.
“장연욱. 학원 끝나고 pc방으로 째면 안 된다?”
“응. 안 그래.”
“뻥 치시네. 저번에 학원 끝나는 시간에 인터넷에서 게임 전적 뜨는 거 봤거든?!”
“헉.”
아이디를 바꾸든가 해야겠다.
나는 몇 년 동안 다니는 꿀벌 피아노 안으로 들어갔다.
“연욱이 왔니? 호호. 이거 받아. 오늘 교수님 레슨이라며? 열심히 해~”
그런데 피아노 학원에 들어오자마자 피아노 선생님들이 사탕을 하나씩 쥐어 주었다.
어느새 양손에 사탕이 가득한 채로 레슨방으로 들어왔다.
“어? 교수님. 먼저 와 계셨네요.”
“흠. 교수님보다 늦게 오다니. 버릇없는 녀석.”
교수님이 10분 일찍 오신 건데요, 라고 말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근데 손에 든 게 많다?”
“아. 다 드세요. 여기 오면서 받았어요.”
“그, 그렇게나 많이?”
“그냥 다 나눠 주시는 거 같던데요?”
교수님은 ‘난 한 개도 안 주던데.’ 라고 중얼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레슨을 시작하려는데, 꼭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밥은 먹었니?”
“네. 교수님은요?”
“허허. 난 오늘 산채비빔밥 먹었지. 죽은 채 비빔밥보다 맛있더라.”
“······.”
잠시 피아노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 그러셨구나. 참 재밌는 개그네요.”
“재밌지? 우리 학생들도 내가 개그 치면 엄청 좋아한다니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굳이 하지 않았다.
왠지 벌써 사회생활을 시작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