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28화 >
“혜나야. 감독님이 준 대본은 잘 읽어 봤어?”
“응, 다 읽었어.”
“연욱이는?”
“저도 다 읽었어요.”
“연습도 했고?”
“네.”
왠지 오늘따라 어머니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뮤지컬 때도, 그리고 광고를 촬영할 때도 그러긴 하셨지만, 오늘은 좀 더 심했다.
“어련히 잘 했겠지. 당신이랑 내가 열심히 연습도 도와줬잖아.”
“그, 그렇긴 한데······. 오늘 거기 대배우들이 엄청 모인다고 들어서.”
오늘은 최진우 감독 영화의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다.
촬영에 앞서 먼저 배우들이 모여 대본을 읽으며 연습을 하는 건데, 이때 배우들이 전부 다 모이게 된다.
촬영 때도 배우들이 전부 모이는 건 드문 일이다. 각자 출연하는 씬에만 나오면 되는 데다 일정이 각자 다르게 잡히기 때문.
“당신도 캐스팅 된 배우들 이름 봤잖아. 허준영, 임성곤, 김미리, 백수진 등등. 아주 대배우들 집합소야.”
사실 나도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네임드들이 오늘 대본 리딩장에 모인다.
특히 허준영 배우는 내가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배우라 기대가 매우 컸다.
“늦기 전에 얼른 가자.”
나와 혜나는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오늘 대본 리딩장에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더 긴장을 하시는 듯보였다.
“오-. 주차장에 다 연예인 차 밖에 안 서 있네.”
오늘 리딩이 있을 장소에 도착한 아버지는 주차를 하시면서 짧게 감탄사를 뱉으셨다.
주차장에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밴 밖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린 차에서 내려 로비로 가 보았다. 그곳에 있는 여직원이 우리 가족을 발견하고 친절하게 인사하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나요?”
“아, 네. 오늘 저희 아이들이 최진우 감독님 영화 대본 리딩이 있어서요.”
“혹시 장연욱, 장혜나 배우님들이 맞나요?”
배우님이라.
그런 소리를 들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네. 맞아요.”
“7층으로 올라가시면 701호 리딩장이 있어요. 그쪽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최진우 감독의 최고 투자자라는 KJ 엔터테이먼트는 국내 최고의 영화사이면서 동시에 기획사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KJ ENM 본사에서 배우들을 전부 모이게 한 것을 보면 이 영화도 KJ의 투자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여긴가······?”
부모님은 조심스레 701호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다.
“응?”
“누구지?”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사람은 임성곤과 김미리 배우였다.
잠깐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다 오늘 연습을 위해 대본을 읽느라 다들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김미리 배우가 갑자기 내리던 고개를 다시 올리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
날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그러고는 옆에 있던 임성곤을 툭툭 치며 우리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임성곤도 나와 혜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 시작했다.
슬슬 그런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질 때였다.
“어머님,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
저번에 카메라 오디션 때 봤던 스태프가 달려왔다.
그는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고 마실 것과 가벼운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대본은 다 챙겨 오셨죠? 만약 안 챙겨 오셨다면 저희가 따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 다 챙겨왔어요.”
“넵.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감독님도 곧 오실 겁니다. 이따 대본 리딩이 시작되시면 혜나와 연욱이는 여기에 앉혀 주시고 부모님은 따로 뒤에 앉아 주시면 됩니다.”
배우들이 다 모인 거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자리 배치가 좀 이상했다.
부모님도 그걸 인지하신 건지 조용히 귓속말로 얘기를 나누었다.
“여보. 우리 아이들 자리가 너무 상석이랑 가깝지 않아?”
“그러게. 감독님 바로 옆인데. 보통 여긴 주연 배우들이 앉는 곳 아니야?”
부모님 말씀대로 스태프가 우리에게 안내해 준 자리는 상석과 아주 가까운 자리였다.
저 맞은편에는 주연급인 임성곤과 김미리가 한 칸 띄어서 자리하고 있었다.
보통 아역이면 끄트머리에 앉히지 않나?
“아-!”
“오셨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배우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꺾었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래그래. 다들 앉아 있어. 왜 다 일어나고 그래. 사람 부담스럽게.”
“아닙니다, 선배님.”
영화계에서는 대배우이자 대선배인 허준영이었다.
배우들은 아주 깍듯하게 존경하는 선배를 모시고 있었다.
“응? 그런데 처음 뵙는 분들이네?”
임성곤 옆자리에 앉으러 가던 허준영이 우리 남매와 부모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희 아이들이 영화 아역 배우를 맡게 되어서요.”
“오. 그래요? 반갑습니다. 허준영입니다.”
스태프에게 안내를 받고 지정된 자리로 가던 허준영이 반대편에 있는 우리 가족에게 와서 악수를 건넸다.
평소에도 허준영 배우를 좋아했던지라 부모님은 기쁜 마음으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너희들도 얼른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허허. 그래. 반갑다. 아이들이 참 예쁜 만큼 예의가 바르네요. 아저씨랑 악수 한번씩 할까? 앞으로 잘 부탁한다.”
혜나와 내게도 악수를 건네며 푸근한 미소를 짓는 허준영이었다.
대배우와의 악수라니.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다.
저번 생이었으면 친구들한테 자랑이란 자랑은 하루 종일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최 감독이 어디서 이런 보물들을 구했을까?”
“네?”
“허허.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요. 제가 여러 영화들을 찍어 봤지만, 이렇게 예쁘고 잘생긴 아역들은 또 처음 보네. 너희들도 그렇지?”
허준영의 말에 임성곤과 김미리가 얼른 튀어 나와 대답했다.
“맞습니다, 선배님.”
“저는 아까 리딩장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니깐? 어머니. 아이들이 혹시 몇 살이에요?”
“연욱이는 9살이고, 혜나는 11살이에요.”
“정말요? 어머니랑 아버님은 좋으시겠다. 난 내 자식들이 이렇게 예쁘면 하루 종일 바라보기만 할 거 같아.”
“그러게. 진짜 둘 다 너무 귀엽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무뚝뚝해 보이는 카리스마가 있지만, 막상 앞에서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성격은 정 반대인 듯했다.
그렇게 임성곤과 김미리 배우가 호들갑을 떠는 사이, 최진우 감독이 들어왔다.
“오늘 리딩장이 시끌시끌하네요?”
“어머. 감독님 오셨어요?”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최진우 감독은 대충 배우들의 인사를 받아준 뒤 우리 남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연욱이랑 혜나, 그동안 잘 지냈니? 대본 연습은 잘했고?”
“네~”
“그래. 오늘 잘 부탁한다.”
그런 뒤 상석에 앉으며 배우들에게 말했다.
“자자. 다들 이제 앉아 주세요. 아직 다 도착을 하지 않은 거 같으니까, 그동안 최종 점검해 주십시오.”
이윽고 다른 배우들도 속속히 리딩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선배인 허정우와 최 감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가 땅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여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약속 시간까지 10분 더 남아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너무 일찍 오신 거지. 그러게 형님은 좀 늦게 늦게 다니시라니깐.”
“크흠. 내가 일찍 오고 싶어서 일찍 왔나. 매니저 놈이 맨날 30분 일찍 데려다 주는 걸 어떡해?”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최진우 감독은 정각이 딱 되고 나서 대본을 들었다.
“다들 모인 거 같으니, 이제 시작해 볼까요?”
부모님은 우리 둘을 놔두고 뒤로 빠져주셨고, 배우들은 하던 대화를 모두 멈추었다.
일순 공기가 달라졌다.
방금까지 웃으며 서로 얘기를 나누던 배우들이 전부 진지한 자세로 바뀐 것이다.
역시 프로들의 모임이라 그런가.
뮤지컬 때와는 또 다른 광경이었다.
대본 리딩 같은 건 예전에 영상으로 몇 번 본적이 있다.
그때도 배우들이 정말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배역에 몰입해 연기하는 것을 봤는데, 과연 여긴 어떨까?
“인간이라고 보지 마. 저놈들은 가축이다. 그냥 우리가 매일 먹는 돼지들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우린 사람을 실험하는 게 아니라, 가축을 실험하는 거야.”
담배와 비슷한 길이의 막대기를 쭉 빨아들이며 연기를 펼치고 있는 허준영이었다.
방금까지 푸근하게 웃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광기 어린 눈동자와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그런 가축들한테 정을 주는 놈은 똑같이 가축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예. 박사님.”
몇몇 배우들이 대답하자 허준영은 스윽 고개를 들어 무섭게 주변을 살펴본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소유물을, 피 같은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낸 가축들을 빼돌리는 놈들이 있어.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잡아 와. 안 그럼 너희들이 대신 저 방 안에 갇힐 줄 알아.”
“네!”
대본 리딩이라고 해서 허투루 연기를 하지 않는 허준영 덕분에 배우들도 결코 설렁설렁 대본을 읽지 않았다.
이 영화에 잠깐 등장하는 엑스트라들도 열심히 대본을 읽어 내려가며 영화의 몰입도를 살려 주었다.
왜 감독들이 허준영 배우를 높이 평가하는지 알 것 같다.
그의 생동감 넘치는 연기 덕분에 다른 배우들도 영향을 받아 평소보다 더 열정과 연기력이 살아나는 듯보였다.
“안 돼! 내 아이들은 절대 못 데려가!”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저 여자한테 주사기 꽂아!”
나는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영화에 등장해봤자 1분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
그리고 마침내 혜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
허준영이 연기를 하고 있을 때도 대본만 보고 있던 배우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혜나에게 쏠린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본 리딩이 시작됐을 때부터 역할에 몰입하고 있던 혜나가 서글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슬픈 감정을 잡고 애처롭게 엄마를 부르는 혜나.
그녀를 지켜보던 배우들은 안타까움과 흐뭇함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아까 전부터 우리 남매에게 큰 관심을 보이던 허준영은 유심히 혜나의 연기를 감상했다. 다른 배우들은 혜나의 귀여운 얼굴만 보고 있지만, 허준영은 연기력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듯보였다.
“아저씨. 우리 엄마한테 데려다주세요. 네?”
뮤지컬을 통해 처음 연기를 접한 혜나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정말 피나는 노력으로 스스로의 연기력과 노래 실력을 끌어 올렸다. 옆에서 쭉 지켜본 나로서는 밤새 연습하는 혜나를 보고 참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연습의 결과가 지금 여기서 빛을 발했다.
11살짜리의 그것이라고 보기에 힘든 연기력으로 배우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으니 말이다.
“오-. 잘하네.”
“그러게. 저렇게 얼굴도 예쁜 아이가 연기까지 잘하면 어떡한담? 하하.”
혜나의 파트가 끝나자 배우들은 저마다 짧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제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몇몇 배우들의 파트가 끝난 뒤 내 차례가 되자 다시 그들은 혜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 모든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부담되네.’
아까는 혜나의 열연을 옆에서 감상하느라 이 시선들이 가져다주는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모든 시선이 내게 꽂히게 되니 뭔가가 어깨를 꾹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긴장감을 알아차린 것일까.
혜나가 내 손등을 툭툭 건들었다.
그러고는 입 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치는 게 보였다.
혜나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본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