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26화 >
부모님은 나와 혜나의 의견을 먼저 물어본 뒤 최진우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들 중 하나로 뽑히는 최진우 감독을 만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는 느낌은 없지만,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긴 했다.
“안녕하세요. 최진우입니다.”
저번에 뮤지컬 마지막 공연에서 봤을 땐 그냥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명감독의 포스가 좔좔 흐르는 듯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감독님.”
“안녕하세요~”
최진우 감독은 싱긋 웃으며 나와 혜나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래. 혜나랑 연욱이는 저번보다 더 큰 거 같다? 그것도 더 예쁘게. 무대에서 봤을 땐 정말 빛이 나더구나. 공연 아주 잘 봤다.”
“감사합니다~”
그는 잠시 우리 남매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다 부모님에게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 모델 촬영을 맡았던 최진영 작가가 제 동생입니다. 진영이가 작업하던 앨범을 우연히 보게 돼서 혜나랑 연욱이를 알게 됐고요.”
“아. 그러셨군요.”
“네. 그래서 두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확인차 뮤지컬 마지막 공연에 갔었는데, 거기서 이 남매의 팬이 되었지 뭡니까? 하하하.”
털털하게 웃으며 최진우 감독은 그날 찍은 사진들을 몇 장 보여 주었다.
“이건 제가 소장하고 있는 개인 사진들입니다. 따로 커튼콜을 녹화하기도 했고요. 원하신다면 제가 따로 파일을 드리겠습니다.”
“어머. 감사해요.”
“그리고······ 아직 두 아이 소속사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없어요. 아직은 소속사에 들어가게 할 생각도 없고요. 조금 더 크고 난 후에 아이들이 원하면 그때 소속사를 찾으려고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럼, 모든 결정권은 부모님에게 있는 것으로 알고 이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최진우 감독은 가방에서 어떤 서류를 꺼내 놓았다.
“이건······.”
“이번에 촬영 들어갈 영화 시나리오입니다. 시나리오는 기밀이니, 유출하지 않게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네. 그런데 저희가 봐도 괜찮나요?”
“제가 2년 정도 작업한 시나리오인데, 6개월 전에 혜나와 연욱이를 보고 영감을 얻어 초중반 부분을 대거 수정했습니다.”
혜나와 나를 보고 시나리오를 갈아엎었다?
최진우 감독 영화중에 남매가 등장하는 게 있었던가.
내 기억으로는 없다. 그렇다는 건 원래 이 영화는 탄생할 수 없는 것인데, 나와 혜나가 그의 눈에 들면서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돌다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또 누군가의 미래가 바뀌는구나.
그럼, 원래 탄생했어야 할 영화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영화가 차지하는 건가?
“제목은 아직 미정입니다만, 가제로는 ‘실험실 아이들’ 입니다.”
“실험실······ 아이들이요?”
제목은 좀 쎄했다.
부모님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자 얼른 최진우 감독이 진화에 나섰다.
“가제입니다. 보통 가제를 지을 땐 그냥 직관적으로 짓고 나중에 가서 제대로 제목을 만드니까요.”
“혹시 장르가······.”
“액션입니다. 하지만 수위가 높아지면 19금으로 까지 갈 수 있는 영화라, 최대한 수위 조절을 해 보려 합니다.”
오. 액션 영화라니.
최진우 감독의 액션 영화라면 기대할 만하다.
저번에 낸 액션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지 않았던가?
최진우라는 이름값도 있고, 매번 특이한 소재로 영화를 내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감독이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부모님은 얼른 문서를 펼쳐 시나리오를 확인해 보았다.
최진우 감독은 부모님을 위해 차를 내오고 두 분이 읽기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나와 혜나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윙크를 날렸다.
궁금하다. 궁금해.
최진우 감독이 무슨 시나리오를 쓴 것일까.
실험실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은 솔직히 아닌 것 같고, 아마 영화를 다 만들었을 때쯤 제대로 된 제목을 만들 것 같았다.
그래도 제목만 들어보면 대충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실험실에서 뭔가 불법 실험을 받고 있는 아이들 이야기를 쓴 거겠지?
“음······.”
읽기를 마친 부모님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재미는 있는데, 이걸 나와 혜나한테 시켜도 되는지 고민하는 듯보였다.
“많이 잔인할까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정서상 좋지 않을 수도 있을까 싶어서요.”
“당연히 잔인한 장면은 전부 CG 처리됩니다. 핏자국 같은 것도 아이들한테 절대 보이지 않을 거고요. 요즘 법이 잘 되어 있어서 아이들한테 그런 걸 함부로 보여 주면 안 됩니다. 아마 아이들 눈에는 다 큰 어른들이 초록색 배경에서 초록색 옷을 입고 뛰는 것밖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최대한 CG 떡칠을 해 나와 혜나가 충격적인 장면을 보지 않도록 조정한다는 뜻이었다.
“혜나와 연욱이가 주연의 아역을 맡는 만큼, 최대한 19금은 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영화 홍보를 위해 아이들이 얼굴을 내밀어도 괜찮을만큼요.”
최 감독은 조곤조곤 설명을 해 가며 부모님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잔인한 장면이 다수 섞여 있는 영화인만큼 부모님은 걱정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아직 아이들 오디션도 안 봤는데, 이미 마음을 굳히신 건가요?”
“오디션은 이미 뮤지컬 마지막 공연에서 끝났습니다. 물론, 라이브 공연과 카메라 앞에서 보여 주는 연기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교정 연습은 필요할 겁니다. 사람마다 카메라 화면에서 보여 주는 시너지가 다르거든요. 그래서 저번에 별도로 카메라를 챙겨가 녹화를 한 겁니다. 녹화된 영상을 보니, 카메라도 잘 받더군요.”
최진우 감독은 여기서 계속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다고 여긴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결정하시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실 듯합니다. 다른 곳에 유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시나리오를 넘겨 드릴 테니, 천천히 검토해 보세요. 아직은 캐스팅 단계라 본격적인 촬영은 빠르면 10월이나 내년 초에 시작될 겁니다. 물론, 시나리오도 수정될 가능성이 크고요.”
“네. 잘 알겠습니다.”
“혜나랑 연욱이는 꼭 다시 보자. 알겠지?”
“네~ 안녕히 계세요.”
부모님은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혜나가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조르는 통에 결국 햄버거 세트를 하나씩 사들고 왔다.
“여보. 이거 해도 괜찮은 걸까?”
나는 우물우물 버거를 씹으면서 한쪽 귀로는 부모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음. 최진우 감독이 찍는 영화라면 배우들이 엄청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거잖아. 꿈의 영화 아니야? 그런 곳에 내 새끼들이 출연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솔직히 실감이 잘 안 나.”
“그래서 출연시키는 게 좋다는 거야?”
“난 일단 찬성이야. 당신은 영 내키지 않나보네.”
“저번부터 내가 말했잖아. 우리 아이들을 돈벌이로 쓰고 싶지 않다고. 여러 소속사에서 계약하고 싶다고 컨택 왔을 땐 조금 유혹이 됐지만, 금방 정신 차렸지.”
여러 소속사에서 거금을 들이밀고 아이들을 넘기라고 하면 흔들릴 부모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굳세게 그것들을 모두 거절했다.
아마 인터넷을 뒤져 여러 방면으로 정보를 얻으셨을 거다.
일단 소속사에 들어가게 되면 계약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와 혜나가 스케쥴을 맞춰줘야 한다.
광고를 찍으라고 하면 찍어야 하고, 드라마를 찍으라 하면 거기로 가서 또 드라마를 찍어야 한다. 무조건 혹사를 당한다고 볼 순 없지만, 어머니는 나와 혜나가 힘들게 일하는 꼴을 보기 싫으신 것이다.
“난 혜나랑 연욱이가 벌어 준 돈으로 호의호식할 생각 없어. 그리고 뮤지컬 할 때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다고. 피곤해서 쓰러져 자고 있으면 눈물이 다 난다니깐?”
“응······. 맞아.”
“그래서 사실 마음 같아서는 더 안 시키고 싶어. 최소한 중학교, 고등학교는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이제 초등학교 밖에 안 다니고 있는데. 조금 크다 보면 원래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많이 바뀌잖아. 그리고 혜나 꿈은 가수야. 이건 배우가 하는 일이잖아.”
“당신 말이 맞아.”
어머님 말씀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혜나의 꿈은 가수다.
물론, 영화 찍는다고 가수의 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건 혜나 누나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게 좋다고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면 이것보다 좋은 일거리가 없겠지만,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고민 또 고민할 수밖에.
“그래도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건 혜나랑 연욱이 의견 아니겠어? 그러니까 내가 물어 볼게.”
나는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얼른 햄버거를 와구와구 씹어 먹는 척을 했다.
“우리 토끼들. 잠깐 아빠 좀 봐봐.”
“웅~”
아버지는 차근차근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셨다.
방금 만난 아저씨가 누구고, 또 어떤 내용의 영화로 캐스팅 제의를 했는지 말이다.
대충 국가 실험실에서 여러 실험을 통해 초능력이 생긴 남매가 불의의 사고로 떨어져 나중에 어른이 돼서 만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었다.
해외에서 유명한 위너 브라더스에서 현재 배급 계약을 논의 할 정도로 초반부터 매우 잘 풀린 영화라고 한다.
“어때? 해 보고 싶어? 너희들이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하고 싶었다.
내가 언제 최진우 감독 같은 사람과 함께 작품을 해 보겠는가.
하지만 나는 내 의견보다 혜나의 의견을 중시했다.
이번 생에서 그녀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꿈이 가수라면 가수의 길을 평탄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하고, 만약 배우나 혹은 전혀 연예계 쪽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도 상관없다.
이제는 내 친누나인만큼, 가족인만큼, 성심성의를 다 해 도울 것이다.
두 번 다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말이다.
“움-.”
혜나는 오밀조밀한 입술로 햄버거를 우물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부모님과 나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할래!”
“응? 저, 정말?”
“웅! 그런데 그 아저씨랑 같이 영화 찍으면 나중에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거야?”
“맞아. 혜나랑 연욱이 얼굴이 큰 스크린에 나오는 거지.”
“우와-. 진짜?”
“응. 진짜.”
혜나는 잡고 있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럼 더 하고 싶어. 나랑 연욱이가 다 부셔 버릴 거야!”
“호호. 그래. 혜나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하지만 엄마랑 약속 하나만 하자.”
어머니는 혜나 머리를 쓰다듬다 새끼 손가락을 내보이셨다.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야.”
“응?”
“너희들 요 1년 동안 뮤지컬도 하고 키즈 모델도 하고 바빴잖아. 키즈 모델은 저번에도 계약이 갱신돼서 또 찍어야 돼. 거기다 영화까지······. 엄마는 우리 토끼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캐스팅을 해 줘서 어안이 벙벙해. 그런데 벌써부터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 빨리 지칠 거야.”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그 정도로 혹사를 하고 있진 않지만, 들어오는 캐스팅 제의를 전부 받아들였다면 나중에는 좋아서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의무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즉, 일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매너리즘에 빠져 기계적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혜나가 원하는 가수의 꿈도 그것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어. 그래서 엄마는 매일 조심스러워. 아직은 너희한테 시간이 많잖니. 벌써부터 그쪽 세계에 빠져 들기보다는 조금 더 다양한 걸 경험해 보고 천천히 너희들 꿈을 결정해줬으면 좋겠어.”
언제 봐도 참 현명하신 어머니다.
“자. 엄마랑 약속하자. 이번 작품만 하고 당분간은 일하지 않기로. 그동안 공부도 하고 가족끼리 여행도 다니자.”
“작품이 계속 하고 싶으면?”
혜나의 기습적인 질문에 어머니는 조금 당황하셨지만, 그래도 고집을 피우진 않으셨다.
“음-. 그럼 어쩔 수 없지. 혜나가 꼭 하고 싶으면 엄마한테 말해. 뭐든 시켜 줄게. 알겠지?”
“웅!”
혜나가 먼저 어머니 손을 붙잡았다.
“복사까지 완료!”
그런 뒤 어머니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연욱이는?”
“저도 좋아요.”
난 어머니의 의견에 적극 찬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연예 생활을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혜나가 지금부터 가수 생활을 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초를 쌓아야 할 때다. 그러다 때가 오면 웅크려 두었던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오르면 되는 것이다.
“우리 토끼들 너무 예뻐. 엄마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나도오~”
혜나가 어머니 품에 들어가 안겼다. 나도 그에 따라 달려가 같이 껴안았다.
예전에는 이런 스킨쉽이 너무 어려웠지만, 지금은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혜나는 내 누나고, 이분들은 진짜 내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못 받은 사랑을 이 짧은 시간 동안 분에 넘치도록 받은 것 같다.
나중에 커서 꼭 사랑 받은만큼 돌려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