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23화 >
“음-.”
최진영 작가는 앓는 소리를 내며 사진 편집에 한창이었다.
결국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칙칙한 작업실을 빠져 나왔다.
“왜? 집중이 안 돼?”
거실에서 한가롭게 콜라와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있던 진영의 형, 최진우의 말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그러네.”
“흐흐. 그럴 땐 리프레쉬가 필요하지. 작품의 영감이 서지 않을 땐 더더욱 말이야. 여기 와서 앉아라. 같이 영화나 보자.”
“그럴까?”
진영도 널찍한 소파에 앉아 무슨 영화를 보나 살펴보았다.
그냥 단순한 액션 영화다.
스토리는 없고, 무작정 총만 쏘면서 펑펑 터지는 액션 영화.
사진 작가로 유명한 진영과 마찬가지로 영화판에서 성공한 감독인 최시우다.
그가 저런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건 최진영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많이 복잡하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진영은 형이 먹고 있던 팝콘을 하나 쏙 빼어 먹으며 말했다.
“형도 뭔가 고민이 많은가 보네?”
“창작의 고통이란 게 다 그렇지. 그런데 너는 뭐 고민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후유증이 좀 심하네.”
“후유증? 정말 마음에 드는 모델이랑 작업 했었나 보네. 형도 가끔 그런 후유증 올 때 있지. 작품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는 대배우들 있잖냐. 감독인 내가 경외심이 절로 드는 배우들. 그런 사람들이랑 한번 작품하면 이상하게 후유증이 생겨서 나도 다음 작품 때 고생 많이 한다.”
작가나 감독들이 공감하는 것이 있다.
남들에게서 느껴 보지 못 하는 대배우들만의 아우라와 그 기운에 휩싸인 작품을 하고 난 뒤에는 짜릿한 환희와 동시에 후유증이 몰려온다.
이상하게 다음 작품에 영향을 크게 받아 진행이 어려운 것인데, 지금 최진영이 그 후유증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저번에 누구랑 작업했는데?”
“음-. 내가 형한테 말 안 했었나? 저번에 키즈 모델 촬영하고 왔다고.”
“아. 그거? 엄청 구시렁거리지 않았냐. 키즈 모델 데려다가 찍는 건 힘들다고 말이야.”
“응. 근데 이번에는 많이 달랐어. 그 아이들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야 할까. 내가 최대한 시야를 넓게 보고 자유로움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꽉 막힌 꼰대였더라고.”
가볍게 잡념을 털어 내고자 아무 액션 영화나 틀어 놓았던 최진우는 더 이상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라이드가 강한 동생이기에 이런 반응은 흥미가 당겼다.
“도대체 누구랑 작업했는데 그래?”
“잠깐 기다려 봐. 보여 줄게. 내가 배경화면을 이 모델들로 해 놓았거든.”
“뭐? 배경화면을?”
딱딱한 기본 휴대폰 배경화면만 쓰는 놈이 모델 사진을, 그것도 극도로 싫어하는 키즈 모델들을 배경화면에 저장해 놓았다고? 내일 해는 서쪽에서 뜨겠다고 생각한 최진우였다.
“이 모델들이야. 어때?”
화면에는 두 아이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해맑은 표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띠우게 만드는 흐뭇한 사진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키즈 모델들을 봐왔지만, 최진우는 단연코 이 아이들이 최고로 귀엽고 예뻤다.
“이야. 이 아이들 몇 살이야? 마스크가 벌써부터 남다르잖아.”
“남자 모델은 9살. 여자 모델은 11살. 둘이 남매야.”
“이게 9살, 11살 밖에 안 된 얼굴들이라고? 거기다 남매?!”
“예쁘지? 내가 괜히 배경화면으로 해 놓은 게 아니야.”
“예쁜 수준이 아니야. 나이 좀만 먹으면 진짜 장난 아니겠어. 다른 사진은 없냐?”
“당연히 있지.”
최진영은 신이 나서 아예 연욱과 혜나의 앨범을 가져와 형에게 보여 주었다.
그동안 동생의 사진과 작업 과정을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 온 진우였기 때문에 이 앨범에 얼마나 많은 열정이 담겼는지 알 것 같았다.
사진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열심히 하는 동생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모델과의 작업은 티가 확실히 났다. 그런데 설마 키즈 모델들이 깐깐한 진영의 열정을 끌어낼 줄은 몰랐다.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네. 네가 찍은 사진만 봐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겠다.”
“그래서 지금 반동이 세게 왔어. 지금 하는 작업이 손에 안 잡힐 정도라니깐?”
“그 정도야? 허허. 참.”
“형이 사진만 봐서 그래. 혜나랑 연욱이를 촬영장에서 직접 보면 형도 내 말 이해할 걸?”
“흐음-. 그 정도란 말이지.”
앨범을 찬찬히 훑어보던 최진우는 얼굴 표정이 점점 바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는데, 지금은 감독의 자세로 돌아와 앨범 속에 담긴 사진을 살펴봤다. 그 진지함에 괜히 말을 걸기가 어려워 최진영은 가만히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앨범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보던 최진우가 말했다.
“이 남매, 지금 하는 게 있나?”
“뮤지컬 아역 배우로 활동 중이야.”
“둘 다?”
“응. ‘괴물’이란 뮤지컬을 하고 있는데, 거기 뮤지컬판에서 유명해.”
“경력이 있는 아역들이었어?”
“아니. 첫 작품이야. 그런데도 인기가 대단한가 봐. 연욱이랑 혜나가 나오는 무대는 티켓 구하기 엄청 힘들다더라.”
사진만으로는 아쉬워진 최진우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동생에게 물었다.
“너 혹시 티켓 있냐?”
“와-. 귀신이네.”
“응?”
“내가 저번에 이 남매 촬영하고 나서 그쪽 부모님이 고맙다고 가지고 계시던 VIP 티켓 한 장을 나한테 주셨거든. 그런데 내가 스케쥴 때문에 못 가게 생겼어.”
“오-. 그래? 잘 됐네. 귀한 티켓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보단 누군가가 쓰는 게 낫지. 내놔.”
“젠장. 괜히 남 좋은 일 시켜 주는 거 같아서 배 아프네. 나도 이거 꼭 보고 싶었는데.”
“흐흐. 이 형님이 대신 가서 잘 보고 오마.”
그렇지 않아도 이 티켓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던 진영이었다.
꼭 가고 싶은 공연이었지만, 해외로 나가야 하는 일정이 잡혀 있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건 무려 막공 티켓.
형에게 건네주는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아까웠다.
“이번 마지막 공연은 커튼콜 촬영 된다니까, 형이 나 대신 가서 좀 찍어 와.”
“그래. 마음에 들면 실컷 찍어올 거니까, 걱정 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뮤지컬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와 버릴 형이라는 걸 진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욱이와 혜나라면 분명 형의 마음에 쏙 들 거라 생각했다.
동생에게서 VIP 티켓을 받아 챙긴 진우는 왠지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 * *
“사람이 엄청 많네.”
공연장에 몰려 든 사람들을 보고 최진우 감독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뮤지컬 시장이 어렵다는 얘기가 많던데, 지금 이 풍경을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좀 주책인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거 같진 않네.”
동생 부탁으로 커튼콜 촬영을 위해 장비를 챙겨왔다.
처음에는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공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오늘 있을 커튼콜 촬영을 위해 각자 장비를 챙겨온 듯보였다. 덕분에 이 큰 가방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공연을 기다리면서 최진우는 뮤지컬 포스터와 팸플릿을 살펴보았다.
다른 배우들 사진은 죄다 넘겨 버리고 혜나와 연욱이 것만 찾아보는 꼼꼼함도 잊지 않았다.
“곧 공연이 시작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기다리던 공연이 시작되었다.
‘괴물’ 뮤지컬의 마지막 무대였다.
‘별로기만 해 봐라.’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짐을 가지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마음에 든다면······?
글쎄. 그건 그때 두고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 * *
“감사합니다!”
마지막 공연이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다.
커튼콜이 시작되고 배우들은 한 자리에 나와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대부분 배우들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내 옆에서 같이 손을 잡고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던 혜나도 눈물을 글썽였다.
“울지 마, 혜나야~”
“괜찮아~!”
그런 혜나의 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관객들이 울지 말라며 소리쳐 주었다.
이번 커튼콜은 마지막인만큼 보통 때와는 많이 달랐다.
금지되었단 촬영이 허가 되고 배우들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노래를 불러 준다. 그리고 추첨을 통한 상품 전달도 있어서 마지막 공연은 티켓 구하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들었다.
“연욱아. 저기 봐.”
“응?”
글썽이던 눈물을 지우고 관객석 앞자리에 쪽을 혜나가 손으로 가리켰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카메라 장비를 챙겨 와 커튼콜을 녹화 중에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는데, 30 후반에서 4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방송국에서나 쓸 법 한 장비를 챙겨와 열심히 녹화를 하고 있었다.
“저 아저씨 아까부터 우리만 찍는다?”
“그래?”
왠지 그런 거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근데 저 아저씨 왜 어디서 본 것만 같지.
“자~ 혜나야! 이쪽으로 오렴.”
어느덧 커튼콜 이벤트 사회를 보고 있는 류재한 배우가 혜나를 불렀다.
이벤트 추첨을 위해 혜나가 통에 손을 넣어 좌석 번호를 뽑는 것이었다.
혜나는 총총 뛰어가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뒤 추첨에 나섰다.
“행운의 주인공은 바로오~ 두구두구두구.”
혜나는 열심히 통을 뒤적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발로 땅을 두드리며 긴장감을 더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치 무대의 주인공처럼 조명과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혜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모습이 아닌가.
무대 위에서의 혜나는 날개를 단 듯이 자유로워 보였다.
이대로 계속 혜나가 무대 위에 서도록 내가 도와야 하는 것일까.
만약 무대 위에 계속 서야 한다면, 그것이 굳이 뮤지컬일 필요는 있을까.
저번 생의 기억과 지금의 광경이 겹쳐지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혜나의 뮤지컬 데뷔로 이미 그녀의 미래는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과연 그녀의 미래를 위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욱아~ 너도 와서 뽑아 줘!”
나는 잠시 잡념을 뒤로 미루고 혜나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추첨을 통해 뽑힌 관객들은 선물을 받아 가고, 우린 몇몇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성황리에 커튼콜을 마무리했다.
휘장이 내려가자 공허함이 가득히 가슴에 남았다.
하지만 이 여운을 푸는 것도 잠시.
“너희들도 봤지?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지?”
“맞아요, 선배님. 저도 똑똑히 봤습니다.”
저번처럼 무대가 끝나고 나서 배우들이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무언가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궁금증에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슬쩍 귀를 기울여 보았다.
“확실해. 분명 최진우 감독님이었어.”
“최진우 감독님도 원래 뮤지컬 좋아하시나? 난 커튼콜에 그런 좋은 카메라 가지고 오시는 분은 처음 봤거든.”
“나도 신기해서 쳐다본 거였는데, 자세히 보니까 최진우 감독님이더라.”
최진우 감독?
아-. 설마 아까 그 아저씨가 최진우 감독이었나.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저번 생에서 TV로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최진우 감독이 누구인가.
10년 후에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오스카에서 4관왕을 하게 되는 사람이다.
오스카상을 받기 전에도 한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감독이었다.
첫 데뷔작도 그렇고, 내는 영화마다 대박을 치는 감독.
그가 발굴한 배우들은 하나 같이 톱스타가 된다.
영화계에서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릴 만큼 그의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널려 있다고 봐야 했다.
아마 배우들도 최진우 감독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소극장 연극판에서 전전하던 송대호를 발굴해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배우로 거듭나게 만든 감독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오늘 뮤지컬 마지막 공연을, 그것도 촬영 장비를 들고 와 커튼콜을 녹화하기까지 했다.
단순히 공연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공연을 하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감독의 마음에 든 주인공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모두 흥분감을 감추지 못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문 감독님. 감독님도 봤죠? 최진우 감독님이 VIP석에 있었던 거.”
“나도 봤어. 안 그래도 공연 끝나고 나서 최진우 감독님이 EMS 쪽에 문의 넣었다고 하더라.”
“정말요?”
“어머. 진짜 누구 다음 영화에 캐스팅 하려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문의를 넣으셨는데요?”
어느새 배우들이 전부 문 감독 앞으로 모여 있었다.
“왜긴 왜야. 마음에 드는 배우가 있으니까 문의를 넣으셨겠지?”
“그러니까요. 그게 누군데요?”
나도 궁금했다.
최진우 감독은 누가 마음에 들어서 손수 촬영까지 했던 것일까.
그때 문 감독이 나와 혜나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욱이랑 혜나.”
“네?”
“최 감독님이 연욱이랑 혜나 프로필 문의했었다고.”
순간 모든 배우들이 나와 혜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배우가 아니라 나랑 혜나를 보러 온 거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