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6화 >
“어머. 재한 씨. 오늘 무슨 날이야? 왜 다 모여 있는 거야?”
“감독님이랑 같은 이유 때문이죠. 감독님도 오늘 혜나랑 연욱이 연습하는 거 보러 온 거 아닙니까?”
“호호. 나야 감독이니깐. 배우들이 어떻게 연습을 하는지 항상 체크해야지.”
“평소에는 연습실 쳐다보지도 않으시는 분인 거 다 압니다. 흐흐.”
스케쥴 때문에 연습실에 조금 늦게 도착한 문 감독은 혜나가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혜나는 벌써 끝났어? 어때? 잘했어?”
“네. 딕션도 괜찮고, 발성도 좋더라고요. 목소리가 너무 고와.”
“맞아. 안 그래도 사람들이 오해하더라고. 내가 얼굴 보고 혜나 뽑은 줄 알고. 근데 전혀 아니야. 오디션에서 다른 아이들 중에서 혜나가 제일 특출났어.”
박수갈채를 받으며 혜나가 돌아가고, 이제 연욱이가 삼촌, 이모 팬을 자처하는 배우들 앞에 섰다.
“연욱이 파이팅~”
“긴장하지 말고 해~”
그런 배우들을 보며 문 감독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주책들이야 정말.”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 색다르긴 했다. 그리고 내심 기대도 되었다.
저번 오디션 때보다 얼마나 연욱이가 성장했을지가 문 감독의 관심사였던 것.
류재한 배우는 혹시나 싶어 문 감독에게 조용히 물었다.
“연욱이도 혜나처럼 실력으로 뽑은 거 맞죠?”
“응?”
“얘가 얼굴은 너무 잘생기고 예쁜데, 실력이 떨어지면 나 엄청 실망할 거 같거든.”
“그, 그래?”
“아무리 아역이라고 해도 뮤지컬 관객들은 냉정하잖아요. 얼굴만 잘생겼다고 해서 뜰 수 있는 판이었으면 나 같은 건 저 바닥에 묻혔겠지.”
류재한 말이 맞았다.
뮤지컬 관객들은 까다로운 면이 많아 얼굴이 잘생겼다고 해서 그 사람 공연만 찾아서 보지 않는다. 비주얼도 물론 중요하지만, 관객들을 사로잡는 건 바로 노랫소리였다.
그 점에서 류재한 배우는 냉정했다.
만약 연욱이가 실력은 없고 얼굴만 잘난 아이라면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재한 씨.”
“네?”
“나 몰라? 나 문샛별이야. 이 바닥에서 꽤 오래 굴렀어. 내가 설마 대충 뽑았을까?”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거 더 기대가 되네.”
“그리고 아역배우잖아. 한번도 아역한테 신경 쓴 적이 없는 양반이 연욱이한테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아역의 실력이 있든 없든 그냥 그러려니 했던 사람이 바로 재한 씨 아니야?”
“그, 그러게요. 저도 이상하게 자꾸 연욱이랑 혜나한테 거는 기대가 많아져서······. 묘하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나도 잘 모르겠네.”
문샛별 감독도 류재한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남매에게는 다른 아이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특히 연욱이는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는 그 무언가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단순히 월등한 생김새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연욱이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항상 그 아이 주변에 흐르고 있었다.
“오. 시작한다.”
이윽고 연욱이의 연습 무대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긴장한 모습을 보였는데, 막상 반주가 시작되자 공기가 확 바뀌었다.
오디션 때 보여 준 그 절절한 감정으로 대사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저번보다 확실히 더 나은 연기력이었다.
“······.”
문 감독은 진지하게 연욱이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류재한을 슬쩍 살펴보았다.
얼굴만 보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니면 자기 기준에 못 미치는 건지 모르겠다.
고작 아역 배우 무대를 저렇게 진지하게 평가하다니.
그만큼 연욱이가 류재한 배우 마음에 쏙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잠시.
문 감독은 이끌리듯 연욱이의 무대에 빠져 들었다.
집에서 혜나와 같이 부단히 연습을 한 모양인지, 노력한 티가 물씬 풍겨난다.
기특하다.
재능도 있는데, 노력도 겸비하는 아이라니.
“감사합니다.”
마침내 무대가 끝이 나고 연욱이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배우들이 큰 박수로 환호해 주었다.
“이야~ 잘한다!”
“진심 거짓말이 아니라 바로 무대에 올려도 괜찮겠는데?”
배우들의 반응은 좋았다. 그러나 문 감독은 류재한 배우의 반응이 제일 궁금했다.
“음-.”
아리송하게 침음을 뱉던 류재한 배우가 문 감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샛별 감독님.”
“으응?”
그리고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뮤지컬 톱배우가 연욱이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 주었다.
“욕심이 생기게 만드는 남매네.”
“응?”
“연욱이랑 혜나요. 오디션 곡 말고 다른 것도 듣고 싶다.”
뭔가를 고민하던 류재한 배우는 이내 연욱이에게 다가갔다.
“연욱아. 형이랑 오늘 이거 한번 연습해 볼까?”
갑자기 류재한 배우가 대본을 가져와 어떤 파트를 가리켰다.
오늘은 그냥 가볍게 오디션 때 했던 곡만 연습을 시키려 한 김수빈 코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재한 오빠.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오늘은 가볍게 하려고 했는데.”
“아. 그런가? 미안. 이왕 오늘 나온 거 같이 연습해 보고 싶어서.”
“오늘 연습해도 연습 비용 안 나와요, 오빠.”
보통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려면 평균 2개월 정도 연습을 거친다.
특히 ‘괴물’ 뮤지컬은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공연이기 때문에 거의 3개월에 가까운 연습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동안 배우들은 스케쥴대로 연습을 하러 나오면 출연료 이외의 연습 비용을 따로 받게 된다.
그래서 연습 일정이 없는 날에는 연습실에 오지 않고 개인 연습으로 해결을 하는 것이었다.
연습이 잡혀 있지 않은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건 매우 드문 경우였다.
“괜찮아. 돈 받자고 하는 거 아니야.”
돈 때문이었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 연욱이와 연습을 하려는 것이 류재한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류재한도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다는 걸 알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하하. 미안하다, 연욱아. 형이 네 연습하는 거 보고 갑자기 흥분해서 달려들었네. 다음에 하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가려는 류재한을 연욱이 붙잡았다.
연욱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려 뮤지컬 톱 배우의 개인 교습이 아닌가?
“아니요! 우리 같이 해요.”
“응? 아니야. 내 욕심이 지나쳤다.”
그렇게 한번 더 튕기고 돌아가려는 류재한의 뒤통수에 대고 연욱이가 머뭇거리다 소리쳤다.
“재, 재한이 형!”
“······!?”
“같이 해요, 연습!”
류재한의 입 꼬리가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 * *
“안녕, 연욱아~! 형 많이 보고 싶었지?”
“그······ 예. 많이 보고 싶었어요.”
“하하하! 내 그럴 줄 알고 오늘 있는 스케쥴 다 취소하고 달려왔지!”
류재한 배우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부비부비 만지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어느새 내 개인 교습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이 아저씨는 주말에 연습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뜻은 소속사에게 별도로 페이를 받지 못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내가 연습을 하는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나와서 나와 같이 연습을 해 주고 있었다. 나로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긴 했다.
아역배우는 뮤지컬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 한다.
‘괴물’ 뮤지컬에서는 아역 비중이 조금 있기는 한데, 주연처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역할은 아니었다. 그래도 공연 중간에 아역배우와 어른 배우가 과거를 회상하며 같이 노래를 부르는 파트가 있기 때문에 둘의 호흡은 꽤 중요했다.
“참 잘한다, 우리 연욱이. 저번보다 실력이 더 늘었어. 이게 다 우리 연욱이가 잘난 것도 있지만, 형이 옆에서 열심히 코치해 준 덕분 아니겠어?”
“하··· 하하. 맞아요. 삼··· 아니. 형.”
억지로 웃어 주긴 했다만, 류재한 배우 말대로 나도 내 실력이 쭉쭉 상승하는 게 체감이 될 정도였다.
과연 뮤지컬 톱배우인가.
그는 내가 노래를 부를 때나 연기를 할 때 놓치는 부분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그것을 교정시켜 주었다. 덕분에 연기와 노래에 대한 열정이 나도 모르게 샘솟고 재미가 붙었다.
“선배님! 준비 다 마쳤습니다.”
“아, 그래? 바로 갈게.”
류재한 배우가 주말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다른 배우들도 노페이로 주말에 출근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대선배가 주말에 출근을 한다는 것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저들도 어떻게든 한번이라도 류재한 배우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연욱이 넌 좋겠다.”
“네?”
한지환 배우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선배님은 진짜 마음에 드는 후배 아니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가르쳐 주시지 않거든. 나도 엄청 깨지면서 배워도 좋으니, 너처럼 선배님한테 개인 코치 받고 싶다······.”
푸념을 하고 있던 한지환 배우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내가 어린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원.”
“지환아! 일로 와. 조금이라도 연습해야지.”
“넵! 선배님!”
나는 한지환 배우가 뛰어가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류재한 배우의 가르침이 누군가에는 간절한 소원이기도 하구나.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자. 혜나야. 여기서 이건 이렇게 부르는 거야.”
나는 혜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쪽도 연습이 한창이다.
코치 선생님과 같이 연습을 하고 있던 혜나도 저번보다 훨씬 실력이 많이 늘었다.
체계적으로 교정을 받다 보니 가뜩이나 잘하는 혜나가 더 잘하게 된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내가 혜나의 가족이라서 높이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혜나는 적극적으로 연습에 임하고 종종 선생님과 배우들에게 애교도 부려서 단연 소속사 인기 1위였다.
다른 뮤지컬 배우들도 혜나를 보기 위해 기웃기웃 거릴 정도이니, 입소문이 많이 퍼지긴 한 모양이다.
“열심히 해, 연욱아~”
대본을 외우며 다시 씬을 반복하던 혜나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혜나를 응원했다.
그렇게 훈훈한 시간이 차차 빠르게 흘러갔다.
* * *
“음~. 그래. 이 맛이야.”
나는 포트로 보글보글 끓인 물을 컵에 따라 한 모금 후룩 들이켰다.
당연히 그냥 뜨거운 물을 먹을 리 없다.
이 안에는 직장인들의 마약이라 불리는 커피 믹스가 들어 있었다.
역시, 이 맛이다.
어찌나 이게 먹고 싶던지.
“훅훅-.”
입천장 까지지 않게 나는 혹혹 불어가며 조금씩 카페인으로 입을 축였다.
8살 아이가 커피 먹는 걸 부모님이 허락할 리 없기에, 나는 두 분이 잠드신 틈을 타 몰래 한 잔 진하게 타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커피 믹스 두 개를 타서 먹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네.”
뮤지컬 ‘괴물’ 첫 공연까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열심히 뮤지컬 연습만 한 거 같다.
그동안 음악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뮤지컬 쪽으로 말이다.
류재한 배우가 내게 큰 관심을 보여 준 덕분에 실력도 향상하고, 톱배우가 전수해 준 노하우를 여럿 익혔다.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뮤지컬 톱 감독과 톱 배우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몸을 하게 된 이후부터 참 여러 가지로 일이 잘 풀린다는 기분이 든다.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다.
어쩌면 이 몸은 운구기일의 사주를 타고 난 것이 아닐까.
“벌써 다 마셨네.”
약 3개월 동안 연습했던 과정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커피를 다 마셨다.
나는 얼른 설거지를 하고 컵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뒤 침실로 이동했다.
침대 위로 올라가기 전 불침번 서듯 혜나가 잠을 잘 자고 있나 체크도 해 보았다.
“가지 마······.”
“응?”
잠꼬대인가.
악몽을 꾸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뮤지컬 대사 한 부분을 외우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혜나는 뮤지컬 연습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가, 가지 마······.”
“응. 걱정 마.”
나는 혜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나 놔두고 절대 아무 데도 안 가. 절대로 혼자 있게 두지 않을 거야.”
“응······.”
잠결에 대답을 한 혜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은 듯보였다.
좋은 꿈 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꿈만 꿔.
난 주문처럼 속삭인 뒤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커피의 영향인지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얼른 첫공 보고 싶다.”
혜나와 같은 뮤지컬 무대에 서다니.
예전에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무대를 혜나와 같이 서게 될지 나도 알 수 없다.
이런 내 마음이 큰 욕심일 수도 있다만, 가능하면 많이, 더 많이 그녀와 같은 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것이 뮤지컬이든, 아니면 다른 무대이든.
오늘도 조심스레 혜나와 같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그림을 속으로 몰래 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