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4화 >
“자. 여기가 우리 배우님들 연습하는 곳이야. 어때? 연습실이 엄청 크지?”
문샛별 감독은 나를 안은 채로 연습실 안에 들어갔다.
유리창에서 보는 것과 직접 안으로 들어와 보는 건 역시 차이가 났다.
공기부터가 확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
묵직한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고, 배우들이 흘리는 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렇다고 그리 심한 건 아니었다. 계속해서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던 모양인지, 공기 정화가 제법 잘 되어 있었다.
EMS.
뮤지컬계의 만수르답다.
10년 후에도 이들은 이 자리를 굳건히 지켜낸다.
뮤지컬 배우라면 EMS에 소속되기를 희망한다던데, 연습실만 봐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혜나야. 저 배우님 보여?”
“네!”
“엄청 예쁘시지?”
“웅! 공주 같으세요.”
“저 배우님이 맡은 역할이 줄리아야. 혜나는 어린 줄리아지? 나중에 혜나가 커서 저렇게 예뻐지는 거란다. 저기, 희진 씨!”
문 감독은 줄리아 역할을 맡은 배우를 부르며 손짓했다.
“네~ 감독님.”
“여기 인사해. 이번에 뽑은 아역 배우야. 이름은 장혜나.”
“어머. 너무 예쁘다. 반가워, 혜나야.”
“안녕하세요.”
문 감독은 잠시 배우와 대화를 나눈 뒤 둘을 놔두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연욱아. 우리는 다른 사람 만나러 가자.”
연습을 끝내고 잠깐 물을 마시고 있던 배우를 문 감독이 불렀다.
내가 여기에 들어설 때부터 눈에 확 띄었던 그 배우였다.
“류 배우님~.”
류 배우님이라 함은 류재한을 부르는 것이다.
오. 드디어 실물을 영접하게 되는군.
'괴물' 뮤지컬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 제일 기대되었던 것이 바로 류재한 배우를 만나는 것이었다.
류재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뮤지컬계에서는 단연 원탑으로 손꼽히게 된다.
류재한 배우가 뮤지컬 덕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이유는 바로 목소리에 있다.
서울대학교 성악 전공을 한 류재한 배우는 음악 대학에 다닐 때부터 교수들이 제발 성악가를 해서 외국으로 진출해 보자고 애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악보다는 뮤지컬에 푹 빠져 있었던 터라 그의 목소리를 알아 본 EMS가 류재한을 캐스팅했고, 몇 년 만에 뮤지컬 톱스타로 우뚝 서게 된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아냐고?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류재한 배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서울대 성악과를 나온 유일한 뮤지컬 배우이기도 해서 더 그렇다.
나도 류재한 배우가 캐스팅 된 뮤지컬을 많이 찾아보기도 했고.
그의 스토리는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해 봐도 나올 정도였다.
물론, 뮤지컬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류재한 배우를 잘 모를 것이다.
하여튼, 그와 내가 같은 무대에 서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 문 감독님. 땀냄새 난다고 연습실에는 들어오지도 않으신 분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실까?”
류재한 배우는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감독님. 얘는 누구에요?”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자기보다 훠어어얼씬 잘생긴 아역 배우 뽑았다고. 이름은 장연욱.”
류재한은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이야. 어디서 이렇게 잘생긴 애를 데리고 온 거예요? 이거 나처럼 못 생긴 사람 슬퍼서 쓰겠나?”
“호호. 자기 이제 큰일 났다. 관객들이 아역이랑 어른 배우랑 비주얼이 너무 차이나는 거 아니냐고 항의하면 어떡해?”
“흐흐. 괜찮아요. 제가 언제 얼굴로 먹고 살았습니까. 다 이 목소리로 먹고 살았지.”
“그래. 아주 잘나셨어요.”
평상시 목소리에도 꿀이 뚝뚝 떨어진다.
류재한 배우 목소리는 언제 들어봐도 참 마성 같았다.
“반가워, 연욱아. 형은 류재한이라고 해.”
그런데 아저씨. 형은 좀 아닌 거 같은데요?
문 감독도 류재한 배우의 등짝을 살짝 때렸다.
“형이 뭐야, 형이? 삼촌이라 불러도 모자를 판에. 완전 아빠뻘이잖아.”
“뮤지컬 세상에 삼촌, 이모가 어디 있습니까. 형님 누님 아니면 아우님이지.”
“아무리 그래도 형은 진짜 아니다. 자기 좋아하는 팬들도 이건 아니라고 할 걸?”
“그, 그런가? 에잇. 몰라. 그냥 형이라고 불러, 연욱아! 알겠지? 난 연욱이 큰형이다 이제?”
“그냥 삼촌이라 불러, 연욱아. 아니면 아빠라고 불러도 사람들이 오해 안 하겠다. 그치?”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다.
난 그냥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를 보였다.
“어휴. 진짜 너무 귀엽다. 나 잠깐 연욱이 좀 안아 봐도 돼요?”
“자기 땀부터 닦아.”
“아. 이런. 지금 땀범벅이라 안지는 못 하겠다. 대신 사진이라도 한 방만 찍어 줘요.”
옷에 묻는 땀 때문에 차마 나를 안지는 못 하고 옆에 살짝 껴서 사진을 찍는 류재한 배우였다. 더 가까이에서 찍고 싶은데 그러지 못 하는 게 아쉽다며 침울해져 있었다.
이 아저씨,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네.
무대 위에서는 진짜 포스가 철철 넘쳐서 다가가기도 힘들 것 같았는데.
“연욱아. 형이 무대 연습하는 거 보고 싶지? 한번 보여 줄게.”
아예 호칭을 형으로 굳힌 것 같다.
괜히 아저씨나 삼촌이라고 불렀다가는 괜히 서로 기분만 상할 거 같으니, 그냥 눈 딱 감고 형아라고 불러 주자.
내가 언제 류 배우한테 형이라는 소리를 다 해 보겠냐.
“지환아! 잠깐 일로 와 봐.”
“넵, 선배님!!”
처음 봤을 땐 누군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뮤지컬 배우 한지환.
앙상블로만 뛰다가 ‘괴물’ 뮤지컬에서 첫 주연급 배역을 맡게 된다.
‘괴물’ 뮤지컬에는 남주인공이 2명이 있다.
한 명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절친이자 훗날 빅터의 실험에 희생되어 괴물이 되어 버리는 앙리 뒤프레다.
한지환이 바로 앙리 뒤프레 역할을 맡은 배우라는 것.
락밴드를 하고 있을 것만 같은 시원한 외모와 락커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그를 이 공연으로 이끌었다. 실제로 그는 대학생 시절 락밴드를 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르셨습니까, 선배님!”
군기가 아주 꽉 잡혀 있다.
류재한 배우는 뮤지컬계에서 모든 배우들의 로망이니, 구태여 군기를 잡지 않아도 알아서 잡혀 있을 것이다.
“얘가 또 딱딱하게 그러네. 내가 그러지 말라니깐.”
“아닙니다, 선배님!”
류재한 배우는 어느새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연욱아. 여기 있는 삼촌은 앙리 뒤프레라는 역할을 맡았어. 인사하렴.”
자기는 형이지만 남은 삼촌이다, 이건가.
“안녕하세요.”
“어이쿠. 인사도 잘해, 우리 연욱이.”
한지환은 나와 류재한 배우를 번갈아 쳐다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선배님.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구······.”
“내 아역 배우. 나랑 똑 닮아서 엄청 잘생기지 않았냐?”
“···그, 그러네요.”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인 듯하다.
한지환 배우는 허리를 낮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우리가 같이 연습할 씬은 없어서 아쉽긴 하다만, 앞으로 잘해 보자? 지환이 삼촌이라고 불러.”
그러자 류재한 배우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환이는 나이가 좀 있으니까 삼촌이라 부르렴.”
“······.”
“지환아. 우리 한 라운드 더 뛰자. 연욱이한테 연습하는 거 한번 보여줘야지.”
“아, 넵!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류재한 배우는 날 다시 문 감독에게 데려다 주며 말했다.
“연욱아. 여기서 형이 하는 거 잘 봐봐?”
그러고는 배역에 몰입하고 있던 한지환에게 달려갔다.
“지환아. 이번에 기똥찬 연기 한번 보여 줘라.”
“넵, 알겠습니다!”
누가 보면 류재한 배우가 매일 한지환을 갈구는 줄 알겠다. 하지만 류 배우의 덕담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가.
뮤지컬 배우들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 1위로 뽑히고, 자상하게 후배들을 가르쳐주며 잘 챙겨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앙상블에서 재능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 감독들에게 추천을 해 준다고 들었다.
한지환 배우도 바로 그런 케이스이지 않던가.
일전에 한지환 배우가 남긴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류재한 배우가 자신을 ‘괴물’ 앙리 뒤프레로 감독들에게 추천해 줘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말이다.
“연욱아. 저 아저씨들이 뭔가 가벼워 보여도 연기랑 노래는 진짜 잘 불러. 한번 잘 봐.”
나도 문 감독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방금 전까지는 그냥 동네 형 같은 분위기였는데, 연습에 돌입하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앙리 뒤프레. 생명을 창조하는 것만이 인류의 종말을 막는 방법이다.”
“대위님. 생명을 창조하는 건 오직 신께서 하실 일입니다. 과학은 자연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아니. 과학은 자연을 초월해. 그리고 너와 내가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이 세상을 바꾸게 될 거야!”
저들의 뛰어난 열연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항상 싼 가격의 좌석만 찾느라 가까이에서 뮤지컬 배우들의 연기를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의견을 주장하다 자연스레 노래로 흘러갔다.
뮤지컬 ‘괴물’의 최고의 하이라이트이자 넘버라고 할 수 있는 ‘생명 창조’라는 노래였다.
“생명. 그것은 오직 우연의 결과일 뿐. 이 세계에 아주 작은 사건일 뿐. 생명은 그저 화학적 돌연변이일 뿐! 그것이 생명 창조의 정체!”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앙상블이 합창을 더 하는 곡이다.
생명은 창조될 수 있다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주장과 그것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라며 반대하는 앙리 뒤프레.
노래가 전체적으로 심장을 쿵쿵 대게 만드는 강한 리듬감이 있고, 장엄함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곡을 부르는 배우의 목소리가 매우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굵직한 바리톤 음색을 가진 류재한 배우는 이 넘버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지환의 목소리는 노래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준다.
처음에는 갈라지는 듯한 락커의 목소리로 프랑켄슈타인의 주장을 반대했지만, 노래가 끝으로 다다르면서 음색이 차차 부드럽게 변하더니 마지막에는 그 설득에 넘어가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손을 맞잡게 된다.
그것으로 노래는 끝이 나고 밑에서 불꽃 효과가 펑펑 터지는데, 아쉽게 여긴 연습장이라 그런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짝짝짝-.
나는 넘버를 마친 두 배우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뮤지컬은 이렇듯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다.
저번 생에서 2층 자리에 앉아 뮤지컬 무대로만 보던 넘버를 이렇게 연습실에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연기가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글서글한 얼굴로 돌아온 류재한 배우였다.
“어때? 잘했어? 열심히 박수치는 걸 보니,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다.”
“네. 엄청 좋았어요.”
“이야. 내가 평소에 잘한다는 얘기를 귀가 닳을 정도로 듣고 살았는데, 이상하게 연욱이한테 잘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더 좋네.”
그런 류재한을 보고 문 감독이 핀잔을 주었다.
“평소 아역들한테 제대로 관심도 안 주던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래?”
“그러니깐. 내가 애 잘 못 키울 것 같아서 결혼하고도 애를 안 낳고 있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아들 하나 있으면 너무 행복할 거 같다는 생각하는 거 있지?”
“웃겨. 저번에는 애 키우기 힘들 것 같다고 싫더다니.”
“하하. 그러게 말이야.”
“이제 가자, 연욱아. 아저씨들한테 인사해.”
“안녕히 계세요.”
내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류재한 배우는 헉! 소리를 내며 아쉬워했다.
“벌써 가? 이제 연습 막 시작했잖아.”
“오늘 연욱이는 계약만 하러 온 거야. 애를 어른 배우들처럼 막 연습시키면 노동청에 신고 당해.”
“아아. 진짜? 아쉽다. 오늘 연욱이가 연기하는 거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네네~ 다음주까지 기다리세요.”
문 감독이 류재한 배우를 약 올리며 나가는 동안 류재한 배우는 내게 계속 손을 흔들어 주었다. 뭔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해서 나도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는 더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연욱아~!”
다른 배우들과 신나게 놀고 있던 혜나가 날 발견하고는 빠르게 뛰어왔다.
뒤이어 여러 배우들이 우리 남매 사이에 모여 들었다.
“우와. 감독님. 이 아이가 그 얘에요?”
“응? 그 얘라니?”
“소문이 자자했잖아요. 감독님이 꽃미남 아역 캐스팅했다고. 그래서 진짜 궁금했는데, 치타처럼 뛰실 만도 했다.”
“내가 그때 안 뛰었으면 아마 평생 욕먹고 있었을 거다.”
“어쩜 남매가 둘 다 이렇게 예뻐?”
“나도 사진 한번만 찍자.”
우리 두 사람은 앙상블과 배우들 사이에 끼어 열심히 셀카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자자. 이제 그만. 연욱이랑 혜나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그리고 다들 SNS에 사진 함부로 올리면 안 돼. 알지?”
“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지 연습실을 나서면서 혜나에게 물었다.
“혜나야. 혹시 부모님 SNS하시니?”
“웅? 모르겠어요.”
“음. 그렇구나.”
그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오케스트라 연습실로 돌아갔다.
뭔가 부모님과 상의할 게 있는지 문 감독은 나와 혜나를 잠시 의자에 앉혀 두었다.
“어머님. 아버님. 혹시 SNS 하시나요?”
“네? 아니요.”
바쁘게 사시는 부모님이라 당연히 SNS는 하지 않으신다.
“저희 앙상블이랑 배우들이 연욱이랑 혜나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아직 SNS에 업로드 하지 말라고 막아두긴 했는데, 올려도 괜찮을까요? 뮤지컬 홍보도 할겸요.”
어머니 아버지는 잠깐 눈교환을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그럼, 혹시 SNS 시작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SNS를요?”
“네. 연욱이랑 혜나의 일상 사진을 가끔씩 공유해 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아! 물론, 제가 좋다는 게 아니라 공연을 보게 될 팬들이요. 호호.”
왠지 문 감독의 제안에 사심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