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3화 >
“야아!! 패스! 패스해!!”
“패스! 패스!!”
“나한테 패스해!!”
이것을 두고 혼돈의 카오스라고 하는 건가.
모든 애들의 입에서 패스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너도 나도, 심지어 골키퍼를 하고 있는 애도 패스를 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와아아-!!”
“다 비켜라!!”
“불꽃 슈우우웃!!”
난 뒤에서 애들이 축구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게 축구인지, 아니면 공 따라가는 운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공을 차면 그쪽으로 모든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가고 있었다.
괜히 끼어 들었다가는 애들 발에 밟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수비수를 자처하며 뒤에 있었는데······.
툭-
“응?”
갑자기 공이 데굴데굴 내 발 앞으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날 바라보는 애들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저기다!!”
“똥쟁이 장연욱한테 갔다!!”
우다다다 뛰어오는 모습이 흡사 아프리카 물소 떼를 보는 듯하다.
여기서 뛰지 않으면 저놈들이 날 짓밟고 갈 게 뻔했다.
나는 도망치듯 공을 가지고 뛰었다.
“연욱아-! 파이팅!!”
“힘내-!”
남자 애들이 축구를 하면 여자 애들은 피구를 하는 게 체육 시간 국룰이다.
그중 몇몇 여자 아이들이 내가 공을 가지고 뛰는 것을 보고는 응원을 해 주었다.
그런데 내 귀에 잘 들리진 않았다.
내게 달려드는 이 무자비한 놈들의 목소리에 귀가 다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잡아-!!”
“슈퍼 태클!!”
생사를 넘나들며 운동장 절반만큼을 뛰어갔을 때 나는 공을 멀리 뻥 차 버렸다.
“저기 가서 놀아, 이것들아!”
“우오오오-!”
애들은 그게 또 좋다고 공이 날아간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순식간에 체력이 방전된 나는 대자로 운동장 위에 뻗어 누웠다.
원래 5~8살 때가 가장 체력이 좋지 않나? 고작 이거 뛰었다고 방전이 되다니.
“운동 좀 해야겠다.”
저번 생에서 체력 하나는 끝내줬는데, 이 몸은 벌써부터 운동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내일이면 뮤지컬 합격 발표인데, 만약 합격이 되면 맹연습에 돌입해야 한다.
이 저질 체력으로 연습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 * *
화창한 토요일.
“으으-.”
효진은 어제부터 제대로 잠도 못 자고 거실을 서성였다.
계속 안절부절 못 하는 게 눈에 거슬렸으나, 오죽하면 저러겠는가 싶어 재현은 못 본 척했다. 그리고 사실 재현도 조금 긴장이 되긴 했다.
“여보. 왜 아무런 연락도 없지?”
“조금만 기다려 봐.”
“떨어진 사람한테는 연락을 안 주는 건가? 오늘이 발표일 맞을 텐데.”
“어허. 조금만 기다려 보라니깐? 분명 좋은 소식이 올 거야.”
오늘이 바로 대망의 오디션 합격 발표일이다.
주말에 합격 발표를 하는 게 조금 의아하긴 하다만,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뮤지컬 세계는 주말이란 개념이 없다고 말이다.
주말에 사람들이 뮤지컬을 보기 위해 가장 많이 모여 들기 때문에, 그들은 주말이 제일 바쁜 시간일 것이다.
합격 발표는 따로 인터넷에 공지가 올라오는 것은 아니고, 합격이 된 사람에게 기획사가 전화를 넣어 준다고 했다. 물론, 불합격자에게는 따로 연락이 가는 것이 아니라서 기다리는 사람만 애가 타는 환장할 날이었다.
“엄마. 배고파~.”
“아, 응. 애들아. 많이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혜나와 연욱이는 오늘이 발표 날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 태평해 보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가족 밥은 챙겨줘야 했기에 효진은 된장찌개를 끓였고, 재현은 옆에서 두부조림을 하고 있었다.
“우리 혜나랑 연욱이가 좋아하는 두부조림, 아빠가 금방 해 줄게~”
“웅-!”
재현은 프라이팬에 두부를 구우면서 안색이 좋지 않은 효진을 다독였다.
“효진아. 다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으응······. 그렇겠지?”
“그래. 혹시 안 되더라도 상관없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래도 혜나가 너무 실망할까봐.”
“혜나는 오디션 본 것도 까먹은 것처럼 보이는 걸? 아닌가. 그냥 멘탈이 좋아서 아무렇지 않은 건가?”
“그럼 다행이고. 괜히 나만 마음 졸이는 것 같아.”
“그게 엄마 마음이지. 난 다 이해해.”
재현이 볼에 쪽 입맞춤을 해 주자 효진은 기분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식탁에 밥을 다 차린 뒤 수저를 들었다.
“뜨거우니까 다들 호호 불어서 먹어.”
“네~”
“넵-!”
식사 시간만 되면 갑자기 힘이 샘솟아 보이는 연욱이었다.
각 잡힌 대답과 함께 밥을 한 움큼 넣어 빵빵해진 연욱이의 두 볼을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절로 미소가 나오는 재현과 효진이었다.
“아참-! 연욱아. 원장 선생님한테 연락 왔었어.”
“네?”
“원장 선생님이 우리 연욱이가 글쎄 피아노 천재라는 거야. 그래서 제대로 음악 시켜볼 생각 없냐고 그러시더라.
듣고 있던 재현이 어깨를 들썩였다.
“진짜? 연희가 그랬어?”
“응. 연욱이가 피아노를 엄청 빨리 배운대. 재능이 있는 거 같다고.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아주 열을 내더라고.”
재현은 빵빵한 연욱이의 볼을 어루만졌다.
“오-. 우리 연욱이. 벌써부터 천재 소리 듣는 거야? 이 아빠는 연욱이가 음악 잘할 줄 알았다니깐? 이게 다 아빠를 닮아서 그래.”
“무슨 소리야. 날 닮은 거지!”
“크흠-. 그건 잘 모르겠네?”
재현과 효진은 귀엽게 투닥이다 왠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연욱이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연욱아? 진지하게 음악하고 싶은 생각이 있니?”
“그래. 우리 연욱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아직 8살이잖아. 이런 걸 진지하게 고민할 나이는 아니지.”
연욱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천천히 결정해. 급한 것도 아니니깐.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
“네. 그럴 게요.”
아빠 엄마의 미소에 연욱이도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아이들에게 강요를 하기 보다는, 항상 선택의 기회를 주는 부모님이 너무나도 좋았다.
부르르-
“어?”
그때 식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화면에 뜨는 건 모르는 핸드폰 번호였다.
효진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아 보았다.
“여보세요?”
그러자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EMS 기획사에 권주영 실장이라고 합니다! 오디션 결과 알려 드리려고 전화 드렸어요!”
“아, 넵! 안녕하세요! 겨,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혜나와 연욱이 둘 다 모두 합격입니다. 축하드려요!”
“어머! 정말요? 너무 감사드려요!”
“하하. 예. 저희도 귀엽고 예쁜 아이들 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 내일 시간 언제쯤 되실까요? 애들과 계약을 맺으려면 어머님이 동행을 해 주셔야 해서요.”
“언제든 상관없어요!”
“그러시군요. 그럼, 내일 오후 2시에 뵐 수 있을까요? 저희 회사로 오시면 됩니다.”
“네네. 물론이죠.”
“넵!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님!”
“네.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효진은 환호성을 크게 질렀다.
“여보! 우리 애들이 합격했대!”
재현도 눈을 크게 뜨며 함께 기뻐해 주었다.
“봐봐. 내가 잘 될 거라고 했지? 이야~ 우리 딸이랑 막내가 뮤지컬 무대에 선다고?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러니깐! 혜나만 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둘 다 됐냐. 거기다 연욱이는 오디션 연습도 안 했었잖아.”
“후후. 내가 말했지. 이게 다 잘난 아빠를 닮아서······.”
“응. 그냥 우리 연욱이가 잘난 거야.”
효진은 두 아이를 꼭 껴안으며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우리 토끼들 너무너무 예뻐! 축하해~.”
“엄마. 나 합격한 거야?”
“응! 우리 혜나랑 연욱이 둘 다 오디션 합격했대!”
“그럼 나랑 연욱이랑 같이 뮤지컬 하는 거지?”
“맞아! 둘이 같이 무대에 오르는 거야.”
혜나는 히히 웃으며 앉은 채로 춤을 췄다.
그에 반해 덤덤하게 밥을 먹고 있던 연욱이도 눈웃음을 짓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효진의 웃음은 곧장 한숨으로 바뀌었다.
“근데 계약을 해도 문제네. 애들이 연습 장소로 왔다 갔다 하는 걸 누가 케어해 주지?”
문제는 아이들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뮤지컬 연습에 돌입하면 누군가가 애들을 데리고 연습 장소까지 가 줘야 한다. 그리고 연습이 끝난 뒤에는 시간에 맞춰 데리고 돌아와야 하지 않은가.
재현과 효진은 맞벌이 부부이기 때문에 매일 연습 장소로 같이 가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기획사랑 한번 얘기를 잘해 봐. 정 안 되면 네가 직장을 그만 둬야 하지 않을까?”
“에이. 무슨 소리야. 옛날에 약속한 거 잊었어? 애들 대학까지 보내려면 지금부터 우리 둘이 뼈 빠지게 일해서 돈 모아야지.”
“그래도 모아 둔 돈이 꽤 있잖아. 지금은 애들 케어해 주는 게 중요하니깐.”
당장 결정을 내리기에는 어려운 사안이었다.
“음······. 자세한 얘기는 내일 다녀와서 나누자. 지금 결정하기에는 이른 거 같아.”
“그래. 그러자.”
복잡한 문제는 잠시 잊고,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두 아이가 무대 위에서 밝게 빛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 * *
EMS 엔터.
뮤지컬 쪽에서는 EMS를 따라갈 소속사가 없다.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은 배우진과 뮤지컬 판권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EMS의 악명이 높은 이유는 바로 DVD와 음반을 잘 내주지 않기 때문인데, 뮤지컬 특성상 외부로 스토리나 음악이 유출되는 것을 꺼려하는 까닭이다.
덕분에 EMS는 매번 뮤지컬 덕후들에게 적폐 세력이라 까임을 당한다.
‘생각보다 훨씬 크네.’
종로에 빌딩을 보유하고 있는 EMS의 본사로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나라가 외국에 비해 뮤지컬 시장이 좁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돈을 못 버는 건 아니다.
잘 나가는 배우는 뮤지컬 한 회차당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받는다. 그러나 앙상블, 혹은 인기 없는 조연들은 10만원조차 받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아 임금 차별 얘기가 항상 구설수에 오른다.
“어서 오세요, 어머님, 아버님! 혜나랑 연욱이도 안녕? 어휴. 애들이 너무 귀엽네요.”
“애들아.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 어머니에게 전화했던 권주영 실장이 우리를 반겼다.
그가 우리를 사무실로 안내해 줄 동안 나는 주변을 스윽 살펴보았다.
여느 회사 사무실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직원들은 칸칸이 나뉘어져 책상 컴퓨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 가지 특징인 게 있다면 벽마다 배우들 브로마이드와 뮤지컬 포스터가 붙여 있다는 거 정도?
주말인데도 직원들이 출근을 한 것을 보면 역시 뮤지컬 판에는 주말이란 개념이 없다는 게 맞는 말 같다.
“계약서는 천천히 읽어 보시면 됩니다. 제가 간단히 설명도 해 드릴게요.”
부모님은 계약서를 살펴보면서 권주영 실장이 하는 얘기에 집중했다.
“낯선 환경에서 연습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희가 스케쥴을 타이트하게 잡지 않습니다. 거기다 부모님이 아이들을 픽업해야 하는 문제도 있어서 웬만하면 평일에는 연습을 시키지 않아요. 혜나와 연욱이는 주말에만 연습을 할 겁니다.”
오. EMS.
이런 쪽으로 꽤 섬세하구나.
다시 봤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가 맞벌이 부부라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예. 저희도 그런 경우가 많아서 아이들 스케쥴은 주말에만 잡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평일에 연습이 필요하면 저희 회사에서 차량을 제공하니,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모님이 한 시름 놓은 표정을 보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한쪽 마음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다.
나와 혜나의 미래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왠지 가슴이 미어진다.
가뜩이나 대배우가 아니면 돈이 짜다고 유명한 뮤지컬판에서 애들이 출연료를 받아봐야 얼마나 받겠는가.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다른 뮤지컬에도 뛰어 들어야 하나.’
최대한 부모님의 짐을 덜어 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권 실장에게 설명을 다 들은 부모님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애들이 다치기 않게 잘 부탁드려요.”
“하하. 물론입니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저희 뮤지컬과 함께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가시기 전에 연습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번 구경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 정말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애들아. 너희도 연습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웅-! 보고 싶어!”
“호호. 그래. 실장님 따라서 한번 구경해 보자.”
권 실장은 우리를 데리고 연습실이 있는 지하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후끈한 기운이 벌써부터 느껴졌다.
“우와······.”
지하 전체가 연습실로 꾸며져 있었는데, 수많은 배우들이 그 안에서 각자 맡은 배역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저들의 열정 넘치는 몸짓과 노래에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빠져 들게 만든다.
이런 광경은 부모님도 처음 보는 것인지, 입을 떡 벌린 채 권 실장의 뒤를 따라갔다.
혜나도 그렇고 나 역시 눈알을 바쁘게 굴리며 거대한 연습실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특히 앙상블의 합창과 주연 배우들의 노래 소리는 귀 호강을 제대로 시켜 주었다.
“감독님~ 혜나랑 연욱이 왔습니다!”
권 실장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른 방에서 오케스트라와 연주를 맞추고 있던 문샛별 감독이 있었다.
문 감독은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어머! 연욱이랑 혜나 왔니?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네, 감독님. 안녕하세요.”
문 감독은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밝게 미소를 지었다.
“연욱이랑 혜나 잘 있었어? 연욱이는 어쩜 더 잘생겨진 거 같다? 호호.”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갑자기 날 번쩍 들어 안았다.
“다들 일로와 봐. 저번에 내가 말했던 애들이야.”
“오. 러닝머신도 싫어하는 지휘자님이 치타처럼 뛰어서 캐스팅 했다는 그 아이에요?”
“와아-. 얼굴 좀 봐. 너무 잘생겼다. 8살 밖에 안 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진짜 남매가 왜 이렇게 예뻐요? 조각이네, 조각.”
문 감독은 날 안은 채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얘기를 나누더니, 갑자기 다른 연습실로 이동하려 했다.
“혜나랑 연욱이, 아직 다른 배우들 만난 적 없지? 감독님이 오늘 다 소개시켜 줄게. 어머님, 아버님. 잠깐 애들 데리고 다른 연습실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아, 네. 물론이죠.”
“자~ 가자. 애들아.”
갑작스레 문 감독과 함께 하는 연습실 투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