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12화 (12/200)

<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12화 >

잔잔하게 들리면서도 낮은 음색이 무거운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ACT 23, 이별이란 노래 제목이 딱 어울렸다.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오디션곡을 치는 연욱을 보며 선생님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효진이 말대로 정말 곡을 칠 줄 알잖아? 하지만 어떻게?’

아이는 악보도 없이 곡을 치는 중이었다.

거기다 놀라운 건 이따금씩 변주를 섞어 노래의 풍미를 한 층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려운 곡이 아니라고 하지만, 미스 터치가 하나도 없네?’

킬링 포인트는 저 짧은 다리로 끙끙 대며 페달을 밟는 모습이 너무나도 깜찍하고 귀엽다는 것이었다. 연희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연욱이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옆에 있던 혜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항상 널 기다릴 거야~”

그러자 연욱이도 미소를 지으며 감미로운 목소리를 냈다.

“네가 날 기다려 준다면~ 난 반드시 돌아올 거야.”

어느새 이곳은 작은 뮤지컬 무대가 되었다.

선생님들은 눈을 감고 두 아이가 만들어 내는 곡조에 빠져 들었다.

점차 치닫는 클라이맥스.

연욱이는 절정에 달했을 때 음을 강하게 치며 곡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반~드시!”

청명하게 올라가는 고음.

연희는 거기서 한번 놀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미스 터치가 한번도 없다는 점에서 한번 더 놀랐다.

그렇게 ‘이별’이란 노래가 끝이 났다.

“와아-!”

“너무 잘한다!”

“이 정도면 심사위원들 완전 뻑 갔겠는데?”

연욱이의 팬덤마냥 열렬하게 박수를 쳐 주고 있는 선생님들이었다.

방금 전 그건 8살짜리 아이의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다 피아노를 한 달도 배우지 않은 애가 저런 연주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저 작은 손으로 빠르게 건반을 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욱아. 혹시 그 곡은 어디서 배웠니?”

“아··· 원장 선생님이 쳐 주시는 거 보고 배웠어요.”

“응? 원장 선생님은 딱 3번만 쳐줬잖아. 그걸 보고 배웠다고?”

“네. 거기서 배우고 나머지 모르는 건 악보 보면서 인터넷으로 배워가며 쳤어요.”

딱 적당한 핑계였다. 그러나 연희는 인터넷에서 이렇게나 빨리 곡을 습득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별’이란 곡은 결코 느린 곡이 아니다. 즉, 아이의 작은 손으로, 그것도 독학으로 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신동이라 불리는 애들 중에는 4살 때 쇼팽곡을 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연욱이는 이제 막 피아노에 입문한 아이이지 않던가.

오랜 연습을 하지 않았다면 연주하는 내내 음이 불안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욱이는 미스 터치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결론은 하나였다.

이 아이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

물론, 그 재능이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미미한 수준인지는 확인을 해 봐야 알 것 같았다.

“연욱아. 잠깐만 기다려 봐.”

연희는 후다닥 원장실로 달려가 책장에 있는 악보들을 이것저것 챙겨 다시 돌아왔다.

왠지 그 모습을 보고 연욱이 싱긋 미소를 짓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오직 저 아이의 재능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 * *

“이거 한번 쳐 볼래? 혹시 배워봤니?”

100번도 더 쳐 봤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켰다.

“아니요.”

원장 선생님이 뭔가 바리바리 싸들고 오긴 했는데, 가장 먼저 꺼내든 건 체르니 100이었다. 피아노 배우는 애들 사이에서는 체르니 100을 이렇게 부른다.

노잼의 근본.

피아노에 처음 입문했을 때 배우는 건 하농과 바이엘이다.

바이엘을 다 떼고 나서 체르니 100으로 넘어가는 게 보통이다. 어떤 학원은 아예 체르니 100부터 시작하기도 하지만, 가르치는 상대가 유아일 경우 거의 바이엘부터 가르친다.

나름 원장 선생님은 내가 배워야 할 수준을 몇 단계 넘어선 악보를 가져온 것이었다.

체르니가 피아노 교육에는 아주 좋은 교재인 건 나도 인정한다.

문제는 체르니 자체가 워낙 재미가 없어서 피아노에 대한 아이들의 흥미를 잘 떨어뜨린다는 게 단점이었다.

“자. 이렇게 치면 돼. 칠 수 있겠니?”

원장 선생님은 체르니 100의 악보를 연주했다.

체르니 100은 오랜만이라 나도 악보를 보면서 천천히 연주해 보았다. 그러나 곧잘 치게 되었다. 아마도 저번 생에서 쳤던 기억과 습관이 있기 때문일 터.

“자, 잘 치네? 그럼 이건?”

원장 선생님은 체르니 100을 치우고 그 다음 단계인 체르니 30을 꺼냈다.

이번에도 원장 선생님이 먼저 치고 내가 따라 치는 방식이었다.

체르니 100과 마찬가지로 조금 버벅 거리다 이내 자연스럽게 칠 수 있었다.

“연욱이 정말 잘 치는구나?”

선생님. 제가 아무리 음악 재능이 없어도 음악 대학에 들어간 놈입니다.

몇몇 괴물 같은 음대생 놈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재능이라는 거지, 이 정도 기본은 할 줄 압니다.

“음··· 이건 괜찮을까 모르겠네.”

기대감이 가득한 눈동자로 원장 선생님은 체르니 악보를 치우고 소나타를 가지고 왔다.

바로 모차르트 소나타.

소나타 입문용으로 잘 알려진 악보다.

베토벤처럼 괴랄한 난이도를 가진 소나타가 아니다 보니, 종종 입문용으로 만들어져 가르치곤 한다. 물론,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한테는 무척 어려운 곡이 될 것이다.

“자. 이번에도 잘 봐봐.”

오늘 선생님들은 업무를 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벌써 1시간째 그랜드 피아노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입문용 모차르트 소나타이기 때문에 나는 원장 선생님이 치는 걸 지켜보다 악보를 보고 따라 쳐 보았다.

계속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치다 보니, 점점 흔들리는 구간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물 흐르듯 연주가 이어졌다.

“와-.”

“말도 안 돼······.”

“저 정도면 진짜 영재 아니야? 정말 이제 막 피아노 배운 애 맞아?”

“그러니까요. 나중에 TV 출연해도 되겠어요.”

원장 선생님이 쳤던 부분까지 연주를 마치자 구경을 하던 선생님들은 잔잔한 감탄을 터트렸다. 이러다 왠지 모차르트 소나타에 이어 베토벤 소나타까지 이어질 것 같아 나는 뒤편에 있는 시계를 슬쩍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한 선생님이 같이 시계를 돌려 보고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머! 언제 시간이 저렇게 됐어?”

“헉! 애들 레슨해 줘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넋 놓고 구경했네. 어떡해!”

그제야 선생님들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깨닫고는 후다닥 방을 나섰다.

원장 선생님도 잊은 업무가 있었는지 몸을 들썩였다.

“연욱아. 조금 더 피아노 치고 있을래? 원장 선생님은 잠깐 나갔다 올게.”

“네~.”

혜나도 선생님들을 따라 나간 터라 그랜드 피아노실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고요하다.

이 고요함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음-.”

나는 그랜드 피아노의 건반을 하나씩 눌러 보았다.

깊은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역시 비싼 값을 하는 피아노인 것 같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이 연주하는 걸 봤는데, 꽤 실력이 좋은 듯보였다.

물론 쳤던 곡이 쉬웠던 것도 있긴 하지만, 터치가 세세하고 원장 선생님만의 음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나도 나만의 음색이 있는 걸까.

나는 오래 전 쳤었던 곡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건반을 눌렀다.

“아. 재밌다.”

예전에는 피아노 치는 게 참 고역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은 건반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잠시 동안 느껴본 천재 놀이의 환희인지, 아니면 의무적으로 치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뭔가 느낌이 달라.”

이제껏 느껴보지 못 한 기분이다.

혜나의 오디션곡을 쳐 주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원장 선생님을 따라 여러 곡을 쳐 보니 점점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동안은 무언가에 꽉 가로 막혀 의식적으로 건반을 누르며 과장스럽게 감정을 넣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겨 자연스레 손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악보에 있는 음표를 칠수록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나와 동화되는 기분이랄까. 말로는 표현하기가 힘든 감정이었다.

“키도 크고, 손가락도 커지면 더 잘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문득 욕심이 났다.

음악적 갈증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여기서 더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강렬한 욕망이 차오르고 있었다.

거기다 저번부터 신경 쓰이던 것이 하나 있다.

“예전보다는 확실히 귀가 잘 들리는 거 같기도 하고?”

저번 생에서는 청음이 좋지 않아 부단히 연습을 했었다. 그런데 이 몸은 음악을 듣는 귀가 깨어있는 듯한 기분이 종종 들곤 한다. 뭔가 음정이 어색하거나, 틀린 부분이 있으면 음악 속에서 춤을 추던 내가 갑자기 삐끗 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예전에 음대를 다닐 때 청음 하나는 굉장했던 동기 녀석의 말이 떠오른다.

‘음악을 듣는다는 생각을 하지 마. 내가 그 속에 풍덩 빠진다는 생각을 해 봐.’

그 말을 듣고 내가 이렇게 대꾸했던 것까지 기억난다.

‘음악을 들어야지, 왜 풍덩 빠지고 지랄이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친구 녀석 말대로 음악 속에 풍덩 빠진다는 상상을 해 봤는데, 딱히 효과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그놈 말이 이해가 된다.

이게 음악에 풍덩 빠진다는 기분인가.

상대가 들려주는 음악을 듣는 순간, 음표들이 저절로 내 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청음 테스트를 한번 봐야 하나? 설마 절대음감 이런 건 아니겠지?”

절대음감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긴 하나, 잠깐이지만 행복한 상상이었다.

* * *

꿀벌 피아노 학원의 원장인 연희는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고 연욱이가 있던 그랜드 피아노실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문을 열려다 말았다.

“설마······?”

유리창을 통해 봐 보니, 연욱이는 연희가 놔두고 간 악보들을 피아노 위에 올려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들려오는 건 놀랍게도 베토벤의 소나타였다.

베토벤 소나타의 14번.

월광 소나타로 잘 알려진 베토벤 3대 소나타들 중 하나였다.

지금 연욱이가 치고 있는 부분은 월광 소나타 1악장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색이 특징이다. 정말 깊은 밤에 달빛이 내리쬐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곡이었다.

그리고 이 곡은 난이도가 쉬우면서도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첫 악장을 연주할 때 감성적으로 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악보대로 치면 듣는 이를 자극하는 월광 소나타만의 음색이 나오지 않는다. 최대한 감성적으로, 자신의 해석이 담긴 감상이 건반에 묻어 나와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저 8살짜리 아이가 치는 월광 소나타에서는 달빛의 매혹스러운 음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누가 설명 한번 해 주지 않았을 텐데도 연욱이는 악보를 초월해 자신만의 감상을 정확히 담아냈다.

멍하니 연욱이가 연주하는 걸 지켜보던 연희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다시 원장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 연욱이의 엄마, 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연희야. 무슨 일이야? 애들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이때 전화를 걸면 항상 애들 걱정부터 하는 효진이었다.

“응. 그런 건 아니고, 너랑 상의할 게 있어서.”

“어떤 거?”

잠깐 숨을 고른 뒤 연희가 말했다.

“연희야. 저번에 네가 그랬지. 네 아들이 모차르트면 어떡하냐고.”

“호호. 그랬지.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부끄럽네.”

“아니.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야.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연희는 자기 누나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월광 소나타 1악장에 몸을 맡기며 연주를 하던 연욱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잘 다듬기만 한다면 세상에 가득 빛을 뿜어내 줄 보물 같은 원석.

어쩌면 그것을 예상치 못 한 곳에서 찾은 것일지도 모르리라.

“너 진지하게 연욱이 음악시켜 볼 생각 없니?”

연희는 그 원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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