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7화 >
“애들아. 엄마 아빠 왔다~.”
재현과 효진 부부는 오늘 특별히 일찍 퇴근을 했다.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오디션이다. 그동안 딸아이의 오디션 연습을 제대로 봐 주지 못 한 것이 너무나도 미안해 일부러 무리를 해서라도 퇴근을 빨리 한 것이었다.
오늘은 혜나가 잠에 들기 전까지 오디션 연습을 봐 줄 생각이다.
이 배역을 꼭 맡고 싶은지, 혜나는 하루 종일 연습에 매달렸다. 그런 기특한 모습에 큰 도움을 주지 못 하는 부모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응? 애들이 어디 갔지?”
“여보.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혼자서 혜나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 연습을 하는 걸까?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며 소리가 들리는 안방으로 가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예상 외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던 건 연욱이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깜찍하고 귀여운 연욱이지만, 오늘은 왠지 근엄하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누나를 위해 건반을 하나씩 눌러 음을 맞춰 주고 있었다.
“아니야. 음이 조금 틀렸어. 잘 들어 봐. 이 음이야. 도레미파솔 할 때 솔 있지? 이 음소리를 내면 돼.”
애써 엄격하게 혜나를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 모습이 심장을 아프게 할 만큼 귀엽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재현과 효진은 각자 핸드폰을 들고 조용히 연욱이를 찍고 있었다.
“빅터. 어른들이 하는 말은 듣지 마. 너는 누구보다도 특별해.”
혜나의 대사가 끝나기 무섭게 연욱이 피드백을 해 주었다.
“누나. 어른들이 하는 말은 듣지 마 부분에서 발음이 날아다닌다.”
“딕션이 또 안 좋아?”
“응. 너무 안 좋은 건 아니야. 조금만 해서 고치면 될 거 같아.”
이제 딕션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는 혜나였다.
연욱은 건반을 하나씩 눌러 악보에 있는 음을 맞춰 주었다.
그럼 혜나가 그 음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다.
사이좋은 남매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던 부부는 포근한 미소를 짓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보. 그런데 연욱이 이제 막 피아노 배웠다고 하지 않았어?”
“응? 맞아. 이제 막 떴다 떴다 비행기 배웠다던데?”
“근데 어떻게 저 악보를 보고 음을 치는 거지? 벌써 악보를 다 볼 줄 아는 거야?”
“어? 그러게.”
“잘 봐봐. 내 착각인 거 같지만, 연욱이가 꼭 코드를 칠 줄 아는 것처럼 보이거든.”
재현의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효진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에이. 설마. 우리 아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그렇지, 피아노 배운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코드를 알겠어?”
“그, 그런가? 근데 건반을 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 마치 오랫동안 쳐 본 사람처럼.”
“어휴. 자기도 주책이야. 원래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은 천재가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다더라. 연욱이가 좀 특별한 아이긴 해도 벌써 저 곡을 피아노로 칠 수 있겠어?”
재현도 뭔가 앞뒤가 안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애가 천재라도 벌써 피아노 악보만 보고 코드를 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보통 피아노 학원에서는 코드를 치는 법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냥 소나타나 체르니에 있는 악보를 치게 하는 게 전부.
코드를 치려면 화성악을 배워야 하는데, 연욱이가 그걸 칠 수 있을 리가······.
“자. 음은 다 맞췄으니까, 제대로 노래 불러보자. 잘 따라와.”
“웅-!”
그런 생각도 잠시.
부부는 이어지는 연욱의 피아노 연주에 입을 크게 벌렸다.
피아노를 배운지 한 달도 안 된 연욱이 혜나의 오디션곡을 아주 능숙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 * *
‘곡 난이도가 어렵지도, 그렇다고 쉽지도 않아.’
혜나가 연습 중인 배역은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줄리아다.
줄리아의 어렸을 때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데, 보통 아역 배우들은 곡 하나 제대로 부르지 않고 퇴장하는데, 이 작품은 혜나에게 주어진 곡만 2개였다.
물론, 솔로곡은 아니고 짧은 듀엣곡들이었다.
문제는 이 노래를 평범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원장 선생님이 준 usb 음원 파일을 따라서 연습을 시켜도 되지만, 이렇게 피아노로 직접 연주를 해 줘야 연습하는 사람도 편하고 빨리 곡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혜나한테는 선생님이 치는 법을 잘 알려줬다는 핑계로 연주를 해서 연습을 도와주는 중이었다.
그렇게 피아노 연주를 하다 조금이라도 혜나가 감정에서 벗어나는 게 보이면 바로 손을 멈췄다.
“누나. 가지 마 빅터. 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라는 부분을 절대 밝게 불러서는 안 돼. 이제 서로 헤어지는 장면에서 부르는 노래잖아. 조금 더 슬픈 감정을 넣어야 돼.”
“우웅-!”
혜나는 내가 어떤 피드백을 줘도 절대 기분 나빠 하지 않고 곧장 받아들인다.
나는 그녀가 감정을 잡기 위해 혼자 눈을 감고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다 풉 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너무 귀엽다.
감독의 마음으로 혜나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이따금 저런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자. 다시 해 보자.”
“웅-!”
이제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연습 시간.
나는 최대한 세세하게 혜나의 목소리와 감정을 잡아 주려고 노력했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한다.
다른 쟁쟁한 아역 배우들이 수개월 동안 연습해서 올 텐데, 일주일 밖에 연습을 하지 않은 혜나가 그 아이들을 꺾을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 해서 도와주고 싶었다.
정말 후회 없는 오디션이 되도록 말이다.
* * *
연욱이의 연주를 따라 혜나가 노래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핸드폰 영상으로 담은 재현과 효진 부부는 벙찐 상태로 방문을 조용히 닫았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효진이었다.
“여보. 바, 방금 내가 본 게 뭐지? 이거 꿈 아니지?”
“그러니까. 나도 지금 뭘 잘못 본 건가 싶다니깐?”
“아니. 어떻게 연욱이가 피아노를 저렇게 잘 치는 거지? 저건 그냥 코드만 적혀 있는 악보잖아.”
“학원 선생님들이 알려줬나?”
“당신은 곡 하나 알려 준다고 금방 칠 수 있어? 피아노를 한 달도 안 배웠는데?”
“······못 치지.”
“여보. 방금 찍은 영상 좀 보여줘 봐.”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찍어 둔 영상을 재생시켰다.
“가지 마 빅터. 난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나와 함께 있으면 안 돼. 난 누구와도 함께 있을 수 없어.”
다시 봐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연욱이는 혜나의 연습을 위해 자기가 직접 상대 배역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것도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누나. 이 부분 다시 불러 볼까? 음이 약간 흔들렸어.”
“웅. 알겠어.”
혜나는 동생이 능숙하게 피아노를 치는 것이 놀랍지 않은지 연욱이의 지도를 착실하게 따라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성공적으로 듀엣곡을 마쳤다.
부부는 검은 화면으로 변한 핸드폰 화면 앞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다 재현이 읊조리듯 말했다.
“여보. 우리 아들은······ 천재가 분명해.”
효진은 강한 긍정으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자기들이 모르는 특별한 무언가가 연욱이에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건 빛나는 재능일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단정 지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애들한테 한번 물어보자.”
“응. 나도 궁금해 미치겠다.”
재현과 효진 부부는 두 아이가 연습을 끝내고 방 밖으로 나오길 숨죽이며 기다렸다.
이윽고 조금 지쳐 보이는 아들과 딸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연욱은 순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엄마~! 아빠~!”
혜나는 반갑게 부부를 향해 뛰어들었다.
연욱은 잠깐 멈칫 거리다 혜나를 따라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예쁜 내 새끼들. 연습하고 있었어요?”
“웅-! 연욱이가 도와줬어!”
“어이구. 우리 연욱이 착하네. 누나 연습도 도와주고.”
부부는 사랑스러운 손길로 두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효진이 얼른 물어보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자 재현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애들아. 엄마 아빠가 아까 집에 들어와서 너희들이 연습하는 걸 잠깐 지켜봤단다.”
“어땠어? 혜나 잘했어?!”
“우리 혜나는 뭘 해도 다 잘하지. 너무 예쁘고 노래도 잘 불러. 그런데 우리 연욱이.”
재현은 연욱을 번쩍 안아 올렸다.
“아까 보니까 피아노 연주 실력이 장난 아니던데?”
그러자 혜나가 거들었다.
“웅! 연욱이 피아노 잘 쳐! 혜나보다 더 잘 쳐!”
연욱이의 굳은 얼굴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그래? 우리 아들 엄청 겸손한 걸? 그 곡은 일반 체르니랑은 다를 텐데. 코드 보면서 쳐야 하는 곡이라서 말이야. 근데 그걸 아주 능숙하게 치더라? 이 아빠가 그거 보고 너무 깜짝 놀랐어.”
“그냥··· 학원 선생님이 알려 준대로 따라 친 거예요.”
“음. 그렇구나.”
알려 준대로 따라쳤다?
그래 봐야 며칠 알려 주지도 않았을 텐데.
뭔가 납득이 가면서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엄마. 나 배고파.”
“으응? 아. 그래. 애들 배고프겠다. 얼른 밥 먹자.”
물어보고 싶은 게 더 있었지만, 배고프다는 혜나의 칭얼거림에 어영부영 넘어가고 말았다.
“꼭꼭 씹어 먹어.”
“웅-! 오늘 밥 2그릇 먹을 거야! 연습 열심히 해서 배고파.”
“호호. 그래. 많이 먹어.”
효진은 부모님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열심히 연습한 혜나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아까 봤던 연습 장면의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아빠. 너무 졸려~.”
밥을 다 먹고 나서 연욱이와 혜나는 연습의 피로가 몰려와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재현과 효진은 호기심을 뒤로 하고 아이들을 침대에 뉘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은 찍어 둔 영상을 한번 더 복습했다.
“학원 선생님이 알려 준대로 쳤다고는 해도 너무 능숙하지?”
“응. 대체 얼마나 잘 가르쳐줬으면 애가 저렇게 잘 치는 거야?”
“연욱이가 혜나를 위해서 엄청 연습을 한 걸 수도 있어.”
“그렇겠지? 잠깐만. 여보. 내가 연희한테 한번 전화해 볼게.”
이윽고 연희가 효진의 전화를 받았다.
“응. 효진아.”
“연희야. 바빠?”
“아니. 괜찮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쉬고 있어. 무슨 일이야?”
“음. 다름이 아니라 혹시 연욱이한테 혜나 오디션 곡 연습 시켜줬어?”
그 말에 연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대꾸했다.
“연욱이한테 혜나 오디션 곡을? 이제 막 피아노 배우기 시작한 애한테 그걸 어떻게 가르쳐 주니. 호호.”
“아, 안 가르쳐줬다고?”
“응. 안 가르쳐줬어.”
“정말? 확실해? 다른 선생님들이 가르쳐 준 거 아니야?”
“아니라니깐? 대체 왜 그래?”
효진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연욱이가 능숙한 피아노 연주로 혜나를 도와줬다고 말이다.
그러자 연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진짜야? 애가 정말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다고?”
“그래. 정말이야.”
“설마. 잘못 본 거겠지. 내가 혜나한테 오디션 곡 악보랑 다른 사람이 부른 음성 파일 usb 넘겨주면서 딱 3번 쳐 주긴 했어. 대충 감만 잡으라고.”
“그때 연욱이도 같이 있었어?”
“응. 있었지. 그래서 잘못 본 거라는 거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악보도 잘 볼 줄 모르는 연욱이가 그때 내가 치는 걸 보고 외워서 똑같이 따라쳤다는 건데,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애가 무슨 모차르트도 아니고 말이야.”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먹은 효진은 멍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효진아?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연희야.”
“응?”
“우리 아들이 정말 모차르트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