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5화 >
“아빠 왔다~!”
“아빠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향해 혜나가 먼저 쪼르르 달려갔다.
아버지는 사랑스럽게 달려오는 딸을 번쩍 들어 안았고, 혜나는 볼에 마구 뽀뽀 공격을 날렸다.
“우리 혜나 잘 있었어? 아빠 보고 싶었지?”
“웅!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아빠도 혜나 너어무 보고 싶었어!”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부녀지간이다. 그냥 거기서 끝나면 좋으려만, 아버지는 내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벌써부터 손발이 오그라 들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향해 우다다 뜀박질을 했다.
“아빠~!”
“으허허. 그래. 우리 귀여운 연욱이! 연욱이도 아빠 많이 보고 싶었지?”
“예! 너, 너무 보고 싶었어요.”
불과 1달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할 애교다.
이 나이 대에는 당연한 행동인데, 아직까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그래도 예전보단 낫다.
이 몸으로 처음 눈을 뜨게 됐을 땐 모든 게 혼란스러워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그땐 부모님이 내게 무슨 이상이 있는 줄 알고 눈치를 보며 걱정을 했었다.
그게 죄송스러워서 일부러 과장되게 감정 표현을 하는 중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고 계셨다.
그래. 이게 행복이라면 행복이지.
무거운 가장의 무게를 아이들의 미소가 사르르 녹여 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여보. 오늘도 고생했어.”
“아니야. 당신이 제일 고생이지. 직장에서 일하랴, 육아하랴 내가 다 미안해.”
“호호. 우리 애들이 너무 착하고 예뻐서 사실 별로 힘들지도 않아.”
우리는 옹기종기 식탁에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보글보글 끓인 찌개를 중앙에 놓고 손수 튀긴 돈가스를 나눠 주었다.
“아빠아빠. 오늘 피아노 학원에 갔었어.”
“오구구. 그랬어? 우리 혜나 학원 잘 다닐 수 있지?”
“웅-! 얼른 피아노 배워서 아빠한테 들려줄게.”
“후후. 그래. 벌써 기대가 되는데?”
어머니는 아버지 그릇에 국을 떠다 주면서 말했다.
“오늘 연희네 학원으로 가서 등록했어.”
“연희? 잘 지낸대?”
“응. 여전하더라. 학원도 꽤 커졌고. 아주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던데?”
“근데 연희는 결혼 소식이 아직 없네. 저번에 만나던 남자친구는 헤어진 건가?”
“남자가 바람을 펴서 헤어졌대. 그래서 연애는 하고 싶지 않는가 봐. 그런데 우리 애들 보더니 갑자기 애 낳고 싶다는 거 있지?”
왠지 모르게 아버지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후후. 우리 애들보면 다 그 소리부터 하지. 그래서 혜나만 등록한 거야?”
“아니. 연욱이도 같이 등록했어.”
“오. 그래? 연욱이가 피아노에 관심이 있는지는 몰랐네.”
“그것 보다는 연희가 연욱이는 한 달만 무료로 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해서 등록했어. 한 달 뒤에도 연욱이가 싫다고 하면 안 다니게 하려고.”
그러자 아버지는 옆에 앉은 날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래.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한 달까지 두고 볼 필요도 없어. 언제든 하기 싫으면 꼭 얘기해, 연욱아.”
“아··· 예. 그럴게요.”
참 프리한 집안이다.
애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걸 시킨다-라는 마인드를 가진 부모가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다들 학구열에 불타올라 아이들을 여러 학원에 보내 공부를 시키지 않던가.
당장 나와 혜나의 주변 친구들만 봐도 그렇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학원 차에 올라타 밤새도록 이 학원, 저 학원을 돌아다닌다.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를 해야 부모들이 원하는 대학에 아이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아이가 커서 성공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모두에게 박혀 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세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스펙을 청년들에게 요구하게 될 테니까.
혜나가 피아노 학원을 가게 되면 나 혼자 붕 뜨게 돼서 못 이기는 척 다닌다고는 했지만, 당장 내일부터가 걱정이다.
학교에서도 애들이 떠들며 정신 없이 돌아다니는 걸 간신히 견디고 있는데, 이젠 피아노 학원까지 가서 그래야 하다니.
그래. 한 달.
딱 한 달만 혜나 옆에 꼭 붙어 다녀 보자.
그래도 초등학교보단 낫겠지?
* * *
초등학교라는 잼민이 월드를 벗어나면 꿀벌 피아노 학원이라는 잼민이 월드 ver2에 입성하게 된다.
학교보단 좀 덜할 거라는 내 생각은 오판이었다.
쾅쾅쾅-!
여전히 쾅쾅 대는 피아노 소리.
“야아-! 빨리 돌려줘!!”
“선생님~ 다 풀었어요!”
“애 또 숙제 안 하고 도망가요!”
그리고 피아노 학원에서 나눠 주는 음악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
피곤에 찌든 담당 선생님의 얼굴만 봐도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 것 같다.
‘저번에 보니까 층을 나눠서 운영을 하던데.’
꿀벌 피아노 학원은 이름만 들으면 초등학생들이 많이 다닐 것 같지만, 여긴 유아부, 중등부로 나뉘어져 있다.
유아부는 유치원생들과 초등학생 애들이 섞여 있는 곳이고 중등부부터는 아예 층을 나눠서 운영을 한다.
예술고를 준비하는 중학생들을 위해 따로 층을 나눈 거 같은데, 저번에 선생님을 따라 대충 구경을 해 보니 확실히 피아노 소리 빼고는 애들 떠드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거기 애들은 음대를 노리고 착실하게 준비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처럼 환장 파티가 열리진 않는다.
댕-! 댕-! 댕-!
혜나는 피아노 건반을 신나게 때리고 있었다.
집에 있는 전자 피아노만 치다가 일반 피아노를 치게 돼서 기분이 좋은 듯보였다.
나는 혜나 옆에 앉아 그녀가 엉망진창으로 치는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다른 애들이 치는 건 다 소음으로 들렸는데, 혜나가 치는 건 그냥 듣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누나는 음악이 좋아?”
“웅!”
“가수가 꼭 되고 싶어?”
“웅-! 꼭 될 거야!”
대답이 아주 단호하다.
“그게 누나를 불행하게 만들어도?”
“괜찮아! 불행할 땐 노래를 부르면 돼. 그럼 행복해져.”
“······.”
음악을 할 때면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 혜나였다.
걸그룹 활동 당시에도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얼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음악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음악에 취해 살고 싶어 한다.
이런 그녀를 보고 내가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그토록 원하는 가수의 꿈을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목구멍에 차 올랐다가도 다시 쭉 내려가 버리고 만다.
그래. 아직 혜나는 어리다. 그러니 하고 싶은 걸 하게 놔두자.
음악을 포기하는 것이 꼭 능사일 리는 없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저번 생에서는 무명으로 끝났지만, 이번 생에서는 음악으로 성공해 당당히 무대에 선다면 어떨까?
“연욱아. 너도 얼른 피아노방에 들어가 있어. 선생님이 혜나 먼저 레슨 시켜주고 들어갈게. 어제 배운 거 있지? 그거 연습하면 돼.”
“예.”
“이따가 봐, 연욱아~.”
“응. 열심히 해 누나.”
나는 지정된 방으로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차피 연습을 할 것도 없다.
배워봤자 도레미파솔라시도와 떴다 떴다 비행기가 전부다.
난 연습을 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혜나가 정말 가수가 되고자 한다면, 내가 그녀의 꿈을 막는 것이 아니라 지지를 해 줄 거라면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 * *
최연희 원장은 유아부가 더 밝아진 듯하여 하루하루 기분이 좋아졌다.
그건 아마 선남선녀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혜나와 연욱이가 학원에 등록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둘이 붙어서 복도를 돌아다닐 때면 자기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짓게 된다.
최대한 오래 다녀줬으면 좋겠는데, 한 달 뒤에는 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남매를 못 볼 수도 있다.
그녀는 선생님들과 회의를 하던 중 지나가듯 물었다.
“유아부에 연욱이라는 애 알지?”
그러자 생각 외로 반응이 뜨거웠다.
“예. 당연히 알고 있죠. 유아부 선생님들한테 인기 짱이잖아요.”
“응? 그래?”
“예. 원장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그 애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맞아요. 귀엽기만 한 게 아니라 그냥 잘생겼어. 그것도 엄청. 애가 좀만 나이 더 먹으면 얼마나 더 잘생겨질지 상상이 안 간다니깐?”
“나도 선생님들이 하도 난리를 치기에 슬쩍 보러 갔었는데, 진짜 애가 원판이 훌륭하더라.”
선생님들은 벌써 연욱이의 매력이 푹 빠진 듯싶었다.
“그 애 귀엽고 예쁜 건 나도 알아. 그런데 피아노 실력은 어때? 애가 음악에 관심이 좀 있어 보여?”
“곧잘 치는 거 같던데요?”
“예. 다른 애들은 피아노 앞에서 장난치기 바쁜데, 연욱이는 그냥 점잖게 치라는 것만 딱딱 쳐요. 배우는 게 빠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또래 애들처럼 시끄럽지도 않고 막 돌아다니지도 않아요. 가끔 누나 피아노 치는 거 옆에 앉아서 구경하는 정도?”
“맞아. 그때 둘이 앉아 있는 모습 보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다행히 연욱이에게 피아노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제 막 배우는 단계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자기들 연욱이 얼굴 가능하면 오래 보고 싶지? 그럼 그 애가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하게 만들어. 내가 그 애 우리 학원 다니게 하려고 한 달 학원비를 무료로 해줬어.”
“어머. 정말요?”
“크으. 역시 원장쌤. 그런데 애가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하나 보죠?”
“자기 말로는 음악에 재능이 없대.”
“에이. 아니에요. 애가 건반 치는 거 보면 소질은 있어 보였어요.”
“소질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애가 피아노 연주하는 걸 좋아해야지. 그러니까 애가 피아노 연주를 좋아할 수 있게 잘해줘 봐.”
선생님들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연희야~. 바빠?”
“아. 언니 왔어?”
“어머.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곧 있으면 애들 몰려올 시간이라 이제 가 봐야 돼요.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연희의 친언니, 가희가 들어오자 선생님들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가희는 자리에 앉아 투덜거리기부터 했다.
“너도 직접 티켓팅 좀 해라. 바쁜 언니 그만 좀 부려 먹고.”
“미안해. 내가 곰손이라 티켓팅은 진짜 못하겠더라. 이럴 때 뮤지컬 판에서 일하는 언니 덕 좀 보는 거지. 나 이번 공연은 꼭 보고 싶었거든.”
가희가 건네주는 뮤지컬 티켓을 조심스럽게 챙기는 연희였다.
한 달에 한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뮤지컬을 보러 가는 연희였기에 보조 연출가로 뮤지컬 판에서 일하는 가희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언니. 이번에 준비하는 작품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선 보이는 공연이라며.”
“응. 괴물이라는 뮤지컬인데, 너도 알지? 프랑켄슈타인 소설. 그걸 각색해서 만드는 뮤지컬이야.”
“오. 재밌겠다. 배우들은 누구 캐스팅 하기로 했는데?”
“남배우는 류재한이랑 정민석. 여배우는 박희진이랑 김영혜. 메인급은 이렇게 더블 캐스팅으로 잡았어.”
“라인업이 벌써부터 튼튼하네. 이번에 소속사에서 돈 좀 쓰나 보다.”
“항상 외국 뮤지컬만 수입해서 오다가 이번에는 우리가 직접 만든 걸 올리는 거잖아.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지. 그런데 캐스팅이 꼬여 버렸어.”
“응? 왜?”
“우리 지휘자랑 감독이 좀 유별나거든. 너무 깐깐하게 오디션을 봐서 아직도 아역 배우를 못 뽑은 거 있지?”
어지간히 속이 탔는지 가희는 물을 벌컥 들이켜며 하소연을 했다.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애를 찾기가 쉬운 줄 아니? 다른 배우들은 다 구했는데, 아역을 못 구해서 지금 진도가 안 난가고 있다니깐?”
“여자애 하나, 남자애 하나. 이렇게 뽑는 거야?”
“남자애는 이미 구했고, 여자애가 필요해. 벌써 오디션도 두 번이나 치렀어. 그런데도 안 뽑았다니깐? 고작 아역에 뭘 그리 정성을 들이는지 모르겠어. 내가 그 두 놈 때문에 이리저리 발품만 팔고 있잖아.”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연희는 언니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아역 배우 나이 제한이 어떻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