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그룹 멤버의 남동생이 되었다 4화 >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1학년 5반 김은주-
그냥 날 멕이는 줄 알았는데, 이 여자애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선물을 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핑크색 종이에 스티커까지 여러 개 붙여서 쪽지를 같이 준 것을 보면 말이다.
‘귀엽네.’
나중에 지나가다 보면 아는 척이라도 해 줘야겠다.
“똥쟁이 장연욱! 여자한테 휴지 받았대요!”
“···넌 아직도 안 갔냐?”
찰지게 욕 한번 더 해줘야 알아서 기어 들어가려나.
하지만 괜한 고민이었다.
이런 애들은 금방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우르르 몰려가기를 반복한다.
나에 대한 흥미가 빠르게 식어 버린 남자 애들은 다른 아이를 놀리기 위해 떠나 버렸다.
뭔가 진짜 가 버리니까 좀 서운한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선물 받은 휴지를 교실 뒤쪽에 있는 사물함에 넣어 놓으려고 했다. 앞으로 배가 아플 때마다 든든하겠군.
“엥?”
그런데 내 개인 사물함 안에 누군가가 넣어 놓은 사탕과 짧은 쪽지가 있었다.
연욱아. 사탕 맛있게 먹어~!
그리고 혹시 학원 어디 다녀?
나중에 말해줘
-1학년 3반 박세미-
또 얼굴도 모르는 여자 아이의 선물이 사물함 안에 들어 있다.
뭐야. 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은.
그러고 보니 학교를 다니면서 이상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긴 했었다.
당장 오늘도 그렇다.
잠깐 복도에 서성거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선생님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내게 와서 묻는다.
“너 몇 학년 몇 반의 누구니?”
“1학년 1반 장연욱이요.”
“어머. 그래? 애가 참 잘생겼네.”
그리고 하교를 할 때도 여자 선생님들이 날 보고 쪼르르 달려왔다.
“애. 너 몇 학년이야?”
“1학년이요.”
“어휴. 네 어머니는 좋겠다. 애가 아주 잘생겼어. 볼 때마다 행복하겠네.”
“그러니깐. 나도 이런 아들 하나 낳으면 좀 좋아?”
“우린 유전자가 안 돼. 남편들도 하나 같이 못 생겨서 더더욱.”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나도 내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게 되었다.
이게 잘생긴 건가?
나도 매일 거울은 본다. 그런데 아직 8살 밖에 되지 않은 얼굴이라서 그냥 조금 귀엽게 생겼네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저번 생에서는 얼굴 잘생겼다는 소리를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딱히 꾸미고 다니지도 않았다. 특히 음대생들은 밤새 작곡이나 합주 연습에 시달리고 술을 퍼 마셔야 하기 때문에 아침부터 음지의 폐인처럼 다니는 놈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연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연애를 안 한 거지, 정말 하려고 했으면 진작 하고도 남았을 거야.”
······아마도.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다.
* * *
쾅쾅-!
또르르~
아이들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은 아름다운 선율이 들리기 보다는 지금처럼 공사장 같은 쾅쾅 소리가 들린다.
페달을 너무 세게 밟아 그렇게 들리는 경우도 있고, 그냥 애들이 냅다 주먹으로 건반을 때려서 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나마 가끔 정상적으로 치는 애들이 있긴 한데, 그것마저도 얼마 못 가 귀를 아프게 하는 연주로 변한다.
잠깐. 그런데 내가 이렇게 피아노 소리에 민감했던 적이 있던가.
그냥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게 끝이었는데, 유독 오늘따라 모든 소리가 민감하게 들려왔다.
“저쪽은 박자가 너무 빠르고, 저쪽은 페달을 너무 세게 밟네. 저 방은 그냥 음이 엉망진창이고.”
“응? 연욱아. 뭐라고?”
“아-. 아니에요.”
아까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오두방정 맞은 입이 헛소리를 해 댔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묘한 시선을 모른 척하며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효진아. 이게 얼마만이야? 자주 좀 놀러 오라니깐.”
“미안해. 직장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
“에휴. 직장도 다녀야 하고 애도 키워야 하고, 대한민국 아줌마들 참 힘들다. 힘들어.”
“호호. 괜찮아. 우리 애들은 너~무 사랑스러워서 하나도 안 힘들어.”
어머니는 나와 혜나를 앞으로 내세우며 말했다.
“자. 애들아. 원장 선생님한테 인사해야지? 다들 옛날에 봐서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엄마 고등학교 친구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원장 선생님은 나와 혜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 김효진. 너 아주 복 받았다. 무슨 애들이 이렇게 예뻐? 혜나는 진짜 가면 갈수록 더 예뻐지네?”
“호호. 우리 혜나가 날 닮긴 했지.”
“흥. 하나도 안 닮았거든? 그냥 애 혼자 예쁜 거지. 그리고 연욱이는······.”
날 바라보던 원장 선생님의 시선이 딱 멈췄다.
“효진아. 근데 네 아들 원래 이렇게 잘생겼었나? 아니. 지금 몇 살이지?”
“이제 여덟 살이야. 초등학교도 막 들어갔고.”
“어머머. 고작 여덟 살인데 어떻게 이런 얼굴이 나와? 이건 애라서 귀여운 수준이 아니잖아?”
“호들갑은.”
“아니야. 애는 진짜 나중에 커서 배우해도 되겠다. 떡잎부터가 달라. 부디 이대로만 커라, 연욱아.”
원장 선생은 쉬지 않고 내 머리와 볼을 쓰다듬었다.
슬슬 그런 손길이 부담스러워질 때쯤 어머니가 나섰다.
“우리 혜나 피아노 학원 등록하러 왔어.”
하루 종일 내 볼만 만질 기세였던 원장 선생님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차. 그랬지? 내 정신 좀 봐.”
그리고 혜나에게 몸을 낮추며 미소를 보였다.
“우리 혜나가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엄마한테 졸랐다며?”
“예! 꼭 배우고 싶어요!”
“그래? 혜나는 피아노가 좋아?”
“너무 좋아요. 피아노 부르면서 노래도 부르고 싶어!”
어머니는 그런 혜나의 귀여운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혜나 꿈이 가수야. 꼭 피아노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네?”
“정말? 그럼 이 원장 선생님이 먼저 사인부터 받아야겠는데? 나중에 혜나, 가수로 유명해지면 이 원장 선생님 잊으면 안 된다?”
“애. 김칫국 그만 마셔.”
“그런데 혜나만 등록해? 연욱이는?”
“우리 연욱이?”
멍하니 앉아만 있다가 어머니와 원장 선생님의 시선을 동시에 받게 됐다.
“아-. 저는 괜찮아요.”
지겹게 했던 음악이다.
재능이 없는 내겐 고문 같은 세월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걸 또 하라고?
어림도 없지.
“왜에-! 같이 하자, 연욱아!”
“으응?”
“연욱이 안 하면 나도 안 할 거야!”
성난 파도에도 흔들림 없는 등대 같은 내 마음이 혜나 앞에서는 바람 앞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러자 원장 선생님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래. 연욱아. 누나가 같이 하고 싶다잖아. 그러니까 한번 해 봐.”
“그··· 전 별로 음악에는 재능이 없어서요.”
“재능? 호호. 애 말하는 것 좀 봐. 아주 귀여워 죽겠어.”
그녀는 내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연욱이는 나이가 어려. 무슨 재능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재능이란 건 생각지 못 한 순간에 갑자기 튀어 나온단다.”
됐수다.
잔인하게도 난 날 잘 안다.
음악 재능도 없는 놈이 음악한답시고 까부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또 없다.
거기다 우린 그냥 평범하게 사는 집안이라 애들 학원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원장 선생님은 초강수를 두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한 달 동안 연욱이 학원비는 받지 않을게. 대신, 누나랑 꼬박꼬박 학원 나와 보렴. 혹시 모르잖아?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될지. 딱 한 달만 다녀 보자. 어때?”
이 아줌마. 좀 세게 나오는데?
학원비를 한 달 동안 받지 않게 다는데 싫어할 학부모는 없을 것이다.
역시나. 어머니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다.
“그래. 연욱아. 원장 선생님 말대로 딱 한 달만 다녀 보는 거야.”
“이 누나랑 같이 학원 다녀! 누나가 피아노 치는 법 잘 알려 줄게!”
곤란하군.
어린 8살 꼬마에게 여자 3명이 적극적으로 권유를 하니 안 넘어갈 수가 없다.
특히 혜나가 내 몸을 잡고 흔들고 졸라 대는 게 가장 효과가 컸다.
“예······ 다닐게요.”
에휴.
한숨을 푹 쉬고 싶었지만, 차마 겉으로 그럴 순 없었다.
* * *
꿀벌 피아노 학원을 운영 중인 최연희 원장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 때문에 활기가 돌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고 지금까지 연락을 끊지 않은 얼마 없는 소중한 친구이기도 했다. 비록 일이 바빠서 요즘은 연락이 뜸했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녀는 애들을 다른 선생님에게 맡겨 학원을 구경시키게 해 주었다. 잠깐이나마 친구와 커피를 한 잔하며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도 주책인가 봐.”
“응? 뭐가?”
“네 애들 보니까 갑자기 나도 막 애 낳고 싶은 생각하는 거 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너도 결혼해야지.”
“으휴.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일하기 바빠 죽겠는데.”
“후회 안 한다니깐? 난 진짜 애들 보는 맛에 살아.”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혜나는 혜나대로, 연욱이는 연욱이대로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
특히 연욱이의 외모는 여덟 살의 그것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연욱이가 은근히 나이에 맞지 않게 분위기가 있네. 애가 원래 똑똑한 건가?”
“다른 애들이랑은 확실히 달라. 내가 우리 애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달라. 너무 어린애 같지가 않아서 가끔은 놀란다니까? 담임선생님도 8살 같지 않다고 하더라.”
연욱은 항상 조심한다고 신경을 썼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다른 8살 애들처럼 행동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애들이 음악을 많이 좋아하나 봐? 음악 재능이 있는 건가? 네가 옆에서 지켜봤을 거 아니야. 재능 있는 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두각이 나타난다잖아.”
“음-. 혜나는 확실히 음악을 좋아해. 노래도 잘 부르고. 그런데 악기 연주를 잘 할지는 모르겠네? 아직 애잖아.”
“연욱이는?”
“그 애는··· 조금 재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왜? 무슨 일 있었어?”
효진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제 친구에게 털어 놓았다.
“그러니까 애가 갑자기 빵을 먹다가 어느 마디가 틀렸는지 정확하게 집어냈다고?”
“나도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니깐? 내가 피곤해서 박자도 놓치고 미스 터치도 했거든. 근데 그걸 한번에 캐치하더라고. 그때 잠이 확 깨더라.”
“그냥 우연일 수도 있잖아. 익숙한 음이라면 미스 터치했을 때 곧바로 이질감을 느끼니까.”
“그렇기 하지. 근데 엄마의 촉이라는 게 있잖아?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연욱이에게는 다른 애들에게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네 말대로 정말 그 애가 뭘 알고 캐치해낸 거라면 이거 욕심나는데? 나중에 저 얼굴 그대로 잘 크면 스타 피아니스트로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야. 음악을 잘 하는데 얼굴까지 잘 생겼어 봐. 아주 사람들 미친다. 나 벌써 상상했어.”
“기지배 또 너무 나간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썩 나쁜 얘기는 아니었다.
남편과 자신이 이루지 못 한 음악의 꿈. 그것을 연욱이가 이뤄낸다면 부모로써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하지만 결코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한 달 동안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도 음악에 재미를 붙이지 못 한다면 그땐 바로 그만 두게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뭔가를 바라기 보다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자는 것이 남편과의 약속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