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181 --------------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일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
솔직히 이런 일에 대한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다연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니까.
다연이가 내게 왔던 처음이 있었으니 어떻게든 다연이와 다연이 엄마와의 마지막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이 다연이가 내게 왔던 때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다연이 엄마가 돌아가시던 때든, 아니면 다시 찾아오던 때든.
하지만 다연이 엄마의 친구가 올 줄은 몰랐다.
내가 그렇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있을 때 여자가 말했다.
“다연이 엄마, 친구라고요.”
무례하지 않은 목소리였고, 표정이었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자신이 감히 이 곳으로 찾아 온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왜 그런지 이유까지는 짐작할 수는 없었다.
여자가 말을 잇는다.
“할 말이 있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내가 다연이 엄마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떨리지 않았다.
분명히 할 이야기가 있는 낌새였다. 나를 찾아오기 전부터 준비해 놓아서 나에게 바로 털어 놓기만 하면 될 정도로 확고한 목소리였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 때의 다연이 엄마를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나는 그 때처럼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다연이 엄마와의 접점이 지금 이어질 줄은 몰랐으나 나도 그녀에게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식당에 손님이 많은 때다. 당장 여자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손님들 많으니까.”
나름 생각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저 여자의 말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랬다. 휘둘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식당에는 다연이도 있다. 나는 다연이가 이 이야기를 듣지 않고, 여자도 보지 않았으면 했다.
“네.”
여자는 내 말대로 식당 구석의 의자에 가서 앉는다.
“후..”
일단 상황은 정리했지만 해야 할 것이 아직 많았다.
나는 이 여자가 온 것을 다연이가 알지 않았으면 했다. 만약 중요한 일이라면 내가 결정할 것이고 다연이의 결정이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다연이에게 말해줄 거다.
저 여자가 다연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지금 다연이는 복도에 앉아서 자기 혼자 놀고 있다.
여자와 대화를 하려면 다연이가 여기에 있어선 안 된다.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모르기에다연이는 우리가 하는 대화를 듣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예나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예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아이다. 이번 일에 대해 어디에 말하지 않으면서 다연이를 맡길 수 있는 아이.
다연이를 예나네 집으로 보내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다연이는 똑똑한 아이기 때문에 갑자기 예나네 집으로 보낸다면 의심할 거다.
그렇기에 예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예나에게는 지금 상황을 대략 설명해 줄 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연이가 내게 와서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봐. 이거 내가 그린 고양이랑 참새야..!”
혼자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연이가 그런 말을 하니 훅하고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잘 그렸네.”
나는 다연이가 그린 그림을 받아서 살펴본다.
“거기 뒤에도 그림 이써.”
“응.”
그리고 차례차례 넘기면서 그림을 본다.
다연이가 그린 그림은 전부 우리 식당에 관한 것들이었다. 식당 근처에 사는 동물들과 우리 식당에서 만드는 음식들.
그리고 집에 있는 것들까지. 나는 그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을 헤집던 잡념들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긴장감과 여자를 상대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수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잡념들이 걷히자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나는 다연이가 더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기에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여자와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중심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전부 잘 그렸네.”
“마찌이. 나는 요리사도 되고 화가도 될 수 이쓸 거 가타.”
“그래.”
“음··· 그래도 요리사가 될 꺼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연이에게 말했다.
“그러면 저기 가서 그림 더 그리고 있어.”
“응!”
다연이는 다시 복도로 쪼르르 달려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예나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예나는 다연이가 나와 같이 살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 이해시키는 데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네, 알겠어요. 빨리 갈게요, 아저씨.”
“고마워.”
예나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곧이어 예나가 왔다.
“오..! 언니가 왜 와써..?”
예나가 올 줄 몰랐던 다연이는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언니 이제부터 방학이잖아. 다연이랑 놀려고 왔지. 이제 3학년 되면 잘 못 놀거니까.”
“조아조아··· 아주 조은 거야. 그러면 빨리 놀자!”
나는 혹시 다연이가 대화소리를 들을 까봐 예나에게 위 층에서 놀라고 말했었다.
다행히도 다연이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예나가 놀러왔다는 사실이 반가워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림 도구들을 들고 위 층으로 올라간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다음에야 여자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담담하고 평온하게 앉아있다.
그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다연이의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와 너무 달라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저 여자는 다연이의 엄마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다.
나는 손님들에게 서둘러 음식을 내주고 식당 문에는 영업을 쉬겠다는 팻말을 걸어뒀다.
그렇게 손님들이 식당을 전부 빠져나갔다. 위에서는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마침내 식당에는 여자와 나, 둘만이 남게 됐다.
조용한 식당에서 나만 긴장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내가 표정이 없다는 사실이 도움이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내 표정을 여자에게 읽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할 말이 있어서요.”
여자의 목소리는 아직도 침착했다.
나는 여자의 말을 듣고 왜 여기에 온 건지 생각했다.
만약 다연이 엄마가 할 말이 있었다면 직접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다연이 엄마 대신 친구가 찾아왔다는 말은.
“..”
다연이 엄마에게 일이 생긴 것이다.
아프거나. 아니면.. 돌아가셨거나. 나는 다시 말했다.
“다연이 엄마··· 혹시 돌아가신 건가요.”
내 말에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왜 온 걸까.
“살아있어요. 아직은.”
나는 여자의 그 말에 대화가 길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론만 말해주세요.”
강하게 말한 이유는 내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오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해지는 말을 내뱉었다.
“다연이. 엄마랑 만날 생각은 없나요?”
여자도 담담한 말투였다. 강요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정말로 그냥 묻는 거다. 물론 그저 의사를 묻기 위해서 이 곳까지 찾아온 건 아니겠지만.
내가 그 말에 잠시 아무 말없이 있다가 물었다.
“다연이 엄마가 부탁한 건가요?”
“아뇨.”
더 적막해지는 식당의 분위기와는 달리 위 층에선 다연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적막을 뚫고, 여자가 말을 쏟아냈다. 다연이의 엄마에 대해서,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에 대한 이유였다.
정말 문장 그대로 말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비처럼 내리는 말들 속에서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여자가 한 말은 다연이 엄마의 상태와 그녀가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다연이 엄마에게 괜한 동정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 여자가 한 말로 판단하지 않을 거다.
“....”
여자가 쏟은 말은 이랬다.
지금 다연이 엄마는 아프다고 한다. 너무 뻔하고,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 같았지만 현실이 그랬다.
병명은 아버지와 똑같은 암이었다. 어딘가의 무슨 암이라고 했는데 그런 것 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연이의 엄마는 지금도 예전 그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나왔던 그 집에서.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나는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물었다.
“다연이 엄마가 부탁한 게 아니라면 왜 오신 거죠?”
여자의 대답은 이랬다.
다연이 엄마는 늘 버릇처럼 다연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 때마다 여자는 다연이 엄마에게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했었고 다연이 엄마는 늘 고개를 저었다고 했다.
여자가 말을 잇는다.
“제 오지랖인 건 아는데... 알고도 왔습니다.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게 다연이 엄마에게도.. 다연이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요. 선택은 다연이 오빠 분이 하시는 거지만요.”
“...”
나는 아무 말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다연이 엄마에게 아무 사정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눈빛이었고,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여자에게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여자가 말했다.
“저는.. 그냥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저는 잘 모르니까요.”
“..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이 말만 전하러 온 거니까.”
그리고 여자가 갔다. 다연이 엄마와의 첫 만남처럼.
다시 식당에 적막이 찾아왔다.
솔직히 말해 언젠가는 이런 결정을 해야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결정인진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된다는 걸. 그 이유는 다연이를 키우기 시작했던 시점에 다연이 엄마와 완벽하게 끝맺음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여자의 말대로 다연이 엄마를 보러 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한참 생각하다 결정을 내렸다.
“다연이한테 말하자.”
지금 다연이와 다연이 엄마와의 관계는 확실하게 끊어지거나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다연이 엄마가 다연이를 멀리하고 있는 것 뿐이다. 정확한 이유도, 다연이가 납득할 만한 사연도 없이.
그렇기에 다연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련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나처럼 어릴 적의 떠오르지도 않는 엄마를 떠올리면서.
다연이는 그러지 않길 바랐다. 다연이는 나와 다르게 키우고 싶었다.
그러려면 다연이가 엄마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하지만 나조차 정확한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연이에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뭐가 정답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연이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답인지, 아니면 말하고 찾아가는 것이 답인지.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결말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 내가 그랬으니까. 그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많은 고민 끝에 다연이를 불렀다.
다연이는 여전히 예나와 열심히 노는 중이었고 표정도 신나 보였다.
그런 다연이에게 어두운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미안했지만 나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예나는 집으로 보내고 난 뒤였다.
우선 다연이에게 대강의 상황을 말해줬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다연이의 엄마가 있는 곳을 알게 됐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내가 다연이에게 물었다.
“다연아··· 엄마 보고 싶어..?”
“...”
이렇게 진지하고도 우울한 모습의 다연이는 오랜만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다연이가 입을 연다.
“응··· 보고 시퍼..”
“그래···”
다연이는 다시 말했다.
“그래도··· 나는 오빠랑 가치 살 거야.. 엄마 만나도.. 안 갈 거야..”
“응.”
다연이는 오히려 그렇게 말했다.
다연이의 말을 들으니 물어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연이도 다연이만의 인사와 이별이 필요하니까.
“그러면 가자.”
“으응···”
.
.
.
하루가 지난 다음, 우리는 다연이의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힘들지? 업어줄까?”
“아니.. 내가 거러갈래.”
“그래.”
이 길은 여전했다. 여전히 가팔랐고, 오를 때는 힘들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집이지만 전혀 그립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렵지도 않았다.
이제 그런 잡념은 들지 않는다. 지금은 오직 다연이만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길을 오르던 다연이와 나는 잠시 후, 우리가 살았던 집에 도착했다.
이 곳은 그 때 봤던 것처럼 낡고 형편 없었다.
그런 곳에 다연이의 엄마가 있을 거다.
나는 다연이에게 말했다.
“들어갈까?”
“응···”
옆에 있던 다연이가 내 손을 꽉 쥐었다.
대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