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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전에 봤을 때는 분명 화난 것처럼 보였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풀어졌다.
딱딱한 분위기도 금새 누그러졌고. 물론 그건 내가 착각한 것들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웠죠?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나서요.”
손님은 다시 옅게 웃는다.
아이들이 시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팥죽이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그랬던 거다.
“하! 이거 마싯는 거에요.”
“응, 맛있을 것 같네...”
다연이가 말하자 손님도 대답했다.
보통 손님이라면 메뉴와 다른 요리를 하고 있더라도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넘어갔을텐데 이 손님은 조금 다르다. 정말로 팥죽을 좋아해서 그런 걸까.
“파는 건.. 아닙니다. 그냥 아이들 주려고 만든 거에요.”
“아.. 네.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먹을 건 줄 몰랐어요. 정말로요.”
그러자 손님이 우울한 얼굴을 했다. 티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지만 얼굴에는 그런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게 손님이 돌아가려던 찰나, 다연이가 나에게 말했다.
“오빠, 저 아저씨한테도 조금만 주자. 마싯을 것 같아서 먹고 시픈 거자나.”
“음··· 그래, 알겠어.”
다연이가 그러고 싶다니 나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저기요.”
내가 그 손님을 부르니 손님이 뒤돌아 나를 본다.
팥죽은 팔지 않는 거라고 말했을 뿐인데 표정이 축 내려앉았다.
“네..?”
“팥죽.. 팔진 않는데 조금 드셔 보실래요? 많이 만들어서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손님의 표정이 살짝 밝아지더니 애써 그렇지 않은 척 차분한 얼굴을 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저는 그냥 팥죽을 좋아해서 물어본 거 였어요. 팔고 있는 거면 당장이라도 사려고 했거든요.”
“괜찮습니다.”
상황이 이상하긴 했다. 팔지 않는 음식을 식당에서 만든 사장과 그 음식을 돈을 내고서라도 먹고 싶은 손님.
둘 다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말을 덧붙인다.
“사장님이 워낙 요리를 잘하시잖아요. 평소에도 여기 음식 좋아하는데 제가 또 특히 팥죽을 좋아해서..”
확실히 낯이 익은 손님이었다. 얼굴도, 말투도 생각난다.
가끔 저녁을 먹으러 왔던 것이 기억났다.
“오··· 우리 오빠가 요리 잘하는 거 알고 이써요..”
“맞아, 알고 있어. 여기에 자주 왔거든.”
“나도 알 것 같아요.”
다연이와 손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작은 그릇에 적당한 양의 팥죽을 덜어준다.
우리가 먹기엔 부족하지 않을 만큼, 손님도 맛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적당히 팥죽을 퍼준 다음, 손님에게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많이는 못 드려요. 아이들도 먹어야 해서.”
그러자 손님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한데요.. 정말아이들이 먹을 건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물어보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래도 팥죽 양은 충분했다. 이 정도는 줘도 된다. 더군다나 다연이가 그러길 바랐으니 주는 편이 맞다.
손님은 내가 건네준 팥죽을 들고 연신 인사를 하면서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런 손님을 보고 있던 다연이가 말했다.
“마싯을 것 같아서 달라고 한 거야.. 마찌?”
“응.”
“오빠가 한 요리를 조아해서 달라고 한 거야···”
다연이가 중얼거리자 다른 아이가 말했다.
“우와.. 엄청 머시따..”
“나도 아저씨가 한 요리 맛있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렇게 떠드는 아이들을 놔두고 팥죽을 하나씩 그릇에 옮겨 담기 시작한다.
작은 그릇 위로 부드러운 팥죽이 천천히 채워진다. 쌀알이 묵직하게 떠 있었고, 새알심도 팥죽 위를 장식하고 있다.
“우와.. 마싯게따..”
“이게 팥죽이야..”
다연이와 친구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맞다. 이게 팥죽이다. 나도 영상이 아닌,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팥죽을 먹어본 적도 없으니까. 기대되는 건 나도 아이들과 마찬가지였다.
“오···”
내가 팥죽을 퍼담는 사이, 아이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곳은 옆 테이블이었는데 나에게서 팥죽을 받아갔던 손님이 앉아있는 자리였다.
그 손님은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팥죽을 맛있게 먹고 있을 뿐이다.
숟가락에 팥죽을 가득 담고 자기 자식을 바라보듯 귀중한 눈빛을 보내다가 한 입 크게 문다. 팥죽 먹는 모습을 보니 저 손님이 팥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엄청 마싯게 먹는다아... “
“나는 팥죽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맛있을 것 같아···”
손님은 팥죽을 좋아한다는 말이 사실인듯 먹방 방송인처럼 맛있게 팥죽을 먹었다. 심지어 다연이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나는 서둘러 팥죽을 퍼주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앉아. 이제 먹으면 돼.”
“네에.”
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수저를 든다. 그리고 먹기 시작한다.
고운 팥죽 위로 쌀알들이 떠 있다. 나는 옆에서 뒹굴고 있는 새알심 하나를 같이 숟가락에 담아서 팥죽을 가득 담는다.
팥죽만의 묵직한 향이 코끝으로 스민다. 하지만 숨을 들이마셔봐도 팥죽의 향은 계속 코끝을 맴돌기만 한다. 그러다 숨을 내뱉었을 때서야 묵직한 향이 코 안으로 들어왔다.
“냄새 좋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선 팥죽을 먹는다.
끈적한 팥과 부드럽게 넘어가는 밥알. 팥죽만의 맛도 좋지만 그 진한 향이 입 안에서 헤엄치는 것 같은 이 느낌도 좋다.
팥죽과 같이 새알심을 씹는다. 겉과 속 모두 말랑하다. 그 말은 새알심이 잘 됐다는 이야기였다. 적당한 두께로 만들었고, 팥죽과 같이 끓이면서 잘 삶아졌다.
끈적한 새알심을 씹다가 팥죽과 같이 목 뒤로 넘긴다.
“잘 만들었네.”
옆에 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이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잘 만들긴 한 모양이다. 사실 내가 먹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내가 만들고 내가 평하는 거지만.
“이거 진짜 마싯따!”
“나는 저기에 남은 것까지 전부 다 먹을 거야!”
아이들도 마음에 들었는지 쉬지 않고 팥죽을 먹어치웠다. 꼭 청소기 같기도 했다.
호로록!
그릇까지 먹어치울 기세로 먹는 모습을 보니 왜인지 조금 뿌듯하다. 내가 식당을 운영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가 있었는데 그건 당연히 내가 한 음식을 맛있는 먹을 때였다.
다연이는 늘 그랬기 때문에 요리를 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다연이 친구들까지 그런 반응을 보이니 당장 뭔가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팥죽을 먹는 아이들을 보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팥죽을 먹고 있던 손님이 얼굴에 미소를 한 가득 띄우면서 걸어왔다.
표정도 좋고, 팥죽을 담은 그릇도 싹 비워져 있는 모습이 잠깐 봐도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것 같았다. 그리고 손님은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와서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나이도 꽤 있어 보였는데 나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니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맛있게 드셨다니 감사하네요.”
“아닙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달콤한 맛에.. 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밥까지..! 옛날에 저희 할머니가 해주셨던 게 생각나네요..”
손님은 그 때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본다.
“그 때는 먹을 것도 없었던 땐데··· 그 때 먹었던 팥죽이 아직도 생각납니다아...”
감상에 젖은 손님은 눈가를 훔치는 척을 하고선 말을 잇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비슷한 맛을 찾는 게 힘들었는데 사장님이 하신 건 정말 맛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생각나네요.. 할머니···”
이 손님도 저번에 왔던 교장 선생님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누구한테나 스스럼 없이 지내는 스타일. 위아래가 모두 없는 것 같다. 말도 꽤 많은 것 같고.
그렇게 추억에 젖어 있던 손님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할머니가 가르쳐주신대로 했어요.”
“역시..! 사실 그게 아니라도 저는 예전부터 여기 자주 왔었습니다! 너무 제 입맛에 맞아요. 특히 찌개가···!”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전부 칭찬이었기에 나도 기쁘게 듣고 있었다.
손님의 칭찬을 즐겁게 듣고 있던 다연이가 손님에게 말했다.
“아저씨도 우리 오빠가 만든 요리를 좋아해요!”
“그래···! 평소에도 자주 왔었단다. 특히 일 끝내고 여기에서 김치찌개 먹을 때는···. 크으..! 그것 만큼 좋은 게 없지!”
“오··· 아저씨는 무슨 일을 해요?”
손님의 과장된 찬양에 다연이가 물었다.
“나? 경찰이야.”
“오..! 경찰 아저씨!”
“경찰 아저씨?”
그 손님의 말에 아이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경찰이라면 대단한 사람일테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놀란 다연이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 아저씨는 저기 파출소에 있는 경찰 아저씨에요?”
다연이는 우리 지역 근처에 있는 파출소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 손님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나는 거기 아닌데.”
“그러며언.. 어디에요?”
“나는 저기 경찰서. 거기 서장이야.”
“응?”
서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다연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경찰 서장이라면 꽤 높은 직급 아닌가.
다른 아이들도 잘 모르는 듯 했지만 그 경찰 서장 손님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빠는 알아?”
“...응.”
“뭐야? 머찐 거야?”
“음... 맞아.”
내가 그렇게 띄워주니 손님이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경찰 손님은 아이들과 꽤 친해지고 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휴.. 엄청 재밋는 경찰 아저씨였써.”
다연이와 아이들이 웃으면서 말했다.
할머니와 아이들은 금새 팥죽을 모두 비워냈다.
꽤 많이 만들어 놓아서 남은 팥죽이 있었는데도 그것까지 전부 해치웠다. 그리고 의자에 기대어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
“너무 마시따···”
“배가 터질 거 같아···.”
한껏 포식을 한 아이들은 퇴근하는 부모님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전부 팥죽이 맛있었다고 말했고, 그건 할머니도 마찬가지셨다.
“처음하는대도 잘 하네.”
그렇게 짧은 말만 남겼지만 진심인 걸 알 수 있었다.
식당을 나서는 할머니를 보고 다연이가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오··· 또 와..”
“그래, 또 오마.”
“안뇽···”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다연이는 그런 것처럼 슬픈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도 평소답지 않게 같이 손을 흔들어줬다.
“할머니 또 오지?”
다연이가 내게 물었다.
“응, 또 올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내리던 눈은 방금 전보다 더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
.
.
식당의 정리를 끝내고 다음 날이 됐다.
오늘도 여전히 식당 문을 여는 날이고, 다연이가 어린이집에 가야하는 날이기도 했다.
다시 어린이집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는데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어···.”
오늘은 휴원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다연이는 졸지에 직장을 잃은 사람처럼 자리에 퍼질러 앉아서 멍하니 허공만도 보고 있다.
“어린이집을 안 가다니이···”
보통의 아이라면 놀게 된 것에 더 좋아해야 할 텐데 다연이는 정반대였다.
나와 같이 집에서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린이집에 가야하는 날에는 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연이는 친구들과 노는 것도 못지 않게 좋아하니까. 게다가 인기까지 많으니 당연한 말이기도 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다연이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말한다.
“그러며언···.! 집에서 열씨미 놀아야지!”
그렇게 말하고 벌떡 일어난다. 여전히 어린이집에서 놀고 싶은 것 같았지만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다.
벌떡 일어난 다연이는 곧장 창가로 향했다. 여전히 바깥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누니 마니 온다아..!”
어제보다 훨씬 많이 내렸다. 그야말로 폭설이다.
감탄을 터뜨린 다연이가 창문을 열었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함인 듯 했다.
그 때.
“냐아앙···.”
열린 창문 틈으로 고양이가 풀썩 쓰러졌다.
우리 식당을 지키는 고양이였다.
많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