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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팥죽."
다연이는 눈에 푹 담았다 뺀 것처럼 온 몸에 눈이 묻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말까지 전부 다 들은 것 같다.
“나는 팥죽이 먼지 아라요. 나무 색이랑 보라색이랑 섞여 이찌. 그래서 색깔이 이상한 거지이.”
“무슨, 먹으면 다 똑같은 걸 색깔이 이상하다고 그러고 있어?”
다른 사람이 듣기엔 역정을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아니다. 그냥 평범한 대화일 뿐이다.
“아니··· 색깔만 이상해요··· 먹어본 적은 없지만 마싯을 거에요···”
하지만 다연이는 아직 할머니의 성격을 잘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살짝 주눅든 얼굴을 했다.
팥죽도 다연이가 먹어본 적 없는 음식 중 하나였다. 심지어 나도 먹어본 적 없는 것 같다. 팥죽 맛을 떠올릴 때 아무 맛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게 맞을 거다.
“맛있어. 너는 팥죽 먹어본 적 없냐?”
“네에···”
“너는?”
할머니가 내게 묻는다.
“저도 먹어본 적 없어요.”
그러자 다연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본다.
“나느은··· 오빠가 뭐든 다 먹어본 줄 알았는데..!”
“팥죽 빼고 다 먹어봤어.”
“오아..."
다연이가 나를 보며 감탄을 한다. 물론 진짜는 아니었지만 다연이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다연이에게 묻는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 친구들은? 놀고 있었던 거 아니야?”
“친구들 놀고 이써. 나는 그냥 들어와찌. 뭐 하는지 궁금해서.”
그리 넓지도 않은데 재밌게 놀고 있나보다. 그래도 바깥에서 노는 건 위험하니 저렇게라도 안 쪽에서 놀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그 때 할머니가 물었다.
“다른 애들도 많냐?”
“네, 몇 명 있어요.”
“그러면 걔네들까지 다 주면 되겠네. 팥은 많다. 좋은 거야.”
“네···”
팥죽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게다가 이렇게 강제로 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팥죽은 왜···”
“그냥. 먹고 싶어서. 해 봐.”
“넵.”
이유 없이 막무가내로 시키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잠자코 말을 듣기로 한다.
팥죽은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그러고 있을 때 할머니가 말했다.
“내가 도와줄테니까 그대로만 해. 손님 받는 것도 지장 없게 해줄 테니까.”
“네.”
어차피 오늘은 손님이 뜸하기도 했고, 다연이에게 새로운 음식을 먹이는 거니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와..! 그러면 이제 팥쭉 만들어 주는 거야?”
“응, 놀고 있는 친구들한테도.”
“조아, 새 요리다.”
옆에 있던 할머니가 다연이를 힐끗 보고선 말했다.
“새로운 요리가 좋냐?”
“네! 왜냐하면 오빠가 하는 건 뭐든 마싯는데 친구들은 우리 식땅에 있는 요리는 거의 다 먹어봤거든요. 그래서 친구들한테 새 요리 주면 엄청 조아할 거야.”
다연이는 내가 한 요리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
“네!”
대화를 끝낸 할머니와 다연이가 서로 멍하니 마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가서 자랑해.”
“네!”
그리고 다연이가 뒷마당 쪽으로 도도도 달려간다.
그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았다.
“자, 그럼 너는 팥죽 시작해봐.”
“네.”
사실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할머니도 뜬금없이 찾아왔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팥죽을 시작하는 것도 낯설다.
하지만 다연이 말처럼 새로운 요리이기도 하고 오늘 날씨와도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기에 색다른 기분으로 시작해본다.
“팥은 미리 불려서 왔으니까 너는 쌀부터 물에 불려놔.”
“네.”
처음부터 내게 시킬 생각이셨는지 팥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전부 준비해오셨다.
나는 그것들을 할머니의 주문에따라 열심히 만들어 나간다.
먼저 쌀을 불려 놓고 팥을 삶기 시작한다.
“처음 삶은 물은 버려. 원래 첫 물은 먹는 거 아니야.”
“네.”
처음 우려낸 팥물은 사용하면 팥죽에서 조금 쓴 맛이 난다고 한다. 이유까진 설명해주시지 않았지만 일단 계속 이어나간다.
살짝 삶아낸 팥은 첫 물을 버린 다음, 물로 한 번 헹궈 준다. 흐르는 물이 씻으니 아직은 단단한 팥알들이 뒹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그 작은 소리들이 눈 내리는 바깥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뒷 쪽에서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고 앞에서는 몇 없는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소음이 들린다.
그렇게 한 번 헹군 다음, 다시 팥알들을 삶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삶아야 한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팥알이 뭉개질 때까지 삶아야 한다는데 그렇게 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삶는 동안 새알심이나 만들고 있어.”
“네.”
새알심은 팥죽에 들어가는 동그란 반죽을 말한다. 나는 팥죽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본 적 있으니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다.
새알심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찹쌀 가루에 소금 간을 해준 다음, 물을 추가한다. 그리고 잘 뭉쳐지게 반죽을 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과정이고 늘 하던 수제비와 비슷하지만 수제비 반죽을 만들 때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반죽에서 조금 더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더 하얗다. 지금 내리는 눈처럼 새하얗지는 않지만 감촉만큼 색도 요리하고 있는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눈 색깔이다.”
어느 새 다시 온 다연이가 새심알 반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눈으로 만든 거야?”
“아니.”
그런 질문을 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할머니에게 말했다.
“나 방금 친구들한테 말하고 와써요.”
“그래.”
“...근데 할머니는 오늘 왜 우리 식땅에 와써요?”
다연이의 물음에 할머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팥죽 먹고 싶어서.”
“음··· 그럴 수 이찌. 우리 오빠는 요리를 잘하니까.”
다연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묻는다.
“근데 할머니가 머거봐도 우리 오빠가 요리 잘해서 온 거에요..? 마싯는 거 머그려고?”
“....그래, 이제 자주 못 오거든.”
“...?”
다연이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는 것 같았다.
“왜 자주 못 와? 어디 가요?”
다연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묻는다. 아마 별 거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으레 아이들이 그렇듯 다연이도 그랬다.
그리고 할머니가 말한다.
“그래, 이사간다.”
“....!”
그 말에 다연이가 어깨를 툭 떨군다. 그 때문에 어깨에 조금 쌓여있는 작은 눈덩이가 툭 떨어졌다.
“진짜..? 이사가요..?”
나도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래, 간다고. 그래서 이사가기 전에 팥죽이나 한 번 먹으러 온 거야.”
“안 돼···”
그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우울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되려 소리쳤다.
“이 놈아, 얼굴 구기지 마! 어디 멀리 가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가끔 올 거야. 어차피 원래도 많이 안 왔는데 무슨.”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의자에서 고쳐 앉는다.
“그래도···”
“어디로 이사 가세요..?”
내가 물으니 할머니가 대답한다.
“이 근처에. 아들 집으로 가는 거야. 지금 사는 곳보다는 먼데 버스 타면 금방이야.”
“진짜···? 별로 안 멀어요..?”
뒤로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데 다연이의 얼굴만 어둡다. 그래도 별로 멀지 않다는 말에 울 것 같은 얼굴에서 조금 나아졌다.
“그래, 그러니까 울지 마 이 눔아. 울면 아주 그냥··· 혼날 줄 알어.”
“안 우러..”
“어차피 이사 가고 난 뒤에도 지금처럼 올 거라고. 자주는 못 오겠지만.”
지금처럼 올 거라는 말에 다연이의 표정이 조금 더 나아진다.
이사는 가지만 이전처럼 올 거고, 먹을 것도 가끔 가지고 올 거라는 말을 몇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다연이의 얼굴이 완전히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그러니까 너는 그냥 놀고 있어. 고생하는 건 네 오빤데.”
“알게써요.. 무슨 말인지 아라. 그래서 이제 안 슬퍼.”
그렇게 말했음에도 다연이는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그런 다연이의 행동이 좋았는지 할머니도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사 간다는 소식은 나도 갑작스러웠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오늘 갑자기 이 곳에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거짓말은 하지 않았을 테니 이사를 가더라도 가끔 오긴 할 거다. 대신 다연이한테 말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동안 정이 들었을 테니까.
나는 그런 생각들을 떨치고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한다. 지금 만드는 팥죽은 특히 잘 만들어야 하니까.
뭉쳐진 새알심 반죽은 랩에 싸서 잠시 동안 숙성시킨다. 그래야 더 쫄깃하고 맛있어진다.
그러는 동안 불 위에 올려둔 팥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아직 팥죽이 되려면 멀었기 때문에 끓는 물이 가볍게 움직인다.
팥 앙금이나 쌀이 추가로 들어가면 이것보다는 훨씬 더 무겁게 끓을 거다.
“다여나! 같이 놀자!”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다연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에 다연이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할머니를 바라본다.
“왜?”
할머니의 옆에 있었던 건 다연이 나름의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그런 다연이에게 말했다.
“가서 놀아. 팥죽 다 되면 부를 테니까.”
“네에.. 알게써. 그러면.. 빨리 놀고 올게요!”
“그래.”
당당하게 말한 뒤, 다시 도도도 달려간다.
그 모습을 보니 벌써 7살인데도 아직 6살 때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연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요리에 집중한다.
새알심 반죽은 미리 만들어 놓았고, 팥물은 팔팔 끓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내가 해야 할 건.
“없어. 적당히 끓으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니까 쉬고 있던지.”
“네.”
없다. 그러면 기다리는 동안 팥죽을 끓이는 레시피나 영상 같은 걸 찾아봐야겠다.
할머니가 알려주신다곤 했지만 나도 알고 있는 편이 더 좋을 테니까. 팥죽이 다연이의 입맛에 맞으면 나중에 혼자서 또 할 수도 있고.
“흠···”
일들을 전부 끝내고 의자에 앉으니 그제야 팥의 향이 느껴졌다. 이전까지는 요리 과정에 집중하느라 의식을 못했던 것 같다.
“냄새 좋네.”
팥 냄새는 생각보다 눈과 더 잘 어울렸다.
***
한편, 다연이와 아이들은 뒷마당에서 눈을 가지고 노느라 한창이다.
“다여나..! 왜 이제 왔어?”
“할머니랑 가치 이써서. 오빠 요리하는 것도 봐꼬.”
“그러면 이제 같이 놀자!”
“그래!”
그러고 아이들이 다시 놀기 시작한다.
민우는 팔짱을 끼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다연이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더 많다. 당연하게도 민우가 바란 상황은 아니었다.
“맘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든다. 오늘 민우가 이 눈보라를 헤치면서 식당에 온 이유는 다연이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청 중요한 말이었는데, 바로 다연이에게 민우가 다니는 초등학교로 오라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다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아직 1년이란 시간이 남았지만 민우는 되도록이면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다연이와 민우가 살고 있는 곳은 초등학교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꾸준히 다연이 옆에서 우리 초등학교로 오라고 말하는 것. 이렇게 하면 아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애들은 자신의 초등학교로 오지 않았으면 했다. 특히 남자 애들.
그래서 민우는 다연이와 단 둘이 있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우아..! 재미따. 나는 조금만 쉬다가 다시 놀게!”
“응!”
기회가 생겼다.
다연이 혼자 쉬게 된 것이다. 민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연이에게 다가간다.
“다연아.”
“왜?”
민우는 침을 꼴깍 삼킨 다음, 말했다.
“다연이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1년 남았잖아.”
“응, 나도 아라.”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초등학교 갈 때, 두 군데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서 가야한대.”
“으응.”
"..."
다연이에게 말할 준비를 끝낸 민우가 입을 열었다.
“다연이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올 거지?”
“...”
그 질문에 다연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연이의 반응에 조급해진 민우가 다시 말했다.
“1년 뒤에 우리 학교로 와. 우리 학교 엄청 재밌어···! 친구들도 많고.”
“...”
다시 한 번 뜸을 들이던 다연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러.”
“왜···?”
철렁.
민우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팥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