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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누구야?”
수박이 인형탈 안에서 들려온 건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인형탈을 썼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큰 덩치여서 혹시 밥돌이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밥돌이의 목소리는 잊지 않고 있으니까.
지금 듣는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은 다연이를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는 것 같다.
“.....”
내가 그렇게 물으니 수박이는 뭐라 말도 못하고 안절부절해 하고 있었다. 말을 못한 이유는 다연이가 이제 혼잣말을 멈추고 수박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수박이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그래, 오늘은 가고 나중에 또 와.”
그러자 수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
수박이를 멍하니 보고 있던 다연이가 가는 길을 배웅해준다. 수박이가 밖으로 나서자마자 수박이의 발을 향해 고양이가 바로 달려들었지만 수박이는 들어올 때처럼 별 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식당을 나섰다.
“안뇽··· 또 와.”
끄덕.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흔든다.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사라지는 수박이. 수박이가 떠난 자리에는 손을 흔드는 다연이와 그 자리에 엎어져 있는 고양이만 있을 뿐이다.
나도 그 자리에 서서 수박이가 떠난 자리를 바라본다.
도대체 수박이는 누굴까. 그리고 왜 여기에 있었던 거지.
수박이가 떠난 뒤, 다연이에게 물어보니 수박이는 근처에서 종이를 나눠주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알바를 한다고 수박 인형탈을 입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군지 모르겠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도 없고.
덩치가 굉장히 크고, 다연이와 나를 잘 아는 사람인 것 말고는 모르겠다.
“음···”
내가 그러고 있을 때 다연이가 말했다.
“수바기는 또 오게찌?”
“응, 또 온다고 했잖아.”
사라지는 수박이를 보면서 다연이에게 말했다.
.
.
.
그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지만 다연이의 바람과는 달리 수박이는 식당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올 때 돈을 주겠다던 그 목소리의 주인도 오지 않았다. 수박이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조건 올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수바기는 안 오나 봐..”
선물까지 준다고 했었는데 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연이는 더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다연이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진짜 올지 안 올지는 나도 몰랐으니까.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기분이 풀릴만한 음식을 해주려고 한다. 바로 수제비였는데 이건 우리 식당의 새로운 메뉴이기도 했다.
“...수제비 해줄까?”
“.....응.”
내 말에 다연이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작게 대답했다.
지금은 저렇게 힘이 없어도 맛있는 걸 먹다보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원래 있었던 메뉴를 축소시켰다. 이유는 내가 감당하기 벅차도록 많은 메뉴들을 줄이면서 맛의 퀄리티에도 관심을 쏟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내가 이 식당을 혼자 이끌어간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니까 그러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지금 새 메뉴를 만드는 이유는, 많게만 느껴졌던 메뉴들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됐고 조금 더 다양한 메뉴를 시도해 볼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쫄면 같은 여름 메뉴들을 빼고 추가한 메뉴는 반응을 살펴본 다음, 인기가 없는 메뉴와 대체하면 되니까. 이렇게 하면 많이 힘을 들이지도 않고 변화를 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수제비를 새 메뉴에 넣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수제비도 사람들한테 파는 거야..?”
“응.”
다연이에게도 새 메뉴에 대해 설명해줬지만 다시 확인하고 싶은지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 수바기도 오면 이거 머거?”
“....아마도.”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수제비를 준비한다. 아직도 수박이를 기대하고 있는 다연이가 조금 안쓰럽지만 빨리 맛있는 수제비를 해주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수제비는 얼마 팔지 않을 생각이다. 애초에 우리 식당은 전문점이 아니라 분식집이기 때문에 수제비를 판다고 해도 많이 팔리지도 않을 거고. 그렇기에 반죽도 내가 직접하려고 한다.
하루 동안 팔 만큼의 반죽만 만들어 놓고 팔 거다. 공산품을 쓰는 방법도 있겠지만 당연히 직접 반죽을 만드는 편이 더 맛있기도 하고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파는 것도 아니니 직접 반죽을 떼어내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수제비를 시작하려는 때에 누군가가 식당으로 찾아왔다.
“누구세요?”
나보다 다연이가 먼저 손님에게 묻는다. 원래는 어서 오세요, 라고 해야 하는데.
“밥 먹으러 왔어.”
나는 손님을 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렸다.
바로 얼마 전, 고등학교가 방학하기 전에 다연이가 했던 요리 쇼에 왔던 학생이었다. 마지막에 결국 다연이의 김밥을 가져간 덩치가 큰 남학생.
커다란 덩치에 비해 조심스러움이 돋보인 학생이었다. 다연이의 팬이기도 했고.
학생의 손에는 뭔가가 쥐어져 있었다. 작은 종이 가방이었다.
“수바긴 줄 알았는데···”
다연이는 학생이 못 듣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학생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의자에 앉았다.
“뭐 먹을래요?”
내가 그렇게 물으니 그 학생이 나를 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오천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거, 저번에 드리겠다고 한 돈이요.”
“..?”
나는 무슨 의미인지 모른 채, 학생을 보고 있다가 문득 저번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수박이 인형탈을 쓰고 찾아왔던 그 때 일이.
“주먹밥이요.”
학생이 작게 말했다.
나는 그 때야 그 인형 속의 사람이 이 학생인 걸 깨달았다. 너무 상상할 수 없었기에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곧 이해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학생이 주먹밥을 알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다연이는 여전히 옆에서 조금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지금 옆에 앉은 학생이 수박이였다는 걸 모르니 당연했다.
“근데 왜 지금 왔어..?”
나도 다연이가 들을 수 없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하지만 학생은 나중에 말하자는 듯 손짓했다.
저 모습을 보니 못 올 수 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다연이의 우울한 얼굴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지금 나는 멍한 얼굴로 학생을 보고 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인데 그에 반해 학생의 표정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그렇게 내가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고 있을 때 학생이 종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너.. 다연이 맞지?”
이미 알고 있는데도 학생은 그렇게 물었다.
“네에..”
“혹시 저번에···”
학생은 근육질의 커다란 몸을 살짝 비틀다가 말했다.
“...수박이 본 적 있어?”
“네..”
아마 수박이라는 이름을 다 큰 학생이 꺼내는 게 조금 오글거렸던 모양이다.
이해했다.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으니까.
학생이 말을 잇는다.
“그···. 내가.. 수박이를 만났거든?”
“네..?”
그제야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런데 ...수박이가 이거 주라고 하더라.”
그렇게 말하면서 종이 가방을 내민다. 가방의 겉면에는 수박이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로고가 그러져 있었고 그 안에는 뭔가가 많이 들어있었다.
“이게 뭔데..?”
기대감에 젖은 다연이가 무의식적으로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난 일년 동안 다연이를 봐서 알고 있는데 다연이가 반말을 섞어쓰기 시작했으면 상대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거나 뭔가 몰입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수박이가 주고 싶어했던 거.”
“혹시··· 선물···?”
“응.”
“수바기..!”
다연이가 밝은 얼굴을 하고서 양 손으로 선물을 고이 받는다.
그리고 다연이가 그 안에 든 물건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꺼냈는데 그 안에는 수박이의 굿즈가 잔뜩 들어있었다. 머그컵부터 시작해서 작은 스티커까지.
학생이 직접 샀는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어있지는 않았지만 작은 물건들이 꽤 많이 있었다.
“우와아··· 이거를 수바기가 줘따니···”
다연이는 중얼거리면서 물건들을 만지작거렸다.
학생은 뿌듯한 표정으로 다연이를 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마음 같아서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옆에 다연이도 있었고 수제비를 하기 위한 준비도 한 상태였기에 빨리 음식을 해야 한다.
그 때 다연이가 물었다.
“그런데 수바기는 왜 안 와써요?”
“....수박이는 일이 생겼대. 그래서 어제도 못 온 거래.”
“음··· 그런데 왜 오빠한테 줘찌..? 오빠는 수박이랑 친해요?”
그 말에 학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일하는 곳에 온 적이 있거든.”
“..? 어디서 일해요?”
“....저어기에.. 수박이 인형이랑 그거 파는 곳.”
“아..!”
다연이는 저번에 수박이 인형을 사러 갔던 곳을 떠올린 것 같았다. 지금 다연이가 선물 받은 물건들을 파는 곳은 거기 밖에 없었으니까. 인형도 마찬가지고.
“내가 예전에 갔떤 곳!”
“음.. 거기는 아닐 거야. 얼마 전에 여기 근처에도 그 가게가 생겼거든.”
“오..!”
다연이와 학생을 말을 듣고 있으니 대강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학생이 수박이의 옷을 입고 가게 홍보지를 나눠줬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연이와 만나게 된 거고.
그런데도도 왜 이틀 뒤에야 찾아왔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수박이 인형탈을 쓰지도 않고.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다연이가 말했다.
“그래서 수바기가 왔던 거구나!”
“응.”
다연이가 설레는 얼굴로 학생에게 받은 선물을 열심히 정리하고 옆에 놓아둔다.
그리고 학생에게 말했다.
“그러면 오빠도 수바기 친구인 거에요?”
“.....응, 그렇지.”
다연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양심에 찔리는 듯 학생이 조용하게 말했다.
“조아!”
다연이가 그 말을 하니 학생은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이제 선물 증정식이 끝났으니 정말로 요리를 해야할 때다. 이왕 하는 김에 이 학생한테도 수제비를 대접해 봐야겠다.
아직 수제비는 메뉴판에 정식으로 올린 음식은 아니지만 맛 평가도 해볼 겸,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 때 다연이가 말했다.
“오빠.”
“응?”
학생이 대답하자 다연이가 말했다.
“아니, 오빠 말고 우리 오빠.”
“응, 왜.”
“이 오빠한테도 수제비 만드러 주자. 수바기 대신 와짜나.”
다연이가 부탁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학생에게 꼭 수제비를 주고 싶어하는 눈빛이다.
다연이는 어제 내가 만든 수제비를 미리 먹어봤으니 맛이 어떤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 만들어 줄게.”
“조아!”
“....그래도 될까요?”
학생은 다연이와 이야기할 때랑 다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협을 한다거나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응.”
맛 평가를 해줄 사람이 늘면 나도 좋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내가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려 하고 있을 때 다연이가 학생에게 말했다.
“우리 오빠는 요리 잘하는데. 먹어본 적 이써요?”
“응, 자주 왔어.”
“우오···. 차칸 사라미네..”
다연이가 작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무슨 요리 먹어봐써요?”
지금 다연이는 평소보다 조금 더 흥분한 상태였다. 잊은 줄 알았던 수박이의 선물도 왔고, 새 메뉴인 수제비도 먹게 될 테니까.
목소리에 기대감도 서려 있었는데, 초롱초롱한 눈으로 학생에게 묻고 있었다.
학생은 다연이의 눈빛에 이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김밥이랑.. 제육덮밥이랑··· 아, 그리고 저번에 다연이가 만든 김밥도 먹었다.”
“오..! 이제 기억 난드아! 내가 김빱 만드러서 준 오빠구나?”
“응.”
그러자 다연이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다연이를 보고 학생도 조금씩 흥이 나는지 말을 잇는다.
“그리고 어묵도 먹었고, 김치찌개도 먹었지..!”
“그리고 또?”
“또.. 얼마 전에 주먹밥도 먹었는데! 참치 마요 들어있는 거!”
학생이 그 말을 하자 다연이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눈을 질끈 감는다.
오직 학생만이 뭐가 잘못됐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다연이가 입을 연다.
“주먹빱···. 주먹빱은 수바기만 먹었는데?”
그제야 자신의 잘못이 뭔지 깨달은 학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쏙 빠졌다.
배고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