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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 훅.."
다연이가 숨을 거칠게 내쉰다.
분명 저기에 있는 건 수박이였다.
팔다리가 아주 조금 길긴 하지만 분명히 수박이가 맞다. 동그란 수박이 아닌 조각낸 몸통과 중간중간 있는 검은 씨로 봤을 때 분명히 저건 수박이였다.
어설프게 흉내낸 다른 캐릭터가 아니다.
“수바기를··· 진짜로 보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연이는 수박이를 굉장히 좋아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건 수박이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당연한 이유였다. 다연이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티비 속 애니메이션 세상과 현실은 구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다연이의 눈앞에 수박이가 진짜로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다연이는 수박이에게 가고 싶었다. 가서 수박이의 팬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수박이는 아직 다연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가면 안 되는 거야···”
그럼에도 다연이는 예전에 길을 잃어버릴 뻔 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에 수박이에게 가지 않았다. 이제 7살이니까 그 정도 쯤은 이미 알고 있다. 철없던 6살 적의 다연이가 아니었다.
“그 때는 그래찌..”
지난 날을 떠올리며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다연이는 수박이에게 가지 않기로 했다.
“....”
다연이는 아무 말없이 수박이가 있는 곳을 다시 바라본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궁금하기는 했다.
도대체 왜 저기에 수박이가 있는 거고, 또 왜 저 종이를 나눠주고 있는 건지. 애벌레랑 싸우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다시 수박이를 힐끗 훔쳐본다. 여전히 종이를 열심히 나눠주고 있다.
솔직히 지금 다연이는 수박이한테 가고 싶다. 그것도 엄청 많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고민하던 다연이는 곧 결심했다. 오빠한테 물어보기로.
“훅··· 후욱..”
수박이 캐릭터에 심취한 채, 숨을 몰아쉬며 창문 너머로 오빠를 본다.
‘왜?’
입모양을 보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연이가 오빠에게 설명해주기 전에 습관처럼 고개를 돌려 수박이가 있는 곳을 바라봤을 때.
“어..?”
수박이도 먼 곳에서 다연이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눈이 마주치고 있다. 설마 수박이가 다연이를 알아본 건가. 아니면 다연이가 아니라 다른 걸 보고 있는 걸까.
어느 새 다연이는 오빠에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잊어버린 채 넋놓고 수박이를 본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수박이가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 온다..! 수바기가 온다아!"
그렇게 외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빠는 다연이가 왜 저러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잠자코 지켜보기로 한다.
"수바기가 나한테 온다아..!"
다연이가 그렇게 외치자 옆에 있던 고양이도 덩달아 긴장한다.
고양이는 생각했다. 지금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저건 이상하다고.
분명히 먹을 것처럼 생겼는데 팔다리가 달려있다. 그것도 사람처럼.
저건 먹는 거다. 먹어서 해치워야 하는 거다.
“수바기..!”
고양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박이는 다연이의 앞까지 걸어왔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종이는 다 나눠준 모양이다.
“야앙!”
그 때 고양이가 수박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수박이를 먹어치우기 위해 오른쪽 발을 물었다.
“야야양양!”
고양이가 수박이의 발을 물었지만 수박이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오..! 수바기다..!”
다연이가 그렇게 말하자 수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박이가 저렇게 고개를 끄덕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박이도 다연이를 알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 수박이도 다연이를 가만히 보고 있다. 꼭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것 같다.
“수바기는 말 못해..?”
다연이가 그렇게 물으니 수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티비 속 수박이는 말을 잘 했었는데. 밖으로 나오면 조금 달라지는 모양이다.
왜 말을 못하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거겠지.
“....”
그렇게 수박이가 한참을 말없이 가만 서 있는다. 뭔가 우물쭈물 거리는 것 같았기도 했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연이는 저 수박이가 뭘 원하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오랫동안 수박이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즐겨봤기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수박이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믿은 다연이가 수박이에게 말했다.
“수바기는 나랑 친해지고 싶구나..?”
다연이가 느낀 건 이것이었다. 이렇게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수박이를 보니 자기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수박이.
“휴··· 나도 수바기 좋아하는데 수바기도 나를 조아하는구나..”
그 사실에 안심한 다연이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몸을 꿈틀거리는 수박이.
다연이는 그런 수박이를 보고 뭔가를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박이의 손을 잡았다.
“...?”
왜 그러냐는 얼굴로 다연이를 보는 수박이. 당연히 다연이는 수박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연이는 수박이의 열렬한 팬이니 이 정도 의사소통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
“내가 마싯는 거 줄게.”
수박이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고, 고양이도 처음처럼 수박이의 오른발을 물고 있었다.
다연이가 말을 잇는다.
“드러가자. 우리 오빠가 마싯는 거 줄 거야..!”
그 말에 수박이는 어쩔 수 없이 다연이 뒤를 따라간다.
수박이의 발을 물고 있던 고양이는 그제야 물고 있던 입을 뗀다.
“야앙.”
혼자 남은 고양이가 입맛을 다셨다. 분명 맛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고양이는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털썩.
고양이는 그 자리에 엎어졌다.
아마 고양이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배고프다고 말했을 것이다.
저번에 식당의 주인 남자가 해줬던 간식은 맛있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그 때부터 이 식당에 머무를 거라고 다짐했었다. 담백한 닭가슴살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얼마만에 먹었던 고기였나. 거기다 고기와 섞여 있는 뭔가도 맛있었다.
물론 저 꼬마 애의 손길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 그래도 남자와 꼬마가 만들어준 고기가 더 절실하게 생각났다.
분명 그 때 식당 영역을 넘보는 다른 고양이로부터 이 곳을 지켰을 때 잘했다고 고기를 줬었다.
“야옹..”
고양이는 그 때의 생각을 하면서 자리를 지킨다.
여기를 잘 지키면 이번에도 맛있는 걸 주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
고양이를 만지러 밖으로 나간 다연이가 이상한 걸 주워왔다.
“쨘..! 내가 수바기를 데려와써.”
다연이가 주워온 건 티비에 나오는 수박이였는데 티비 속 수박이보다 몇 배는 더 커보인다.
다연이의 말에 수박이가 멋쩍게 손을 흔든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연이에게 말했다.
“다연아, 밖에서 아무거나 주워오면 안 돼. 그리고··· 수박이는 다른 일해야 하는데 다연이가 데리고 오면 일 못하잖아.”
“.....진짜?”
다연이가 그렇게 말하면서 수박이를 바라본다. 그러자 수박이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수바기가 아니라는데..!”
“음···”
수박이를 보니 진심인 것 같다. 지금 보니 말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왜 여기까지 온 걸까.
“....”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일단 수박이의 행동만 봤을 땐 다연이를 되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다연이에게 말했다.
“수박이는 왜 데리고 왔어?”
“마싯는 거 주려고···! 오빠는 요리 잘하자나!”
다연이가 그렇게 말하자 수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지.
나 혼자 이 상황이 이해 안 되는 것 같아서 다연이가 아닌 수박이에게 물었다.
“맛있는 거 줘도 먹을 수 있어요?”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다연이와 나를 빤히 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박이.
“빨리 줘..!”
“...그래.”
다연이가 맛있는 걸 주고 싶어 하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연이와 수박이 모두 내가 한 음식이 맛있다고 굳게 믿는 것 같으니까.
후보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 식당에서 흔히 팔고 있는 김밥이고 나머지는 주먹밥이다. 내가 굳이 선택지로 주먹밥을 둔 이유는 하나였다. 오늘 다연이의 간식으로 주먹밥을 만드려고 했으니까. 그렇기에 재료가 있었다.
게다가 만들기도, 먹기도 쉽다. 수박이 같은 경우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고 포장할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다. 여기에선 먹을 수가 없으니까. 탈을 벗는 순간 다연이가 실망할 거다.
내가 그렇게 물으니 수박이가 다연이에게 이리저리 손짓을 한다.
나는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다연이는 모두 알겠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수박이의 말을 듣는다.
“뭐래?”
“수바기는 주먹밥이 먹고 싶대. 김빱은 엄청 많이 먹어서 주먹밥이 먹고 시픈 거야.”
저 말을 어떻게 이해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연이하고는 의사소통이 돼서 다행이다.
나는 곧바로 주먹밥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오늘 다연이에게 만들어주려고 했던 주먹밥은 흔하디 흔한 참치 마요 주먹밥이었다. 밥 속에 참치와 마요네즈를 섞은 속재료가 들어가는 음식이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참치 특유의 맛과 몸에 나쁠 것 같이 중독적인 마요네즈는 궁합이 아주 좋다.
게다가 간단하게 먹는 데에도 이만한 게 없고.
물론 김밥도 간단하게 먹기 좋은 건 사실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마요네즈와 참치의 조합처럼 자극적인 맛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먹밥을 선택한 거라고 생각했다.
“음···”
탐정 놀이는 그만하기로 하고 우선 주먹밥을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먼저 밥에 간부터 하기로 한다. 흰 밥을 그릇에 적당히 담고 소금과 참기름을 써서 간을 해준다.
원래 밥은 적당히 소금 간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꽤 맛있어진다. 소금의 힘이 그만큼 크다.
이어서 참기름을 뿌리자마자 진하고 향긋한 향이 올라온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게 만드는 진득한 향.
“흠···”
다연이도 참기름의 향이 좋은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수박이는 그런 다연이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꼭 열렬한 팬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이다.
존경과 경외, 보호해주고 싶다는 마음까지 곁들인 것 같은 복합적인 눈빛.
우선 나는 이어서 주먹밥을 진행한다.
간을 마친 밥은 열심히 비벼주고, 밥이 완성되면 속재료를 준비한다.
속재료는 참치 마요네즈. 기름기를 쏙 뺀 참치를 마요네즈와 함께 섞는다.
짭짤한 참치와 느끼하게 중독적인 마요네즈. 솔직히 마요네즈가 들어간 음식 중에 맛없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자극적이기도 하고, 묘하게 중독성도 있다.
그 맛있는 두 가지가 섞였으니 지금 만들고 있는 참요 마요 주먹밥의 맛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만큼 좋아할 거다.
“오··· 마싯겠다··· 수바기도 그렇치?”
끄덕끄덕.
누가보면 둘이 처음부터 아는 사이인줄 알겠다. 그만큼 수박이도 다연이를 대하는데 팬심 섞인 조심스러움은 있을지언정 불편함은 없어보인다.
이제 남은 건 잘 만든 밥 속에 속재료를 넣어서 주먹밥을 만드는 일 뿐이다.
나는 위생 장갑을 끼고 밥을 충분하게 퍼서 손 위에 담는다. 손 안 가득 들어오는 밥. 그 속에 참치 마요를 넣는다.
꾸덕꾸덕하게 잘 섞인 참치 마요. 한 숟가락 가득 퍼 담으니 숟가락에 매달려 있던 참치 마요의 일부가 끈적하게 툭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입맛이 돋구어 지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한 입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늘 그렇듯 손님의 음식이 최우선인 법. 나는 이어서 요리를 마무리한다.
밥 한가운데를 동그랗게 파고, 참치 마요를 가득 퍼서 그 안에 넣는다. 그리고 나머지 밥으로 동그랗게 말아준다.
스윽. 슥.
손에 낀 위생 장갑이 구겨지는 소리와 밥이 동그랗게 말리는 아주 작고 끈적한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나는 입 안에 고이는 침을 넘기면서 주먹밥을 완성시킨다.
주먹밥 세 개를 빠르게 완성시키고 잘 포장해서 수박이에게 넘겨준다.
“우와···! 수바기는 엄청 마싯는 주먹밥을 바다써. 마시게따···”
다연이의 몫도 준비되어 있고,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다연이는 넋이 나간 눈으로 주먹밥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그런 다연이의 눈빛을 알아차린 수박이가 자기 몫의 주먹밥 하나를 다연이에게 건네준다.
“수바기··· 이거 나한테 줘도 돼..?”
그러자 격하게 끄덕이는 수박이. 다연이가 다시 말했다.
“아니야, 나는 괜차나. 수바기꺼 뺏어 머그면 안 되는 거야. 그거는 안 돼.”
단호한 다연이의 말에도 수박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연이 손에 주먹밥을 쥐어준다.
나는 괜찮으니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수바기는 괜찮다고? 그래서 내가 머그면 된다고?”
끄덕끄덕.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다연이가 주먹밥을 받는다.
“고마워, 수바기.”
그 말을 듣고 난 뒤, 수박이는 다연이에게 손짓, 발짓을 써가며 한참을 뭐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다연이와 수박이 사이에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가더니 다연이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 가지고 시픈 거 없냐고 무러봐써..?”
끄덕.
도대체 어떻게 알아듣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아들으니 다행이다.
감격스런 표정을 짓는 다연이는 한참 또 수박이와 괜찮다, 고마워 같은 말을 하더니 대답했다.
“나느은···! 수바기가 그려져 있는 거면 뭐든 조아! 수바기 스티커도 조코··· 수바기 인형이는 너무 만코···. 그래도 다 조아!”
그 말에 수박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선물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우와···. 너무 고마워. 수바기···!”
이리저리 움직이는 수박이의 행동을 다연이가 다시 번역했다.
“마싯는 밥 줘서 그러타고?”
끄덕.
그러더니 다연이가 완전히 감격스런 얼굴을 했다.
“우와··· 수바기랑 친구도 됐는데 내가 가지고 시픈 거도 준다고 해써··· 그러면 또 온다는 말이자나···!”
그렇게 다연이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수박이가 나를 멍하니 노려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왜···?”
내가 그렇게 말하니 수박이가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 아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돈은 나중에 다연이 선물 줄 때 같이 드릴게요···”
남자 목소리였다. 아주 작아서 다연이는 듣지 못하는 소리였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 놀란 얼굴을 했다.
“....?”
나는 멍한 얼굴로 수박이를 바라봤다.
대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