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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이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아이들의 환호를 즐긴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아이들을 바라본 다음,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라줘.”
“응.”
일단 김밥을 자르기 전에 아까 말한대로 참기름과 참깨를 약간 얹기로 한다.
살짝 거칠게 느껴지는 김밥 위에 참기름을 바르자 반들거리며 윤이 난다. 그리고 그 위로 참깨를 뿌려준다.
평소보다 더 신경써서 마무리한다. 원래라면 굳이 참깨까지 뿌릴 필요는 없지만 지금은 평소랑 다르니까. 다연이도 기대감에 젖은 눈으로 보고 있었고 다연이를 구경하러 온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잘라보자.”
“알겠어.”
옆에서 아닌 듯 재촉하는 다연이의 말에 김밥을 자르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내가 파는 김밥보다는 많이 작다. 오히려 다연이 친구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아무래도 다연이 손이 작은 만큼 김밥도 작아진 듯 했지만 어차피 팔 건 아니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다. 그리고 구경 중인 아이들도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슥.
작긴 하지만 다연이가 꼼꼼히 말았던 건 아니라서 썰기 쉽진 않았다.
흐물흐물해서 칼이 잘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연이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기에 최선을 다해서 썬다.
슬금슬금 썰려 나가는 김밥. 안에는 시금치와 당근이 작게 들어가 있고 햄은 두 개가 있다.
자른 단면을 확인해본다.
이상하다. 원래 김밥이라면 속재료들의 색깔이 내는 조화가 시선을 잡아끌기 마련인데 다연이가 만든 김밥에는 그런 조화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햄 두 개가 부족한 시금치와 당근의 자리를 채워넣고 있을 뿐이다.
“잘 만들어찌?”
“응.”
다연이의 친구들이 있다면 아주 좋아할 만한 김밥인 것 같다.
나는 그 김밥을 얇게 썰어낸다. 손님들에게 팔 때보다 더 얇게, 하지만 과하지는 않을 만큼 썬다.
상황을 보니 구경하러 온 학생들도 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부 썰고 접시 위로 올려 담고 나니 다연이가 와서 물었다.
“나, 이거 사진으로 찍어도 돼? 일기장에 올리고 싶따.”
“응, 그래도 돼.”
다연이가 김밥 사진을 찍고 있으니 구경하던 학생들도 모두 조용해졌다. 마치 다연이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고 싶어하는 것 같다.
찰칵 하는 휴대폰 소리가 들리고 나에게 휴대폰을 다시 넘겨주자 아이들은 그제야 입에 머금고 있던 말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다연아, 나 김밥 하나만 주면 안 돼?”
그런 말들이 쏟아지자 다연이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접시 위에 썰어놓은 김밥은 8조각 있다. 김밥도 완성시켰고 사진도 찍어놨다. 이제 남은 건 먹어 줄 사람 뿐이었다.
다연이는 미소를 잔뜩 머금으며 말했다.
“이거 먹고 시퍼?”
“응!”
다연이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거만했고 자랑스러움도 묻어 있었다. 어렵게 완성한 김밥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 모양이다.
다연이가 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근데 오빠가 먼저 먹기로 했으니까 조금 기다려요.”
약간의 탄식이 쏟아져 나왔지만 별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여기에 모인 아이들도 어차피 다연이가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빠는 이거 먹어봐. 이거.”
의자 위에 올라선 다연이가 김밥 하나를 가리킨다.
별 건 아니었지만 특별히 잘 만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다연이의 말대로 김밥 하나를 입에 물었다.
다른 속재료들이 조금 있는 대신 햄이 많이 든 김밥. 맛은 생각보다 괜찮다. 그게 아니면 최근 들어 다연이와 입맛이 비슷해져서 그런 건가.
“마싯찌?”
다연이는 당연한 말인 것처럼 물었다. 진짜 맛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거라기 보단 그냥 그렇게 말하라는 것 같다.
“응, 맛있네.”
다연이는 당연한 말인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입 안에 든 김밥을 마저 삼킨다.
평소에 먹던 김밥과 비교하면 조금 이상한 맛이다. 채소들은 씹히지 않고 말랑한 햄 맛만 난다. 그냥 밥에다 햄을 올려 먹는 것 같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제 언니랑 오빠들 줄게!”
“응!”
다연이가 접시를 들어서 앞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김밥 꼬투리를 집어서 하나 먹는다.
“오..! 마시따. 맛있는 맛이야.”
다연이도 자기가 만든 김밥이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달콤하고, 고기가 많이 들어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6조각. 나는 다연이가 어떤 방식으로 나눠 줄지 궁금해 하면서 의자에 앉아 다연이를 지켜본다.
“이거는 엄청 맛있는 거야.”
손에 든 김밥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혼자 설명을 이어나간다.
“내가 햄을 두 개나 넣었어. 그러면 두 개로 마시써지지.”
다연이가 접시를 손에 든 채 천천히 걸어나왔고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다연이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긴다.
“근데 이거, 예나 언니랑 민혜 언니랑.. 이 언니들이 먼저 먹어야 해. 왜냐하면 내 언니기 때문이지.”
다연이는 살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호하게도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예나와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이거 먹어. 내가 한 거야.”
“고마워!”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난 뒤에야 다연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적막하다. 겨울의 문턱에선 해도 빠르게 지기에 하늘은 벌써 짙은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지고 있음에도 식당에는 아직 다른 학생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연이는 그 적막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에 서 있었다.
물론 그 날카로운 시선은 오롯이 다연이가 들고 서 있는 김밥을 향해 있다. 그만큼 다연이의 김밥은 귀중한 보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놓칠 것 같은 보물처럼.
“음···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잘 모르게써. 어떤 언니랑 오빠한테 줘야 할지. 이제 두 개 밖에 안 남았는데···”
다연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다연이의 선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고요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예나와 친구들은 그 장면을 드라마를 보듯 지켜본다.
그 때 누군가가 말했다.
“나! 나한테 줘! 대신 이거 줄게.”
덩치가 크고 살짝 험악하게 생긴 남자 학생이었는데 한 손으로 뭔가를 내밀면서 말했다.
다연이는 놀란 눈으로 학생을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이 건네준 걸 받는다.
“이게 뭐에요..?”
“물고기 모양 캔디!”
남자 학생은 커다란 덩치와는 맞지 않게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연이도 처음엔 살짝 놀란 듯 했지만 곧 진정하고 학생이 준 캔디를 받는다.
“오··· 물고기다···”
다연이가 받은 건 학생의 말처럼 물고기 모양을 한 캔디였다.
험악하게 생긴 학생의 외모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별 다른 상관은 없었다. 특히 저 밝은 얼굴을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이거 내가 해외 배송해서 산 거야! 너 주려고!”
“오···”
다연이도 그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학생 주변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그런 학생의 모습이 익숙한지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친분이 없는 것 같은 몇몇 아이들만 다연이보다 더 놀란 듯 힐끗 거렸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남학생은 원래 다연이의 팬인가 보다.
“해외 배송이 뭔지 몰라요.. 그래도 엄청 멋있는 것 같아.”
“해외 배송은 엄청 힘든 거야!”
학생은 자기가 고생했다는 걸 어필하듯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연이는 캔디가 담긴 통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결심한 듯 손에 쥔 접시를 남자 학생에게 내민다.
“이거 다 먹어. 해외는 엄청 힘든 거니까 이거 다 먹어도 돼요.”
“오···!”
다연이에게서 접시를 받아든 학생이 뭔가 대단한 유물이라도 바라보듯 두 손으로 접시를 떠받든다. 커다란 덩치에 저렇게 작은 접시를 두 손으로 들고 있으니 낯설게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다연이 줄 거 가지고 올 걸!”
"아.. 나는 다연이 주려고 사탕 사 놨는데."
주변에서는 다른 아이들의 아쉬움 섞인 목소리가 들리고 다연이는그제야 후련해진 듯 숨을 훅, 쉬며 다시 돌아왔다.
“후··· 나 이거 받아써.”
다연이는 주머니에서 물고기 모양 캔디를 꺼내들었다.
캔디를 담고 있는 통도 물고기 모양이었는데 안에 들어있는 캔디도 물고기 모양이다. 다연이가 좋아할 만 하다.
“그런데 다연이가 물고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대?”
내가 물으니 다연이에게 김밥을 받았던 남학생이 말했다.
“다연이는 유명하니까요! 그거 모르는 애는 없을 걸요.”
그랬나. 하긴 지금 같이 학생들이 몰려온 것만 봐도 그런 것 같다.
거기다 저 남학생은 특히나 더 팬인 것 같고.
“물고기 말고도 참새랑 고양이도 좋아하는 걸 알지.”
“우와···.!”
남학생의 말에 다연이도 놀란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와, 오빠는 매일 내 일기장을 보구나..!”
“응!”
저렇게 발랄하게 말하는 걸보니 큰 덩치와 더 안 어울리는 것 같다. 게다가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운동을 하는 것처럼 탄탄해 보인다. 그럼에도 다연이 또래처럼 좋아하는 걸 보니 많이 낯설다.
“오··· 나 이거 오늘도 일기장에 올릴 거에요. 다른 언니랑 오빠는 다음에 김밥 또 해 줄게!”
“응..”
다른 학생들은 다연이의 말에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팬의 입장에서 다연이의 선물을 받지 못한 거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식당에 자주 오면 내가 만들고 있을 수도 이찌! 아닐 수도 이찌만.”
“우와.. 정말?”
“응!”
본의 아니게 또 다연이에게 식당 홍보를 맡긴 셈이 됐다. 학생들은 그런 다연이의 말에 격하게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오늘 학생들은 다연이의 꿈이 요리사라는 걸 들었다. 그렇기에 정말 다연이 말처럼 종종 이렇게 김밥을 만들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할 거다. 그래서 그런지 더 기대감에 젖어 있는 눈빛이었다.
“그러면 방학 때도 자주 올게! 그 때는 다연이가 만든 김밥 줄 거지?”
“네! 나는 요리사니까! 손님들한테 김빱을 줄 거지!”
다연이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학생들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우리 식당에 왔던 학생들은 그대로 저녁까지 먹은 후에 식당 밖으로 나섰다. 갈 때는 모두 하나 같이 방학에도 자주 온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해야만 다연이가 김밥을 만들어 줄 것처럼.
마지막으로 남은 손님은 다연이에게 김밥을 선물 받았던 덩치 좋은 남학생이었다.
“오빠는 내 김밥 맛있었어요?”
학생이 나가려고 하던 찰나 다연이가 물었다.
“응, 당연히 맛있었지. 다음에도 또 먹으러 올게.”
“오···”
다연이는 그 대답에 만족한 듯 미소 짓는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는 엄청 머싯는 요리사가 될 거니까요! 그래서 오늘 했던 김밥도 맛있었던 거지!”
“그래, 맞아.”
왠지 저 남학생이 오늘 이후로 우리 식당에 자주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뇽, 또 와요.”
“안녕!”
다연이는 마지막으로 식당을 나서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허리에 양 손으로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후··· 나는 진짜 요리사가 될 거 같아. 오늘 손님들이 내 김밥 먹고 싶어서 하나만 주세요, 이렇게 말했잖아.”
“응, 오빠 생각도 그래.”
정말 다연이 말처럼 나중에 요리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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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주말이 됐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크리스마스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래도 아직 선물을 준비할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번 주말은 평소처럼 장사를 하기로 했다.
늘 그랬듯 예나가 알바를 하기 위해 왔고, 다연이는 옷을 따뜻하게 입고 식당에 서 있다.
지금은 손님이 드문 오전이다. 다연이가 조용한 홀을 걸어서 식당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밖을 본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눈은 뭔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충분히 탐색을 마친 다연이가 천천히 입을 연다.
“야옹야옹.”
큰 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