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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돼.."
나는 비장한 표정의 다연이에게 말했다.
조금 힘들더라도 내가 하면 되니까.
"시러! 내가 할 거니까 오빠는 누워있으면 돼."
자신있게 말한 다연이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인형을 손에 쥔 채, 다시 나온다.
"이거는 수박이야. 내가 없는 동안 수박이가 오빠 옆에 있을 거야."
다연이는 인형을 마치 부적처럼 내 머리 옆에 놓아둔다.
"오빠는 여기 가만히 있어야 돼. 내가 다 할 거니까."
"위험한 건 안 돼."
"위험한 건 안 할 거야."
자신있게 대답한 다연이가 내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방으로 쪼르르 사라진다.
뭘 할 건지 모르겠다. 혹시 휴대폰으로 음식 레시피 같은 걸 검색하려나.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다연이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걱정이 된다.
"괜히 아파서."
나답지 않게 혼잣말을 하고 있으니 다연이가 내 얼굴 옆에 놓아둔 수박 인형이 뒤로 넘어가서 내 얼굴을 덮는다.
"하.."
인형을 치울 힘도 없어서 가만히 다연이를 기다린다.
빨리 와.
***
"큰일이야."
큰일이라면 당연히 오빠가 아픈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오빠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왔다.
레시피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왜냐하면 다연이는 한글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다연이를 도와줄 누군가를 부르는 일이었다.
밥을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다연이는 어떻게 밥을 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잠깐 고민해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원래 오늘 식당에 일하러 왔어야 하는 사람.
“예나 언니한테 말해야지.”
그리고 휴대폰을 켠다.
모르는 한글을 차근차근 떠올리면서 간신히 전화번호를 찾았다.
저번에 공부했던 한글 책을 가져와서 비교하며 알아냈다. 확실히 언니의 이름이 적힌 번호다.
다연이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이 번호가 진짜 예나 언니의 번호일지 걱정되는 마음 반, 언니가 와 줄지 하는 마음 반이었다.
아마 맞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애초에 오빠 휴대폰에는 연락처가 거의 없었으니까.
많은 글자들 중에서 '예'라고 적힌 글자를 한글 책과 비교하면서 찾기만 하면 된다.
뚜르르.
신호음이 들리고 전화를 받는다.
"언니, 나 다연이야."
"오..! 다연아, 무슨 일이야?"
다연이는 지금 자기가 전화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오빠가 아프고, 그래서 밥을 해주고 싶은데 다연이는 못한다고.
결국은 도와달라는 이야기였다.
"도와줄 수 있어?"
"음··· 그래. 원래 오늘 일해야 하는 날이니까. 얼른 갈게."
"고마워! 내가 나중에 물고기 하나 더 접어줄게."
"큭큭, 그래."
전화가 끊겼다.
"휴.. 언니가 온다고 해서 다행이야. 안 온다고 했으면 선생님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다연이는 선생님도 좋지만 요리를 잘 도와줄 것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번에 선생님이 해줬던 잡채가 맛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좋은 것과 요리를 못한다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아주 큰 차이.
그래서 언니에게 전화한 것이다.
다연이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오빠가 뭐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여전히 누워있다. 옆에 놓은 수박이 인형을 얼굴에 덮은 채로.
자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안 자고 있는 것 같아.”
인형을 얼굴에 덮고만 있는 것 같다. 눈은 뜬 채로.
오빠를 불러 볼까 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나중에 밥이 완성되면 그 때 깨울 것이다.
조금 있으면 예나 언니가 올 테니지만 그 때까지 해야할 일이 있었다.
바로 오빠에게 줄 점심으로 무슨 음식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음··· 마싯는 건 엄청 많은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플 때는 뭘 먹어야 할까. 그냥 맛잇는 것만 먹으면 안 될 텐데.
그래서 다연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뭘 먹어야 될지. 그 때 다연이의 기억 속에서 애니메이션의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오오.. 생각난다아···”
그 때 문득 머릿속에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이 먹던 음식이 생각난다. 과일이들이 아팠을 때 먹었던 음식.
바로 죽이었다.
“그래, 죽이야!”
그걸 먹으면 될 것 같다. 과일이들도 먹었으니 오빠가 먹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니 오면 죽 할거라고 해야지.”
물론 처음의 다짐처럼 음식은 다연이가 할 것이다. 언니가 도와주고 다연이는 죽을 만들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완벽하다.
“완벽해..”
밥은 정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쉴 수 있는 건 아니다.
평소에 오빠가 하던 일들을 이제는 다연이가 해야 한다. 청소 같은 걸 말이다.
“혼자는 무서우니까 수박이랑 같이 가야지.”
다연이가 오빠의 얼굴에 덮여 있던 수박 인형을 들었다. 혹시나 자고 있을까 천천히 든다.
“흠···”
다연이의 예상대로 자고 있다. 일어날 때까지 빨리 움직여야겠다.
.
.
.
“쉿. 조용히 해야해.”
“왜?”
“오빠가 자고 있거든.”
예나가 왔고 자고 있는 오빠 대신 다연이가 문을 열었다.
오빠가 깨어 있었다면 다연이에게 혼자 가면 안 된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자고 있다. 그리고 다연이도 간호를 위해 그런 거니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밥은 뭐 할 거야?”
“죽! 아프면 그거 먹어야 돼.”
잠시 생각하던 예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저씨의 상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뭘 해야 할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래도 죽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연이 진짜 똑똑하네.”
“후후, 나도 알고 있어.”
진심으로 다연이도 알고 있었다. 다연이가 똑똑하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오빠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다연이와 예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오빠는 자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빨리 죽 만들자.”
“그래.”
예나는 레시피를 보면서 재료를 준비했고 다연이는 요리를 하기 위해서 딛고 올라설 의자를 가지고 온다.
흰죽의 레시피는 간단하다. 준비한 쌀에 물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가끔 저어주면 완성이다.
다연이는 이렇게 간단한 음식인지도 모른 채 눈을 반짝거리면서 예나를 보고 있었다.
열심히 할 생각인지 소매까지 걷어 붙인 채, 의자 위에 서 있다.
“나, 뭐 하면 돼?"
"어··· 응원..?"
"응원? 나는 요리하고 싶은데.."
잠시 고민하던 예나가 말했다.
"그러면 다연이도 시켜줄 테니까 요리하는 동안 언니 말 잘 들어야 돼."
"알겠어!"
사실 별 다른 생각은 없었지만 다연이를 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우선은 시작해본다.
우선 깔끔하게 씻은 쌀을 냄비에 담는다.
예나도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다연이를 포함한 세 명분의 몫을 준비한다.
촤르르.
깨끗한 쌀이 냄비를 채운다.
언제 봐도 이 자그마한 쌀이 밥으로 바뀐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것만으로도 세 명이서 먹을 수 있다니.
괜히 농부 분들이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언니도 쌀이 신기하지? 나도야. 이거 나중에 엄청엄청 많은 밥이 되자나."
"맞아. 나도 신기했어."
예나는 다시 다연이가 똑똑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요리를 이어나간다.
냄비에 쌀을 담았으면 그 다음은 물이다. 일반적으로 밥을 지을 때보다는 물을 훨씬 많이 넣는다.
우리는 밥을 만드는 게 아니라 죽을 만드는 거니까.
냄비 가득 차오른 물은 불투명한 흰색을 띠고 있다.
"이제 이대로 끓이기만 하면 된대."
"오··· 그러쿠나.. 그러면 나는 뭐해?"
여전히 빛나는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런 다연이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었다.
"이리 와. 말해 줄게."
"응!"
바로 흰죽과 같이 먹을 간장 소스를 만드는 일. 흰죽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언니가 간장이랑 참기름 따라 줄테니까 다연이는 잘 섞어주면 돼."
"응!"
별 거 아닌 일이지만 다연이가 기뻐하니 다행이다.
예나는 곧이어서 간장을 한숟가락씩 따라준다. 세 명이서 먹을 거니까 종지는 세 개로 준비한다.
"이제 마싯는 참기름이야!"
다연이는 참기름만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말했다.
쪼륵.
참기름이 떨어지고 간장 위에는 옅은 기름기가 떠다닌다.
지금 넣은 참기름이 소스를 마냥 짜지만은 않게, 그리고 더 고소하게 만들어 줄 거다.
"내가 만들어따."
"그래, 잘 했어."
이제 남은 건 흰죽을 잘 저어주면서 완성시키는 일 뿐이다.
스윽.
어느 새 걸쭉해진 흰죽이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게 흘러간다.
단단한 쌀알도 물에 불려져서 부드러워졌다. 몇 번 더 저은 다음, 완성된 흰죽을 그릇에 나눠담는다.
다연이는 그 틈에 오빠를 깨운다.
예나가 집에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적당히 설명했다.
다연이 혼자서는 요리를 할 수 없어서 그랬던 거라고. 그러니 오빠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먹어요."
"고마워."
따뜻한 죽 한 그릇. 다연이는 자기가 도와준 이 죽을 뿌듯한 얼굴로 바라본다.
***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다연이와 예나가 죽을 만들었다.
흰죽. 죽 하나만으로는 심심한 맛이지만 소스와 곁들여 먹으면 생각보다 더 맛있다.
게다가 아플 때는 더 잘 넘어가는 죽이다. 약 같은 죽이라고 해야 하나.
"이거 마싯게 먹어야 해. 왜냐면 내가 만들었거든!"
"그래,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응!"
다연이는 내가 먹을 때까지 먹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아무래도 먼저 먹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숟가락으로 따뜻한 죽을 퍼담는다.
이렇게 죽을 보고 있으니 처음 죽을 먹었을 때가 생각난다. 생각보다 좋은 맛에 조금 놀랐었다.
포근한 냄새와 그것보다 더 말랑한 식감. 간장 없이 먹어도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지만 흰죽은 간장 소스와 곁들여 먹어야 진짜다.
두 번째는 간장 소스를 약간 넣어준다.
하얀 죽 위에 물감을 칠한 것 같다. 은은하게 퍼지는 색. 맛있겠다.
"마시써?"
"응, 엄청 맛있네."
오랜만에 먹으니 정말 맛있다.
아이들도 그제야 죽을 먹기 시작한다. 다연이도 죽을 한 입 먹더니 커다란 눈으로 말했다.
"우와···! 내가 했는데도 엄청 맛있어..! 나도 오빠처럼 요리사 해야게따!"
"그래, 그러면 되겠네."
그렇게 말한 다연이는 이어서 죽을 먹기 시작한다. 진공 청소기처럼 호로록 먹는다.
"마시따!"
나도 빨리 먹고 나아야겠다.
.
.
.
다음 날, 잠을 푹 자고 나니 한결 개운하다. 열도 내린 것 같다.
나는 평소처럼 일찍 식당 문을 연다. 오늘부터는 다시 일을 해야하니까.
"다 나았어?"
"응, 다연이 덕분에."
"우오··· 나 덕분이야."
다연이가 뿌듯한 얼굴로 웃는다.
다연이가 없었다면 혼자 아파하고 있었을텐데.
"나는 요리를 엄청 잘 하나봐. 오빠도 낫게 해쓰니까!"
"그래."
"나는 나중에 요리사가 돼야지!"
자신만만한 다연이가 뚜벅뚜벅 걸으면서 등원 준비를 한다.
***
며칠이 지나고 나른한 오후, 오늘은 다연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날이다.
주말은 아니지만 오늘은 공휴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식당에 있다.
다연이는 식당 홀에 있는 의자 두 개를 붙인 채 따뜻한 햇볕을 받으면서 누워있다.
"흐암."
졸린다. 참새 소리도 들리고 밥도 먹어서 배부르다.
지금 오빠는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점심 때 손님들이 많아서 재료를 다시 손질하고 있다.
그 동안 다연이는 잠을 자기로 했다. 엄청 졸리거든.
"졸린다아···"
눈앞에서 참새가 통통 거리며 뛰어다니지만 참새와 놀 시간은 없가. 지금은 너무 졸린다.
자야겠다.
"쿠우."
얼마나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식당에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다연이는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누구야..?"
"어··· 안녕?"
식당에 온 손님은 어떤 남자였다. 푸근한 인상의 남자.
다연이는 그 남자를 어디에선가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러다 문득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밥돌이야!"
밥돌이. 요즘 다연이가 푹 빠져있는 영상 채널의 주인공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하고 또, 맛있게 먹는 사람.
밥돌이라는 채널명을 가진 엄청 좋은 사람이다.
"나 알고 있나 보네."
"밥도리이···!"
다연이가 놀란 얼굴로 오빠가 있는 곳을 바라본다.
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