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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연이는 혜원이와 같이 혜원이 엄마 손을 잡고 오는 길이다.
오늘 어린이집에는 오빠가 아니라 혜원이 엄마가 왔다.
다연이가 왜 그런 건지 물었을 때는 오빠가 엄청 바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식당에 사람들이 다연이 머리카락 개수만큼 많이 와서 바쁘다고.
"그러면 오빠는 오늘만 안 오는 거에요?"
혜원이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다연이가 물었다.
"내일도 다연이 오빠가 바쁘면 이렇게 오겠지?"
"나는 오빠가 바쁘면 조은데 시러요."
"왜?"
양 손에 아이 손을 하나씩 잡고 있던 혜원이 엄마가 묻는다.
"열심히 일해서 잘 살 수 있는데.. 열심히 일하면 오빠 힘들자나."
그러더니 혜원이 엄마가 다연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유, 착하네. 착하고 귀여워."
"엄마, 나는?"
그 때 혜원이가 말했다.
"혜원이도 착하고 귀여워."
그렇게 둘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던 혜원이 엄마가 다연이에게 말했다.
"다연아."
목소리는 낮았고 표정은 진지하다.
"네?"
"너···. 내 딸할래?"
"....시러요! 아줌마 딸 안 할 거야. 오빠한테 다 말 해야지!"
"왜? 혜원이도 있는데?"
장난스런 목소리에 다연이가 발을 동동 구른다.
"아줌마 집에는 오빠가 없자나요! 맛있는 김치찌개도 업꼬!"
다연이는 예전에 아줌마가 김치찌개를 못했다던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은 오빠한테 배웠기 때문에 잘하겠지만 당연히 오빠보단 못할 거다.
“대신 엄청 귀여운 혜원이가 있는데? 그리고 아줌마 이제 김치찌개 잘해.”
엄청 귀여운 혜원이라. 사실 다연이도 혜원이와 매일 놀 수 있는 게 좋긴 하다.
혜원이랑 어린이집에서만 놀아도 좋은데 매일 같은 집에 논다니.
“오···”
조금 마음이 흔들리지만 다연이의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러요. 대신 오빠도 같이 가면 생각해 볼 게요.”
“큭큭, 알겠어. 그러면 다연이 오빠부터 데리고 가야겠네.”
“대신 나는 아줌마 딸이 아니라 오빠 동생으로 가는 거에요.”
그 말에 혜원이 엄마가 큭큭, 거리면서 웃는다.
그러다가 오빠 식당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 서 있는 줄. 교복인 걸 보니 예나 언니랑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인 것 같다.
그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다연이다!”
그 목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혜원이가 말한다.
“다연아! 너 부른다!"
다연이가 그 모습을 보고선 살짝 뒷걸음친다.
모두가 일제히 다연이를 본다.
"도··· 도망쳐야 해···!"
"왜?"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
계속 주춤 거리고 있던 다연이는 저 줄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예나를 발견하고 달려간다.
“언니!”
“안녕, 다연아.”
“안뇽.. 인데.. 저 사람들이 자꾸 나를 봐···”
그 말에 다연이를 보고 있던 수많은 눈들이 슥하고 사라졌다.
“너무 많아서 무섭따..”
다연이의 말에 웅성거리던 소리도 멈췄다.
예나는 다연이의 말이 꼭 왕의 말이라도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다연이의 말에 따라서 행동했으니까.
“다연아, 일단 오빠한테 왔다고 말하자.”
혜원이 엄마의 말에 다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다연이는 오빠에게 인사한 다음 곧바로 예나에게 왔다.
“안뇽, 혜원아. 잘 가.”
“안녕, 내일 보자.”
두 아이의 인사가 끝나고 혜원이가 다시 간다.
그러자 예나가 물었다.
“왜 여기로 왔어? 집에 안 있고?”
“오빠 일하는데 혼자 있으면 심심하자나. 나는 언니들이랑 같이 놀래.”
다연이의 말에 수많은 눈들이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예나는 그 모습이 공포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는 귀신들처럼.
“무.. 무서워..! 여기 보지마요!”
다연이 답지 않은 말에 수많은 눈들이 다시 사라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나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지금 여기에서 다연이와 친한 사람은 예나와 친구들 뿐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꽤 자랑스러웠다.
그러고 있으니 긴 줄에서 얼굴이 하나, 둘 튀어나온다.
“안녕, 나 예나 친군데···”
“나도!”
점점 많아지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난 뒤에야 다연이는 예나 옆에서 줄을 설 수 있었다.
“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생각해써. 전부 다 인사해야 하자나.”
예나가 보기엔 다른 학생들은 아직도 진정을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다연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정도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학생들도 다연이를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괜찮겠지.
“다연이가 너무 유명해서 그래.”
“나, 유명해?”
“응, 언니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을 걸?”
“왜 나를 알고 이찌..? 나는.. 음··· 어린이집 갔다가 다시 집에 왔다가 다시 어린이집만 갔는데. 가끔 오빠랑 놀러 가고.”
줄 앞뒤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린다. 예나는 다연이의 그런 표현이 좋았다.
다연이 같은 아이랑 대화하고 있으면 서툰 문장들이 좋다.
평소에는 절대 듣지 못했을 말이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다연이 일기장 쓰고 있지? 그거 보고 다른 사람들이 안 거야.”
“내 일기장..! 언니들이랑 선생님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다연이가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그러자 튀어나왔던 얼굴들이 다시 숨었다.
“다 보고 이써써! 그러면 내가 어제는 뭐 써찌..?”
어제 썼던 일기를 떠올리고 있던 다연이에게 누가 뭔가를 내밀었다.
반짝반짝한 껍질과 길게 늘어져 있는 막대. 다연이는 그게 뭔지 단박에 알았다.
“맞아! 사탕 사진을 올려찌!”
“이거 먹을래?”
고개를 들었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내미는 모르는 사탕. 받으며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받으면 안 된다고 해써요.”
“나.. 예나 친군데..”
그 말에 예나가 말했다.
“누구···?”
“아, 옆반에··· 저번에 인사했었는데···”
예나의 친구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예나도 옆에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다연이는 그것들을 전부 넘어서 너무나도 사탕이 먹고 싶었다.
“그럼.. 하나만 받을 게요···”
다연이가 사탕을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나중에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탕을 주머니에 집어 넣고 다시 고개를 드니 줄에서 수많은 눈들이 튀어나왔다.
“무서워..!”
하지만 그 눈들이 내민 건 무서운 게 아니다. 사탕이었으니까.
“이거는··· 너무 많은데···?”
“다연아, 내 사탕도 받아줘.”
어느 새 다연이 손에는 사탕 한무더기가 있었다. 다연이는 그걸 보면서 다 먹지는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에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사탕들은 다시 쥐어도 또 다른 하나가 떨어진다.
“나, 사탕 부자가 됐어..!”
“전부 다연이 좋아하나 보다.”
“그런데 나는 알고 이찌. 사탕 부자도 사탕을 전부 못 먹는 거.”
예나는 다연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탕 파는 사람도 사탕은 전부 못 먹어. 다른 사람들한테 나눠줘야 해.”
“오··· 다연이 엄청 똑똑하고 착한데?”
“그래서 이거 나눠줄 거야. 그렇게 해도 돼?”
그러자 수많은 눈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들이 줬던 사탕을 다시 받는 건데도 얼굴은 좋아 보인다.
다연이가 준다는 것만 달랐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 크다.
“대신 몇 개는 내가 먹을 거야!”
“그렇게 해.”
식당에 사탕을 가져다 놓은 다연이가 다시 예나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 잠시 식당 안 쪽을 보더니 말했다.
“오빠는 엄청 열심히 일해. 힘들게따.”
“그러게. 오늘따라 손님들이 많네.”
“나 때문에 그런 거야?”
“음.. 아니. 다연이 덕분이지.”
“덕분이는 좋은 거지?”
“큭큭, 맞아. 좋은 거.”
고개를 끄덕이던 다연이는 예나에게 다시 말했다.
“혹시 마리야.. 언니가 오빠 도와줄 수 있어?”
“내가?”
“응,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나는 키가 너무 작아서 안 돼. 언니가 도와주라. 우리 오빠 엄청 힘드러..”
아저씨를 도와주는 거야 상관없지만 지금 도와준다면 쉬는 시간을 전부 날려버리게 될 거다.
오늘은 자율학습을 해야하니까.
예나가 잠시 생각하던 사이, 옆에 있던 친구들이 말했다.
“그래! 우리가 도와줄게!”
“정말?”
“응, 대신 하나만 말해줘.”
“뭔데..?”
“우리랑 제일 친하다고!”
“오··· 그거 뿐이면 바로 말할 수 이찌."
다연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선 크게 말했다.
"나는 이 언니들이랑 제일 친해요! 내가 물고기도 줘찌!"
"좋아! 그러면 빨리 가자!"
"응!"
다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
"후···"
오늘은 특히 손님들이 많다. 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오늘 어묵을 먹으러 왔던 남자 선생님과 관련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은 했다.
왜냐하면 그 선생님이 식당을 나서기 전에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 손님들 많이 올지도 몰라요. 어묵이 넉넉했으면 좋겠네요.'
그 선생님 답지 않게 말이 길었지만 왠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더니 진짜 손님들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이렇게 줄까지 설 줄은 몰랐는데.
혼자라서 더 바쁘다. 하지만 바쁜 게 좋은 법이니 군말 없이 일을 한다.
그 때 다연이가 신난 얼굴로 식당 안에 들어온다.
“오빠! 내가 언니한테 도와달라고 해써!”
그 뒤로 예나와 친구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래서 언니가 도와준다고 해찌!”
다연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
.
.
“사탕 먹어요.”
다연이가 마지막으로 사탕을 건네주고 손님이 나갔다.
“후···”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몰아치던 손님들도 모두 나갔다. 예나와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계속 일을 하고 있었거나 기다리던 손님들이 지쳐서 나갔겠지.
그런 일은 없어야 되는데. 식당 일을 하면서 가장 후회가 됐던 일은 재료가 없어서 못 팔았던 때와 축제 때 기다리다 지친 손님이 돌아서는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다.
오늘 같은 일을 겪어보니 알바가 있어야 하긴 하겠다. 이제야 왜 할머니가 나를 알바로 썼는지 알 것 같다.
너무 늦었지만.
“고마워.”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다연이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요. 다연이 아니었으면 저희도 줄만 서 있었을 걸요.”
“그러치!”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턱을 치켜든 다연이는 티비 속 캐릭터처럼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입에 물고 있는 사탕까지 있으니 저 미소가 꾸며낸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다연아.”
“응!”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던 다연이가 의자 위로 올라가고 나는 도와준 아이들에게 알바비에 대해 말했다.
도와준 만큼 대가를 줘야 하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일한 만큼 돈을 주고 마지막으로 예나에게 몫을 주려고 할 때, 예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거 대신 다른 거 말해도 돼요?”
“다른 거 뭐?”
“음···”
잠시 고민하던 예나가 입을 열었다.
“저, 여기 알바 시켜주세요.”
퉤